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497화 (495/656)

제 497화

그날 밤, 진희는 퇴근 후 술자리로 향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명동점 바로 앞의 호프집이었다.

가게 앞에 도착하자마자 낯익은 이들을 찾을 수 있었다. 혜정이가 익숙한 남색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서 뛰어왔다. 그 뒤에는 현아가 차분하게 걸어왔다.

“진희 언니이이!”

주영모 아카데미에 다니던 때에는 매일 보았지만 이번에는 몇 달 만에 만났다. 오랜만에 보는 만큼 더 반가웠다. 진희는 미소를 지으며 어린 동기들을 반겼다.

“혜정아! 현아야!”

“언니!”

“진짜 보고 싶었어요!”

주영모 아카데미에서 혹독한 시간을 함께 보냈던 제과제빵사 지망생들. 그들은 저마다 새로운 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요즘은 병원 동기들보다 얘들이 진짜 친구 같네.’

나이 차이는 일곱 살 가까이 나지만 같은 분야에서 비슷한 일을 하다 보니 정말로 친구처럼 느껴졌다.

“진희 언니 진짜 이뻐졌다. 요즘 관리라도 받으러 다녀요?”

“호호호, 그런 건 아니야.”

진희는 대강 얼버무렸다.

“양념 하나 후라이드 하나, 그리고 맥주 피처 하나 시켰습니다.”

청일점인 김동진은 먼저 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같이 아카데미 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다들 이제는 어엿한 사회인이네.”

진희가 놀리자 현아가 환하게 웃었다.

“에이, 언니. 우리는 원래 사회인이었어요. 조리고는 외부실습 많이 나가서, 사회 경험을 빨리 하잖아.”

“하긴, 그게 더 나은 것 같기도 해. 자기한테 무슨 일이 맞는지 모르니까, 일찍 일찍 해보는 게 좋지.”

현아가 물었다.

“저 그래도 대학 졸업장 갖고 싶어서 요즘 사이버 대학 알아보고 있어요. 언니도 뭐 다닌다구 하지 않았어요?”

“방송통신대학교 식품영양학과 다녀.”

혜정이가 웃었다.

“제과제빵이나 조리 쪽이 아니고요? 보통 그쪽으로 많이 가잖아요. 이번에 현아 언니도 영희사이버대학 호텔조리학과로 갔거든요.”

“제과제빵이나 경영 부분은 완전히 실전으로 배우고 있잖아. 아버지도 계시고 진혁이도 있으니까, 다른 데서 이론을 배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 내가 정말로 알고 싶은 부분은 다른 거니까 그걸 가르쳐 주는 데로 간 거지.”

“언니가 더 알아야 되는 게 대체 뭔데요?”

혜정이가 물었다.

“솔직히 언니가 지금 부족한 데가 없잖아요. 지금 푹신푹신한 구름빵도 건강하면서 맛있는 빵으로 이름 날리고 있고. 이번에 라디오에 출연한 것도 잘 들었어요.”

“지금 당장 내가 만드는 빵에 들어있는 성분이 인간의 몸에서 어떤 식으로 소화되고, 어떻게 쌓이는지 알고 싶었어. 생화학하고 생리학에서 배웠던 건 영양보다는 신체의 구조와 작동 방식 중심으로 진행됐으니까.”

“나는 퇴근하면 뻗어서 자기 바쁜데 언니는 어쩌면 그렇게 쉬지 않고 돌아다니나 몰라. 정말 존경스럽다니까.”

혜정의 말에 현아가 거들었다.

“맞아, 맞아. 내가 언니가 부럽다가도 부럽지 않은 포인트가 있어. 언니처럼 열심히 살면 성공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니까요.”

“혜정이 너도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

“헤헤.”

혜정이가 머쓱하게 웃었다. 주영모 아카데미에서 최종적으로 케이크를 보여주던 날, 멘탈이 약한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못하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제과제빵 과정을 수료하고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 <빵과 길> 방송 봤어. 네가 푸드 코디 같이 한 거라며?”

“앗! 언니 바쁜 와중에 어떻게 본 거예요?”

“우리 혜정이가 했다는데 당연히 봐야지.”

“와, 진짜 의리 있다. 몸이 세 개라도 모자라겠어요.”

현아는 <해와 달>의 분점에 수습 제과제빵사로 취업했다. 동진이는 본점에서 제과제빵사로 일하고 있다.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정식 제과제빵사가 되었다. 한동안 계속 막내였지만 지금은 후배로 들어온 강운종 등 다른 제과제빵사들이 있다.

퇴근 시간 자체가 늦어지고 출근도 이르다 보니 이런 식으로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자기 길을 찾아간다는 점이 대단해.”

“방송국에서 푸드 스타일링 하는 일이 어렵지는 않고?”

“쉽지는 않아요. 먹기에 예쁜 것보다 보기에 예쁜 것이 우선시되면 조금 허무할 때도 있고요. 특히 음식 프로그램 촬영할 때 더 그래요.”

“어떤 점이?”

“요리 프로그램을 촬영할 때 보통 재료를 3세트 준비한단 말이에요? 재료 씬이 나올 때 깔아두고 찍을 거, 실제로 음식 만들 분량, 마지막에 예비로 하나. 저번에 그 비싼 참치 뱃살 횟감을 100kg이나 준비했거든요. 재료용이랑 예비용은 완전히 다 버려야 했어요. 그걸 보니까 너무 아까운 거 있지.”

“아하하하.”

“제과는 예쁘게 만들어도 결국은 맛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요리 프로그램하면서 사진 다 찍고 촬영 다 하고 나서 먹으면 음식들이 다 식어서 차갑게 굳어버려요.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수준이 되어버리거든요. 그래도 배우와 출연자들이 연기하면서 먹는 척하는 걸 보면 미안하기도 하고.”

“와, 그게 다 연기란 말이야? 엄청 맛있게 먹던데.”

“음식점 가서 주문하고 나서 요리 나오고 카메라 들이대고 SNS용 사진 찍다 보면 다 식어버리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조명 팀이랑 영상 팀이랑 조율하고 괜찮을 때까지 연기 다시 하고 재촬영하고 하다 보면 2~3시간은 훌쩍 가요.”

“진짜 맛있을 수가 없겠네.”

“그렇죠. 눈앞에서 방금 만든 음식이 제일 맛있는 시간을 지나버리니까 안타까워요. 그걸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일을 못 하더라고요.”

“맞아. 나도 가게에서 빵 굽고 요리하고 하면서 요리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 전에는 그냥 먹기만 했는데 이제는 만든 사람의 정성, 그리고 마음에 대해 생각을 하게 돼.”

“아하하하!”

혜정이가 말했다.

“언니는 정성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깊이 생각하는 게 문제가 아닌가 싶은데.”

“그래도 아카데미에서 한창 연습할 때보다는 지금이 훨씬 낫지. 돈도 들어오고, 내가 새로운 메뉴를 개발할 수도 있고. 그리고 임진혁 쉐프님이 지켜보고 있지 않잖아.”

“앗, 그때는 그게 좋지 않았어? 누군가 우리를 돌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잖아요. 뭐 잘못 만든 거 있으면 귀신같이 캐치해서 고쳐 주니까.”

“맞아, 맞아! 진혁 쉐프님이 그거 하나는 진짜 확실했잖아요. 언니는 지금도 계속 쉐프님한테 배우고 있어요?”

“응응, 빵 만드는 것도 배우고. 다른 것도 배우고.”

‘다른 것’에서 약간 목소리 톤이 바뀌었으나 다른 이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진혁 쉐프님이 달리기시킬 때 진짜 미치는 줄 알았잖아. 제과제빵사는 체력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빵을 만들고 굽고 오븐에 넣고 뛰고 아니 이게 무슨 짓인지.”

“아하하하! 맞아, 맞아. 나도 내가 여기 왜 와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하고 현타 왔다니까.”

세 사람은 옛 시절을 추억하며 한창 수다를 떨었다. 석현아가 고개를 돌려서 물었다.

“동진이 너는 어때?”

“나?”

“네가 이 중에서 유일무이하게 본점에서 일하고 있잖아, 임진혁 쉐프님이랑 같이 일하는 건 괜찮고?”

“어, 좋지. 일하는데 얼마나 보람이 있는지 몰라. 진짜 진희 누나하고 진혁이 형 아니었으면 내가 어디서 뭐 하고 살고 있었을지 상상도 안 가. 지금 이 삶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하루하루가 꿈같을 정도야.”

동진이 담담하게 말했다. 현정이 깔깔대며 웃었다.

“본점에서 일하는 게 그렇게 좋아? 힘들어 죽겠다더니. 언니 앞이라서 지금 일부러 내숭 떠는 거야?”

“아니 아니, 그게 아니야. 본점은 구우면 굽는 대로 빵이 다 팔려버린단 말이야? 그래서 보육원이나 노인복지시설에 갈 빵이 없어. 그런데 진혁이 형, 아니 임 대표이사님이.”

진희가 킥킥 웃었다.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얘기해. 지금은 사석이잖아, 넌 진혁이랑 둘이 같이 살아 보기도 했고.”

동진이가 말을 이었다.

“아예 손님 덜한 월요일하고 화요일에 따로 왕창 만들어서 보내버리더라고. 전에 우리 보육원에도 이런 식으로 빵을 보냈겠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울컥하잖아요.”

진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동점도 시설 몇 군데에 보내고 있어.”

“따로 구워서요?”

“노인 시설에는 부드러운 빵, 그리고 보육원에는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한 빵.”

“정말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야.”

“이건 진혁이나 내가 시작한 게 아니고, 아버지 때부터 그렇게 하셨던 거야.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셔서 나도 그렇게 하고 있어.”

동진이 맥주잔을 들었다.

“멋진 진희 누나를 위해서 건배!”

“건배!”

서로 웃고 떠들며 마시자 시간이 훌쩍 지났다. 두어 시간 정도 마시고 나자 진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간다.”

“저도 내일 새벽부터 촬영이에요.”

“나도 5시부터 출근해야 하는데.”

“난 내일 쉬는 날이지롱.”

“아하하하!”

임진희는 자연스럽게 계산서를 집어 들었다. 동진이가 말렸다,

“누나, 여기는 우리가 사게 해주세요.”

“맞아요. 항상 언니가 사줬잖아.”

“우리도 월급 받는다구요.”

“그래? 그럼 오늘은 내가 얻어먹을까.”

진희가 생긋 웃으며 계산서를 내미는 척하다가 다시 빼앗았다.

“자, 자. 다음에 커피라도 사 줘. 오늘은 내가 살 테니까.”

“고마워요.”

그녀는 한 명 한 명 손에 택시비까지 쥐여주고서 택시를 태워 보냈다.

여자아이들 두 명의 경우에는 택시 번호까지 기억해 두었다.

임진희는 네 번째로 택시를 불러, 임진혁이 살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황미미와 임진혁은 이미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임진희, 늦었어.”

“늦다니! 10시 30분까지 온다고 했잖아.”

“술을 마셨으면 먼저 탁기부터 배출하자.”

“이렇게 기분 좋게 취기가 서린 게 딱 좋은데.”

진희가 투덜거리면서 겉옷을 벗어 걸었다. 황미미가 생긋 웃었다.

“진혁 씨께서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내내 기다리고 계셨어요.”

“네.”

진희는 미미 눈치를 보며 방으로 들어갔다. 1층의 구석 방에는 미미가 미리 챙겨 준 편안한 옷들이 놓여 있었다. 전부 진희에게 꼭 맞았다.

임진혁과 황미미는 운동복을 입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태극권이라.”

“피부 미용과 노화 방지에 좋지.”

“그렇게 말하니까 다이어트 광고 같다.”

진희가 밝게 미소지었다.

“그래도 네가 가르쳐준 이 태극권이 진짜 효과가 좋아. 요즘은 하루에 네 시간만 자도 일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니까. 머리가 똑똑해진 것 같기도 해.”

“돌을 닦아봤자 돌이지.”

“야!”

진희가 소리를 빽 하고 질렀다. 황미미가 우아하게 웃었다.

“진희 아가씨께서 이번에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으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진혁이는 만만하지만, 올케는 그렇지 않다. 진희가 요가 매트 위에 올라서서 태극권의 기수 자세를 취했다.

“미미 씨도 지금 같이 운동해요?”

“저는 오시기 전에 이미 한 번 했어요.”

진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집에서 충분히 연습했어? 손을 이렇게 들고, 팔은 구부리는 게 아니야. 하늘을 들여다보면서 심호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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