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496화 (494/656)

제 496화

어머니가 진혁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중에 맘에 드는 사람은 없고?”

“없어요.”

진희가 딱 잘라 말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서 고양이를 받아 안으며 뺨을 비볐다.

“어휴, 따뜻해라. 털도 부드럽고. 누가 이렇게 잘 키웠담. 누나가 이렇게 잘 키웠지?”

진호가 고릉고릉 소리를 내며 안겨 있자 어머니가 혀를 찼다.

“네가 키웠니? 내가 키웠지.”

“엄마, 그 사람들 다 본사로 돌아갈 사람들이에요. 뭣 때문에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는데, 나랑 보는 시야 자체가 달라.”

진희가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어머니가 못내 아쉬운 듯이 말했다.

“그래도 혹시 인연일 수도 있잖니?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에이~엄마! 왜 똑같은 소리를 자꾸 하게 해요. 그 남자 입장에서는 지금 상사라서 갑을관계가 있는 건데, 내가 딴 마음 먹고 불편하게 하면 안 되잖아요. 직장에 일하러 왔는데 상사가 괴상한 착각을 하는 것만큼 불편한 일이 어디에 있다구.”

진희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임진혁은 그 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하아.”

감정 표현 없이 무덤덤한 아들이 실망감을 표출하는 걸 보고 아버지가 놀라서 물었다.

“진혁아, 왜? 요새 일이 잘 안 돼?”

“아니에요. 그냥 진희가 행복해졌으면 했는데 잘 안 되네요.”

“웃긴다. 내 행복을 왜 네가 신경 써?”

진희가 씩씩하게 단언했다.

“그렇게 땅이 꺼질 만큼 한숨 쉬고 있을 시간 있으면 내 새로운 웰빙 빵 기획안 좀 봐 줘. 이번에는 글루텐하고 설탕만이 아니라 유제품을 완전히 빼버린 빵을 생각했거든? 아예 아몬드유로 대체한 빵이랑 두유로 만든 빵이 있는데.”

아버지가 관심을 보였다.

“그러면 맛은 어떠냐, 시제품은 갖고 왔어?”

“여기 있어요.”

진희는 하얀 종이봉투에서 갈색으로 바삭하게 구워진 빵을 꺼내 들었다. 주먹만 한 빵은 호밀빵처럼 겉가죽이 거칠거칠한 모양이었다. 진혁이 그 빵을 받아들여 반으로 쪼갰다.

아버지는 안쪽에 구멍이 뻥뻥 뚫려 그물망처럼 얽힌 속살을 쭉 찢어, 입에 넣어보았다.

“이거 우리 꼬맹이 밀로 만든 빵하고 비슷한데.”

“네. 좀 더 부드럽게 하려고 버터도 넣어보고 해 봤는데 제가 원하던 식감이 나오지를 않아요.”

진혁은 빵을 한입 물어보았다. 쫄깃하면서도 거친 식감은 나쁘지 않았다.

“좋은데?”

“어떻게 하면 더 폭신하고 질감이 부드럽게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식빵처럼 포근하고 포실포실한 빵이었으면 좋겠는데.”

아버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이렇게 거친 그대로 가면 안 되냐? 애초에 소금하고 이스트, 밀가루하고 버터밖에 쓰지 않았네. 그러면 푹신한 맛을 내기는 힘들지.”

진희가 항변했다.

“진혁이는 그 맛을 냈잖아요. 우리 꼬맹이 밀로도 푹신푹신한 빵을 만들어서 지금도 팔고 있잖아.”

“그럼 우리 꼬맹이 밀로 만들어 봤어?”

“재료 때문은 아니야. 그냥 내가 스킬이 부족한 거지.”

임진혁은 문득 진희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며 바라보고 있는지 깨달았다.

‘아.’

진희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자신을 받쳐줄 만한 남자를 찾는 것이 아니다.

행복하게 연애를 하여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도 아니다.

지금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한 지점의 점장으로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건강한 빵을 개발하면서 동시에 자신보다 능력 있는 부하직원들에게 눌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고 보면 내가 막 소교주가 되었을 때 애들이 자꾸 귀찮게 침대에 여자들을 밀어 넣으려고 했지.’

한창 무공 수련에 힘쓰며 내공 심법을 쌓고 있을 무렵, 원치 않는 관계를 강요하는 장로들이 싫었다. 귀찮고 번거로워서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

실제로 몇 명은 죽이기도 했다.

악의가 아니라 호의에 가까운 감정으로 보냈다는 사실을 안다. 무공이 뛰어나고 능력 있는 소교주에게 가까운 시비를 붙여서 자신의 자리를 공고하게 하려는 수작이다. 개중에는 혈육을 보내어 관계를 맺고자 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내가 진희에게 아주 무례한 일을 저지르고 있었군.’

산을 오르기 위해 무리해서 걷고 있는 이는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다.

옆에 동반자가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잘 맞는 등산화와 장비, 그리고 올바른 방향을 향한 이정표가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그 길에 동반자가 나타날 수도 있지만 없어도 좋다. 혼자 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무렵에는 하늘도 나무도 보이지 않고 그저 빠르게 가는 것만 보게 된다.

하지만 진혁은 진희가 자신처럼 혼자 남기를 선택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진혁이 임진희의 빵을 씹어 물면서 말했다.

“결혼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응?”

“얼마 전에 친구들이 계속 청첩장 보낸다고 불평했잖아.”

진희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친구들만 보냈냐, 너도 보냈지! 지금 누구 얘길 하는 거야.”

어머니가 딸을 옹호했다.

“솔직히 진희 친구들이 일찍 일찍 한 편이지, 진희가 늦은 건 아니야. 지금 아직 서른 살도 안 됐잖니.”

아버지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느이 엄마는 네 나이에 애가 둘 있었는데 말이야.”

어머니가 탁자 밑에서 아버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여보, 요즘이랑 그때랑 같아요? 우리 산목아파트에 들어오는 새댁들 좀 봐, 서른셋, 서른넷 그래. 다들 자기 일하고 싶은 만큼 하고, 좋은 사람이 있으면 결혼을 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는 거지. 우리 때야 결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있었지. 하지만 요즘 어디 세상이 그런가요.”

“진희 너도 비혼이니?”

“그런 건 아닌데, 요즘은 일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다른 생각이 안 들어요. 그리고 저 인기 있어요! 만날 시간이 없어서 그런 거지.”

진혁이 흥미를 보였다.

“어디서 누구한테 인기 있는데?”

“앨리슨 씨가 유튜브에 나 올렸잖아. 내가 하는 가게 인스타그램도 링크해 줬는데, 그 이후로 개인 쪽지도 들어와. 평소부터 지켜보고 있다느니, 정식으로 만나보고 싶다느니 등등.”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남자가 용기가 있으면 직접 찾아와야지 비겁하게 쪽지를 날려?”

“그냥 감사합니다. 고객님~ 하고 응대하고 있어요. 호호호호.”

진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남의 연애 생활에 신경 쓰지 말고 네 결혼 생활이나 신경 쓰라구. 솔직히 미미 회장님이 천사지.”

“왜 회장님이라고 불러?”

“정 쉐프님도 장 비서님도 둘 다 미미 회장님이라고 부르니까 나한테도 옮았나 봐. 이론적으로 그분이 내 올케라는 사실은 알고는 있지만, 너무 예쁘고 완벽하잖아. 가족이긴 한데 조금 어려운 느낌?”

진혁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면 둘이 친하게 지낼 만한 일이 별로 없었지?”

“올케님이 나랑 친하게 지내서 좋을 게 뭐 있어? 너하고 친하게 지내야지. 원래 시 자 붙은 건 시금치도 싫댔어.”

“미미 씨는 안 그러는데.”

진희가 킥킥 웃었다.

“그건 네 생각이고. 미미 씨한테도 편하기만 하지는 않을 거야. 인간관계에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거라고.”

임진혁은 두유 빵과 아몬드 빵의 시식을 마쳤다. 어머니 역시 받은 빵을 전부 먹었다. 아버지는 절반을 남겼다.

“네가 원하는 식감을 위해서는 진혁이가 반죽하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 꼬맹이 밀로 빵을 만들었을 때도, 처음에는 그거 진혁이 혼자밖에 못 했어. 결국, 기계도 새로 주문하고, 거 농장 집 아들놈이 배워서 만드는데 거의 1년 넘게 걸렸단 말이지. 그것도 손으로는 못 하더라. 반죽할 때 손힘이 많이 필요한데, 그것도 그냥 강강강강 강하게 하면 안 되고 적절하게 힘을 빼가면서 해야 하는 거야.”

진희는 진지하게 물었다.

“그거 나는 못 배우냐?”

임진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가르쳐줄 수는 있는데 네가 배우면서 굉장히 힘들 수도 있어. 일단 손힘이 부족한 것부터 키워야 하는데.”

아버지는 스스로 물엿을 어떻게 만드는지 배웠다.

하지만 진희는 어떨까.

‘이번에 진희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몰라.’

미미는 이해해 주었다.

하지만 과연 진희가 이해해 줄 수 있을까?

자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 수 있을까.

더 이상 속이거나 얼버무리지 않아도 괜찮을까.

진희가 씩씩하게 말했다.

“당연히 쉽지는 않겠지. 이 나이에 제과제빵 배우면서 장사 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거든? 시간 쪼개서 만나면 돼.”

“응.”

“생판 모르는 사람도 배워갔는데 나도 알면 좋잖아.”

“너 지금 일하는데 시간 못 빼지 않아?”

“정 쉐프님이 더 일하시면 되지. 사장 좋다는 게 뭐냐.”

진희가 킬킬대며 웃었다.

“거친 빵을 부드럽게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되면 훨씬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어.”

“그거야 그렇지.”

아버지가 물었다.

◈          ◈          ◈

김도을은 열심히 방송하고 있었다.

“해와 달 명동점에 새로 나온 건강 빵에 대한 리뷰를 해보겠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폭신폭신한 구름빵이에요. 건강에 좋으면 맛이 없는 게 당연한데, 신기하게도 맛이 있다. 이런 평입니다.”

정식으로 방송에 합류한 재희 역시 거들었다.

“다이어트에도 좋아요. 지금 한 달째 먹고 있는데 질리지도 않고, 어쩌면 이런 빵을 다 만들었는지 신기할 정도예요. 밥을 먹을 때보다 빵을 먹을 때 더 몸이 좋아진다는 게 놀랍다니까요.”

“저도 태권도 할 때 이 빵을 먹고 도장 갔을 때랑 밥 먹고 갔을 때랑 퍼포먼스가 틀려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겠지. 여기 편집!”

“어쨌든 퍼포먼스가 진짜 다르다니까요. 왼발 돌려차기도 잘 나가고, 목판 깨기도 잘 됩니다. 건강을 위한 빵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원래 본점만 다녔단 말이에요? 똑같은 크림이라도 본점의 슈크림과 명동점의 슈크림 맛이 다르거든요. 그런데 요즘 건강빵은 진짜 명동점이 최고예요.”

“와, 재희 누나 은근슬쩍 본점 디스하네.”

“디스하는 게 아니지. 어떻게 다른 건지 알려주는 거야.”

두 사람이 웃고 떠들며 한 시간여 녹화가 끝났다. 이제 편집 점을 정해서 넘기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누나, 요새 진짜 본점보다 명동점을 자주 가요?”

“본점에 임진혁 쉐프님이 나오시는 날에는 본점 가지.”

“아, 진혁이 형이 본점에 나오는 시간이 줄어들어서 그렇구나.”

“미국 쪽 병원 카페 일이 잘된다고 하시던데? 일주일에 두 번은 해외출장을 간다고.”

‘진바라기’를 통해 진혁의 소식을 내내 듣고 있던 재희가 알려 주었다. 도을이 놀랐다.

“본점 빵 맛은 전혀 변하지 않았던데?!”

“매일매일 밤까지 반죽은 다 직접 해 놓고 가신대.”

“와, 형이 진짜 장인은 장인이다. 그쯤 되면 제과제빵사가 아니라 경영인으로 자리매김할 만도 한데. 지금 그 상황에서도 꼭 자기가 직접 빵을 만들어야 된다는 게 대단해.”

“진혁 쉐프님은 처음부터 그런 분이셨잖아.”

“다른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돈을 벌어오는 게 진짜 좋은 거잖아요. 나도 지금 유튜브 편집을 다른 사람한테 맡기니까 엄청나게 편한데. 이젠 촬영도 부탁하고 싶단 말이야.”

재희가 기특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지만 기획이랑 인터뷰, 빵 리뷰는 다 네가 혼자 하잖아. 진혁 쉐프님이 생각하시기에는 빵을 직접 반죽하고 굽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인 거겠지?”

“나도 형같이 변치 않는 사람이 되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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