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2화
상 교수가 나가고 난 후 미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검사에 실수가 있었던 걸까요?”
그녀가 혼잣말을 하자, 내내 뒤에 서 있었던 왕 비서가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조사할까요?”
미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 측에서 실수라도 한 건 없는지 확인해 줘.”
진혁은 흠흠, 헛기침을 했다.
‘생각해보니 아내에게 내가 어떤 능력이 있는지 자세히 이야기해주지는 않았군.’
하지만 아내의 부하직원들 앞에서 이야기할 수는 없다. 진혁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럼 내가 퇴원 절차를 밟으러 내려갈게.”
“제가 하겠습니다.”
한 비서가 바람과도 같이 사라졌다.
“응?”
“진혁 대표님은 회장님 옆에 계셔 주세요.”
미미는 애틋하게 진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두 사람만의 세계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부하직원들은 빠르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두 분이 의논하실 게 많으시지요?”
“저희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진혁은 이 자들이 자신과 미미를 둘만 있게 해주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미는 고개를 들어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진혁이 그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겨 주자 미미가 살짝 웃었다.
“어렸을 때는 제가 세상의 중심인 줄만 알았어요.”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미는 부유하고 권력 있는 집안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냐오냐해가며 딸을 어리광쟁이로 키웠다.
하지만 열 살이 되자 할아버지가 본가로 데려왔다. 할아버지는 손녀딸을 아주 아꼈으나 그 방식은 아버지와는 달랐다.
“저 말고도 후보들이 더 있었어요.”
“후보들이요?”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너는 집안을 물려받을 만큼 똑똑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어요. 저한테는 그만큼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했고요.”
경영과 외국어, 그리고 역사.
회계와 투자.
배울 것은 많고도 많았다.
그리고 여자아이인 미미는 요가와 현대 무용, 그리고 연기 수업을 함께 받았다. 그때도 여자 후보들은 함께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보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조금 전에도 보셨어요. 스타일리스트나 메이크업 아티스트, 비서진들 모두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내던 이들이에요.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랍니다.”
“그렇군요.”
진혁은 충성심이 없다고 판명된 이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그래서 천마님?”
미미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진혁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렇게 부르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천마님~.”
임진혁이 머쓱하게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게.”
황미미가 애교 있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
“천마니임~?”
“하하하하하하!”
진혁은 크게 웃어버렸다.
신도들은 경외에 가득 차 그를 ‘교주님’이라 불렀다. 공포를 담아 천마라고 부르는 이들은 그와 관련 없는 일반인들이었다.
정파의 주구들은 그를 악마라 불렀다.
누군가 애정을 담아 이런 식으로 이 호칭을 사용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마음대로 불러요.”
“네, 진혁 씨.”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상식이나 이런 것에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규칙은 내가 만들면 되지요.”
“그래요.”
미미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그녀는 미간을 좁히고 스마트폰을 바라보았다.
“진혁 씨, 미안해요. 이건 받아야겠어요.”
그녀가 빠른 중국어로 누군가와 통화하기 시작했다. 황려권과 관련된 일인 듯싶었다.
진혁은 미미가 조용히 통화할 수 있도록 옆방으로 옮겼다.
어깨에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마음이 가벼웠다. 이전까지 콘크리트 속에 어깨까지 파묻혀 있었다면 지금은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것처럼 신이 난다.
‘진작 이야기했어도 좋았을 것을.’
이제 부모님과 진희에게만 이야기하면 된다.
허튼소리다, 미친 사람이다, 두렵다. 라는 반응이 나올까 걱정했다. 하지만 미미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아무것도 숨길 필요가 없다.
‘그동안 내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벽을 두르고 있었어.’
숨기는 것이 있다면 멀어질 수밖에 없다. 부모님에게 잘 한다고 하지만, 내심 깊은 이야기는 털어놓을 수가 없다.
자신이 진정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도 말할 수 없다.
진심(盡心)을 말할 수 있고 그것을 이해받는다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다.
그는 몇 번이나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는 실패했다.
무림 강호의 이들이 아무리 의리가 있고 진혁을 따른다고 해도 그들은 현대에서 온 진혁의 감각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에만 돌아가면 이해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나 돌아온 한국에서는 오히려 진혁이 이방인이었다.
기껏해야 이십 대 초반에 잠깐 살았던 한국의 기억, 몇 배 이상을 살았던 험난한 약육강식의 세계.
손끝 하나만 움직여도 수백 명의 수하들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권력의 맛.
‘아버지와 어머니, 진희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살고 있지는 않았겠지.’
진혁이 지금 평범하게 살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가족이라는 기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어느 순간 어떻게 터져버릴지 모르는 위험한 폭탄이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얼마나 죽였을지 모를 일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원하는 만큼 죽인 후에 그 감각대로 현대 사회에서 살았더라면 지금같이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지는 못했겠지.’
따뜻한 온천 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온화하고 평온한 기분이다.
이제 혼자가 아니라 둘이다.
비로소 둘이서 함께 새 인생을 시작한다.
그는 차분하게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자신을 관조했다.
회음혈에서 출발한 진기는 명문혈, 그리고 대맥을 통과한 후에 대추혈에서 팔을 지난다.
정순하기 그지없는 기의 흐름은 노도처럼 밀려가 이미 뚫린 임독 양맥을 통과하여 전신을 돌았다.
상쾌하기 그지없다.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그는 유쾌한 기분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미미가 익힐 수 있게 어떤 무공을 가르쳐 주는 것이 좋을까.’
이번에 몸이 좋지 않아 충격이 컸으니 내장의 건강에 중점을 두는 무공을 새로 개발하는 것이 좋겠다.
어떤 빵을 만들지 고민하는 것처럼 가벼운 생각이었다.
‘무당파의 태극권을 기본으로 부작용 없이 익히기 쉽고 건강에도 좋은 무공을 새로 만들어야겠어. 아버지하고 어머니도 이참에 아예 같이 익히시는 게 좋겠지.
똑똑.
통화를 마친 미미가 노크를 했다. 진혁이 대답했다.
“들어와도 괜찮습니다.”
미미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까까지 평온하던 표정에 근심이 서려 있는 것을 보고 진혁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녀가 말했다.
“똑같은 문제가 계속 반복되어서 신경이 쓰이네요. 휴.”
미미의 아버지 황려권이 재차 감시원을 포섭해서 탈출을 시도하려고 한 모양이었다.
운기조식하는 중에도 외부의 소리를 전부 듣고 있던 진혁이 아는 척을 했다.
“아버지 일 때문입니까?”
“…진혁 씨는 전화 내용이 다 들리시는 거지요?”
“예. 듣는 걸 원치 않으시면 듣지 않겠습니다.”
미미가 한숨과 함께 웃었다.
“네.”
임진혁이 사려 깊게 제안했다.
“죽이길 원하시면 죽여 드리겠습니다.”
“…푸핫!”
미미는 임진혁의 제안에 웃고 말았다. 하지만 진혁은 웃지 않았다. 묵묵히 미미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 미미가 물었다.
“지금 진심으로 말씀하는 건가요?”
“네.”
이 남자는 진심이다.
지금 그렇다고 하면 바로 아버지를 죽이러 가줄 태세다.
미리 노트를 읽지 않았고 진혁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면 섬뜩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녀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딱 잘라 거절했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음, 그냥 반신마비 정도로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원한다면 정신 질환도.”
미미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사양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런 패륜을 저지르고 싶지는 않아요.”
“….”
옛 시절을 추억하는지 미미가 그리운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저에게 무척 잘 해주셨어요. 명절 때에는 할아버지와 같이 누가 더 큰 홍빠오를 주나 경쟁하시기도 하고요.”
“그렇군요.”
“보통 아버지가 졌지만요.”
“그렇지만 지금 곤란하시지 않습니까?”
황미미가 눈을 깜빡였다.
“주변 사람들 단속을 제대로 못 했기 때문이에요. 이번에 다시 교육을 시켜야겠어요.”
“분란의 씨앗이 있으면 언제라도 다시 싹이 트기 마련입니다.”
못내 아쉬워하는 진혁을 보며 미미가 당부했다.
“혹여 저 몰래라도 정신 질환을 만들어 주겠다, 신체를 마비시키겠다, 몰래 죽여버리겠다. 이런 생각도 하지 마세요. 제가 할 줄 몰라서 하지 않는 게 아니에요.”
“….”
“아버지라는 혈연은 이미 아버지가 저를 죽이려고 했던 시점에서 끊겼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해서 저까지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면 저도 똑같은 사람이 되어 버리겠지요.”
“알겠습니다.”
진혁은 미미의 이야기를 납득했다.
과거 혈도객 녀석이 아버지와의 갈등과 죽음을 겪으며 얼마나 후회하고 피눈물을 흘렸는가.
미미가 스스로 결정했다면 그것을 존중하고 싶다.
황미미가 물었다.
“아 참, 아까 묻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는데요. 저희 할아버지에 대해서요.”
“예?”
“<천마> 소설 원작은 원래 할아버지가 쓰신 노트의 회고록을 기초로 만들어졌어요. 그걸 보면 할아버지는 그 시대에서 천마님, 아니 진혁 씨와 가까이 지내던 측근 중의 한 명일 수밖에 없어요.”
“….”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 같은 사람인가 하는 생각도 했는데요, 그렇기에는 너무 내밀한 사정이나 서로 간의 인간관계가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어서요.”
진혁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사실 짐작하고 있는 분은 계세요. 누군지 맞춰 볼게요.”
“예에.”
진혁은 그 노트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드라마 <천마>에서는 광안마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잊혀진 집안, 그리고 일월신교에서 주군을 모시는 모습. 제갈공명처럼 대국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가는 책사.
그것만 보아도 황태명이 누구인지는 알기 쉽지 않은가.
“저희 할아버지는 아무래도 혈도객 같아요.”
“예?”
“언뜻 보면 광안마가 주인공인 것처럼 보이지만요. 광안마는 너무 악당이잖아요. 저희 할아버지는 정말 정의로운 분이시거든요.”
“예에….”
“맞지요?”
“음….”
미미의 환상을 깨부숴 주고 싶지 않았던 진혁은 그저 침묵했다.
◈ ◈ ◈
그로부터 또다시 한 달이 지났다.
촬영 장비를 챙겨 인천 공항에 도착한 앨리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익은 청년이 플랜카드도 없이 두 팔을 흔들며 팔짝팔짝 뛰면서 앨리슨을 환영했다.
「마리오! 네가 직접 데리러 왔어?」
「응. 친구 좋다는 게 뭐야.」
「그냥 놀고 싶어서 온 건 아니고?」
마리오가 씩 웃었다.
「소망시까지 가려면 시간이 조금 걸려. 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데….」
「아, 그래?」
앨리슨이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이자 마리오가 씩 웃으며 정정했다.
「그렇지만 내가 운전하는 차에 타면 금방 갈 수 있지! 진혁이네 비서님이 숙소도 알아봐 줬어.」
「이야, 아주 환상적인 대우인데. 벌써 최상급 영화감독이 된 것 같아.」
마리오가 윙크했다.
「그런 셈이지. 다들 기대하고 있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