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1화
최근에 체중이 줄고 피곤하니 미미가 임신일지 모른다며 스타일 팀은 신나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결과는 그렇지는 않았다.
“난소낭종이라고요?”
의사의 말에 미미가 기가 막혀 하며 반문했다.
“이 정도 크기라면 호르몬 요법보다 수술이 낫습니다.”
미미와 진혁은 한국 병원의 특실에서 의사와 면담 중이었다.
응접실과 거실, 그리고 보호자가 잠들 수 있는 침대방까지 딸린 귀빈실이다.
의사와 간호사가 상주하고 있는 VIP 병동에 속해있는 이 병실은 비싸기로 유명했다. 1박 숙박을 위한 병실료만 천만 원이 넘을 정도다.
건립 이후 이 병실을 원하며 찾아온 환자는 몇 되지 않는다.
‘아주 좋은 환자야.’
한국 최고의 산부인과 전문 의사라고 불리는 상 교수는 느긋하게 미소지었다.
난소 낭종은 수술하기 좋은 위치에 있었고 크기도 지나치게 크지는 않았다. 몇 분이면 끝날 간단한 수술이다.
그는 이렇게 영향력 있고 부유한 환자들이 쉬운 질환을 갖고 찾아올 때를 즐겼다.
진혁이 물었다.
“치료를 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좋아질 수도 있습니까?”
어려 보이는 남편의 엉뚱한 질문에 의사가 대답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조금도 없습니까?”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요. 하지만 거의 힘든 일입니다.”
의사가 돌아가고 나자 스타일 팀과 비서가 우르르 들어왔다.
「의사가 뭐라던가요?」
「미미 씨, 괜찮아요?」
미미가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모두 돌아가 줘, 진혁 씨하고 둘이서만 이야기 나눌 거야.」
충실한 부하직원들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면서도 두말하지 않았다.
「예.」
그들은 그대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미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나이도 어리고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식사 역사 최고의 영양사와 조리사가 조리한다.
「저 나름 건강이 좋다고 자부했는데 허무해요.」
여성성이 박탈된 듯한 느낌도 있었다. 측근들은 위로해 주고 싶어 했지만, 위로를 듣고 싶지도 않았다.
상문경 의사는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서 부인과 질환으로는 최고라고 했다. 그는 복강경으로 하면 흉터도 남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다. 하지만 미미는 복부에 흉터가 남는 것도 싫었고, 자신의 몸에 하자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싫었다. 진혁을 실망시키는 것도 싫었다. 그녀는 아주 기분이 나빴다.
진혁이 말했다.
「사실 아주 건강한 편은 아니었지요.」
그리고 갓 결혼한 남편은 눈치가 없었다.
「….」
원래 없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몸이 아프면 사람은 서럽기 마련이다. 그래도 지금 이 상황에서 좋은 점이 하나 있었다.
「진혁 씨, 바쁜데 여기에 있어도 돼요?」
걱정과 염려가 섞인 질문에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미미는 진혁이 얼마나 바쁜지 알고 있었다. 태명 학원 재단의 이사장으로 취임한 임진혁은 미미의 브레인 팀이 하는 조언을 받아 땅에 건물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미 <해와 달>의 대표이사로서 프랜차이즈 신규 메뉴 개발을 비롯하여 전체 업무를 관리하던 진혁의 업무가 더 늘어난 것이다.
그는 미미가 진료를 보러 가야 한다고 하며 중국 의사의 진료를 받을 때부터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그때부터 계속 미미의 곁에 머물렀다.
「진혁 씨는 환자 간병하는 법을 아주 잘 아시네요.」
‘다른 건 잘 모르지만’이라는 말은 생략했다. 미미가 부드럽게 칭찬하는데 진혁이 짧게 대답했다.
「아픈 건 미미 씨 잘못이 아닙니다.」
미미가 눈물을 글썽였다.
「아기를 갖지 못하면 어떡하죠.」
「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꼭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미미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황태명은 죽기 전에 미미에게 몇 가지 당부를 했는데 그중에는 반드시 집안의 대를 이으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미미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당연히 아이를 낳아 키울 생각이었다.
진혁이 말했다.
「정 아이를 갖고 싶어도 잘 안 된다면 고아가 많으니 입양을 해도 되고, 방법은 많습니다.」
「진혁 씨는 아이를 원하는 줄 알았어요.」
미미는 황태명이 강력하게 이야기한 이유는 이미 임진혁과 이야기가 다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있어도 좋지만 없어도 좋습니다.」
일월신교의 아이들은 교주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자란다. 그는 수많은 아이들이 자라고 성장하고 충성하며 배신하는 것을 보았다. 배신자 중에서는 서로 피가 이어진 자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광안마 놈은 대체 미미한테 뭘 얘기하고 간 거야?’
임진혁은 미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는 미미가 수술대 위에 오르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일단 피곤하면 잠부터 주무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프면 잡생각이 많이 드니까, 밤에는 푹 자는 게 좋습니다.」
진심 어린 걱정을 듣고서 미미가 창백한 안색으로 웃어 보였다.
「진혁 씨는 간호도 잘 하고, 아픈 사람 마음도 잘 아시는군요. 어머님께서 진혁 씨는 평생 아픈 적이 없고 항상 건강했다고 하셨는데도 말이에요.」
반짝반짝 빛나는 두 눈을 마주 보며 진혁은 직감했다.
‘지금이라면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에게는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아내에게는 말하고 싶다.
「실은 아팠던 적이 있습니다.」
「열 살 때 걸렸던 홍역이요? 사흘 만에 금방 낫고 뛰어다녔다고 하셨던.」
미미가 빙긋 웃었다.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미미의 어깨 위에 양손을 올려놓고 살살 주물러 주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그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미미 씨가 들은 적이 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옛날에 한 청년이 식물인간 상태로 아주 오랫동안 병원에 누워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혼은 옛 중국 어딘가로 흘러 들어가 뜻밖의 모험을 겪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긴 이야기였다.
청년은 낯선 세계에서 홀로 몸부림치며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가며 끝없이 무공을 수련하였다. 현대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도 종교 단체 내에서 지위가 높아졌다.
그리고 진심으로 종교에 귀의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 현대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만인지상의 지위에서 군림하던 청년은 현대에 적응하는 것이 어려웠다.
상하가 아닌 수평적인 인간관계에 서툴렀다.
하지만 이곳에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었다.
그리고 콜라가 무엇인지 알고 좋아하는 여자도 있었다.
「설마 저예요?」
미미가 고개를 들면서 방긋 웃었다.
진혁은 심안으로 미미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먼저 미미의 등을 손가락으로 짚어, 복부의 감각을 잃도록 점혈을 하였다.
말을 계속하면서도 진기를 흘려보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이전에 큰이모의 뇌종양을 제거했던 때와 같은 요령으로 강환을 사용해 물혹을 없앴다.
‘됐다, 성공했어.’
조그마했던 혹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미미는 자신이 일시적으로 복부의 감각을 잃었다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진혁의 이야기에 몰입해 몽롱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진혁의 과거 이야기가 끝나가면서 밤 역시 저물어갔다. 짙은 쪽빛으로 물들어 있던 야경은 사라지고 아스라이 동이 터온다.
그는 이것이 자신의 이야기라고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미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할아버지가 몇 번이고 그녀에게 임진혁은 특별하다고 한 이유를 알았다.
낡아빠진 일지와 드라마, 그리고 진혁이 그 자리에서 케이크로 만든 검을 들고 있었던 이유까지 알 수 있었다.
이것이 환상일 수도 있고, 아니면 누군가의 꿈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할아버지를 믿었다.
그렇기에 진혁 역시 믿을 수 있었다.
눈부신 태양 빛이 창밖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가운데 미미가 말했다.
「진혁 씨.」
「예.」
「고생 많았어요.」
정작 이야기를 한 진혁은 표정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내심 미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긴장해 있었다.
미미의 맑은 눈동자에서 뺨을 타고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많이 외로우셨겠어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진혁은 미미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동시에 등을 살짝 타격해, 복부의 감각을 되찾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진혁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녀는 붉어진 눈을 들어 말했다.
「저희 할아버지는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원래 친하셨어요?」
「그쪽에서 알아본 겁니다.」
「역시 그랬군요,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요. 저희 집에는 할아버지 대부터 모시기 시작한 작은 사당이 있어요. 거기에 해와 달의 신상도 있고요.」
「…!」
현시대에 일월신교를 믿고 있는 이는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황태명이나 미미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비밀 장소가 있는지는 몰랐다.
진혁이 놀라서 미미를 바라보자 미미가 웃었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언젠가 진혁 씨를 그곳으로 데려와야 하는데, 그 시기는 제가 정하면 된다고 말이에요.」
「그렇습니까.」
「저 수술 끝나고 다음 주에 같이 가요.」
「수술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네?」
진혁이 미소지었다.
「의사들이 오진을 한 것 같으니 검사를 다시 해 보죠.」
미미가 눈을 깜빡였다.
「…저 갑자기 너무 졸려요.」
진혁은 미미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조금 더 자요.」
멀리서 아침 회진을 위해 의사들이 이 방으로 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진혁은 문밖으로 나가 의사들을 맞이했다.
“황미미 환자 보호자님, 오늘 검사를 하고 복강경 수술 날짜를 잡겠습니다. 오늘 오후에 바로 수술할 수 있도록 방을 비워 놓았습니다.”
“지금은 자고 있으니 검사는 나중에 하는 게 좋겠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는 보호자를 대하는 것처럼 상 교수가 헛기침을 했다.
“흐흠, 흠. 검사실에 일부러 예약해놓았는데 오늘 검사를 하지 않으면 다음으로 밀리게 됩니다. 수술 일정까지 한꺼번에 잡혀 있기 때문에-”
“상관없습니다. 다음은 언제입니까?”
진혁은 아쉬울 것이 없었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태도를 보며 옆에 있던 다른 의사가 나섰다.
“저희가 최대한 빨리 해드리겠습니다.”
미미는 아주 깊이 잠들었다. 최소한 오후 내내 자게 두고 싶었다. 진혁이 말했다.
“검사는 내일 하고, 수술 일정은 검사 결과를 본 후에 의논하고 싶군요.”
“알겠습니다.”
◈ ◈ ◈
다음날.
진단검사의학과 과장이 직접 검사 결과지를 들고 산부인과 의국으로 찾아왔다.
“자네가 물혹 찍어 달라고 한 VVIP 환자 말인데. 초음파 잘못 한 것 아닌가?”
난소와 자궁을 포함한 정밀 CT 검사 결과지를 보고 상 교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분명히 이쪽에 물혹이 있었는데.”
“다른 환자 것과 바뀐 거 아냐? 이렇게 깔끔하게 하루 만에 없어질 리가 있나.”
“아니, 같은 환자인 건 맞아. 나팔관 형태가 초음파로 봤던 거 하고 똑같으니까.”
VIP 환자에게 멋지게 수술을 해주고 성공해서 인맥을 좀 만들어 보려고 했던 교수는 한숨을 쉬었다.
“뭐, 몸에 칼 대지 않으면 좋은 거지. 복강경 집어넣었는데 물혹이 없는 것보다 이게 훨씬 나아.”
“그래, 그래. 우리 영상의학과가 쓸데도 있지?”
“당연하지, 잘 부탁한다고.”
상 교수는 남편에게 설명하러 올라가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행히 보호자는 오진이니 뭐니 까다롭게 굴지 않았다.
“수술을 할 필요가 없다니 다행이네요.”
“예, 오늘 중으로 퇴원 수속을 밟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