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0화
“푸핫, 아버지가 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진혁은 그만 웃어버렸다. 아버지가 황당해하며 말했다.
“그럼 너한테 문제가 생길 게 뭐가 있냐? 사업은 승승장구하고 있고 커리어에도 문제가 없지, 사랑하는 아내하고 좀 떨어져 지내긴 하지만 사이도 좋아 보이고.”
“하하하하, 그러게요.”
진혁이 눈을 깜빡였다.
“그럼 네가 아니면 미미한테 문제가…?”
“저희 둘 다 문제는 없습니다. 혼전 검진도 받았고요.”
아버지가 눈알을 굴렸다. 무어라 물어보고 싶어 하는 표정에 진혁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물엿 말입니다.”
“그래, 물엿.”
“어떻게 해서 만들게 되셨는지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니, 네가 준 레시피대로 하다가 만들게 된 걸 가지고.”
“이러지 말고 우리가 한번 직접 다시 만들어 보죠.”
“왜, 내가 만들었다는 게 안 믿기냐?”
아버지는 티 내지 않으려고 했으나 조금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였다. 진혁이 손을 내저었다.
“그런 게 아니고요. 같이 하고 싶어서요.”
“그러면 이번에 여기 주방을 빌려서 같이 만들면….”
아버지가 컬러풀하게 출력된 인쇄물을 보여 주었다.
5박 6일 코스로 꽉 짜인 뉴욕 관광 일정이었다.
“한 비서인가? 그 너 비서님이 나랑 네 엄마랑 돌아다니라고 예약해 줬어.”
운전사를 겸하는 프라이빗 가이드가 동행해서 뉴욕만이 아니라 근교까지 돌아다니는 코스였다. 아버지는 신이 나서 일정을 자랑했다.
“킨텔리젠시아라는 곳에서 판다는 커피가 아주 맛있다더라. 빵도 직접 굽는다고 하고. 이 루프탑 바는 네 어머니가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어. 그래서 일정이 빈 데가 없다. 그 물엿 만들려면 아무리 짧아도 다섯, 여섯 시간은 걸리더라고.”
진혁은 몇 초 만에 만들어낼 수 있다.
“다섯 시간이 걸린다고요?”
“응, 집중해서 만들다 보면 잘 되는 순간이 있어. 그것도 맨날 되는 거는 아니고 잘 안되는 날도 있는데.”
“그래요, 한국에 가서 꼭 같이 해 봐요.”
“알겠다. 그런데,”
아버지가 무어라 입을 열려고 하는데 진동 소리가 들렸다.
지잉, 지잉.
스마트폰이 여러 차례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 든 아버지가 메시지를 읽었다.
“느이 엄마가 나 부른다. 언제 올라오냐고 하는데.”
두 사람은 함께 방으로 올라갔다.
어머니와 황미미는 복도 앞에 서서 정답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왜 방에 안 들어가구 여기에 있어?”
“계속 방에 있다가 둘이 온다고 하니까 나온 거지.”
◈ ◈ ◈
월드 페이스트리 컵 챔피언이라면 당연히 인터뷰 요청이 들어온다. 제과제빵 매거진에서 여러 건의 요청이 들어와, 진혁은 이에 대해 미미와 상의했다.
「뉴욕 페이스트리 쉐프 매거진, 잡지 빵과 케이크, 그리고 몇몇 신문들까지 한꺼번에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이건 너무 많은데요.」
미미가 물었다.
「하고 싶어요?」
「원래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아버지 이름을 건 대회를 만들려면 홍보를 위해서 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그녀가 명쾌하게 정리했다.
「여기와 여기, 두 군데서만 하죠.」
「호오.」
「이 기자는 전에도 진혁 쉐프님에 대해서 좋은 기사를 써 주었어요.」
리암 에이든.
뉴욕 신문사의 기자로 제과제빵 영역에서 일하다가 최근에 제과제빵 잡지로 옮겼다.
「파리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쿠키를 아주 좋아하던데.」
「그런 인연이 있었군요? 여하튼 그래서 이 사람을 만나는 게 좋겠어요. 하지만 이 사람 한 명만 만나면 또 뭐라고 말이 나올 수 있으니까 이 사람도 인터뷰를 하면 좋겠어요.」
「예.」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버님 이름을 건 대회 운영은 이쪽에 맡겨 주세요.」
「예?」
「거액의 상금도 걸면 좋겠어요.」
임진혁은 이제 미미의 화법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약간의 돈’ 이란 억 단위의 돈이며 ‘거액의 상금’ 이란 진혁이 예상하는 것보다 더 큰 돈이다.
또한 ‘~면 좋겠어요.’라는 것은 ‘~하겠다.’라는 말이다.
「‘해와 달’에서 주최하는 국내 대회로 하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전 세계에서 참가가 가능한 대회로 시작하면 좋겠어요. 당연히 예선전도 열고요.」
진혁이 이야기할 때부터 벌써 미미는 계획을 전부 짜 둔 것으로 보였다. 그녀가 구체적인 사항을 몇 가지 이야기했는데 진혁이 미리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나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가 흔쾌히 동의했다. 하지만 미미가 할 이야기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저 대회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요? 아버님의 빵 그리고 진혁 씨가 굽는 빵은 다른 사람들도 배워야 해요. 해와 달에서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은 지금 소년교도소 출신자를 중심으로 진행하고 있지요? 이번에 여섯 명이었던가요.」
「맞습니다.」
「소년교도소 출신에게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은 이해해요. 하지만 고교생과 함께 하고 싶다면 일반 고교생 대상의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으면 좋겠어요.」
진혁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미미가 정확히 뭘 말하려고 하는지 이번에는 잘 알 수 없었다.
「학원처럼 말입니까?」
미미가 고개를 저었다.
「한국에 교육법인을 설립해서 조리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지으려고 해요.」
「….」
생각보다 더 스케일이 큰 이야기였다. 진혁이 물었다.
「허가를 받는 것도 어렵고,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왕 비서가 기존에 폐교한 학교 중 하나를 알아봤어요. 소망시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에요. 고교와 대학이 생기면 인재 풀이 훨씬 넓어질 거예요. 기존에 졸업한 학생 중 우수한 사람들은 <해와 달>에 데리고 와도 좋고요.」
방긋방긋 웃는 미미를 보며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제과제빵 대회를 할 생각은 전부터 하고 있었다. 학교 설립은 상상도 해 보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요트와 별장을 받았을 때 부모님이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대회 운영을 도와주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스케일이 커질 줄은 몰랐다.
「듣고 보니 좋은 것 같군요.」
「중국에서도 이미 할아버지께서 학교 법인을 운영하고 계셨어요. 한국과는 법률이 다르지만 그래도 경험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한 비서나 왕 비서 역시 그 학교 출신이라며 미미가 수줍게 웃었다.
「믿을만한 사람은 새싹부터 다른 법이라고 하셨어요.」
「하하하하.」
학교 설립에 관해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미미가 물었다.
「그리고 아버님 가게에서 찍을 다큐멘터리 영상 말인데, 앨리슨이라는 사람 괜찮을까요? 아예 이쪽 제작의 프로에게 맡기면 어때요?」
미미가 물었다.
이 ‘어때요?’는 정말 어떻게 해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진혁이 대답했다.
「음, 그렇게 본격적으로 나가면 아버지께서 부담스러워하실 수 있습니다. 앨리슨 씨를 도와주기 위해서 다큐멘터리에 출연한다고 생각하고 계시니까요. 지금 이 상태가 좋겠습니다.」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그러잖아도 부담스러워 하시니까요. 알겠어요, 그럼 앨리슨 씨에게 추가적인 촬영 교육을 제공하는 방안을 검토해 볼게요.」
미미는 바로 수긍했다. 진혁의 판단에 한결같은 신뢰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임진혁은 고마움을 바로 표현했다.
「다음 주에는 치즈 케이크를 또 구워서 보내겠습니다.」
「….」
황미미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가 부드럽게 웃었다.
「케이크 말고는 없나요?」
진혁이 덧붙였다.
「쿠키와 푸딩도 보내겠습니다.」
미미는 입술 끝을 올린 채 그대로 웃었다. 살짝 경직된 표정으로 그녀가 대답했다.
「고마워요.」
◈ ◈ ◈
일주일 후.
진혁이나 진혁의 부모님보다 더 한국에 일찍 들어온 미미는 학교 설립을 위해 토지를 거래했다.
중국과의 거래를 미끼로 내걸고 저렴하게 구매한 토지에는 곧 건물이 들어설 것이다.
좋은 가격에 괜찮은 물건을 구매했음에도 불구하고 미미의 표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스타일리스트가 물었다.
「미미 씨! 이번 거래는 아주 좋았다면서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소곤거렸다.
「거래는 잘 됐지만, 기분이 좋지 않으신 이유가 뭐겠어요. 우리 능력 있는 임 대표님 때문이시겠지.」
스타일리스트가 말했다.
「대표님이라면 지난번에 국제대회에서 최연소로 멋지게 우승하셔서 아주 기뻐하셨잖아요.」
「그래서 우승 선물로 학교도 지어 주고 싶다고 하셨고.」
미미가 입을 삐죽거렸다.
「우승 선물은 아니야. 할아버지도 항상 후학 양성이 중요하다고 하셨으니까, 할아버지 뜻에 따르는 거지. 깔짝깔짝 다섯 명, 열 명 키워서 쓰려면 너무 오래 걸리잖아. 아무리 적어도 천 명은 데리고 있어야 사업도 키우지. 학교 한다고 하니까 좋아하더라고.」
「오늘도 직접 구우신 치즈 케이크와 쿠키, 그리고 푸딩이 왔던데요. 속상해하지 마세요.」
미미가 한숨을 푹 쉬었다.
「케이크와 쿠키가 너무 좋다고, 고맙다고 하니까 직접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겠대.」
「…미미 씨는 요리 안 하시잖아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말했다.
「미미 씨가 요리하고 싶었으면 벌써 옛날에 알아서 배웠겠지요! 집에 쉐프가 몇 명인데. 초청해서 배우셨겠지.」
「이번에는 임 대표님이 눈치가 없으셨네요.」
스타일리스트의 말에 미미가 투덜거렸다.
「둘이서 같이 보내는 시간이 너무 짧은 것 같아서 그래. 그걸 직접 얼굴 보고 말하고 싶었는데 제대로 말하지를 못했네.」
스타일 팀원들이 조용해졌다.
「그래서 학교를 지으신 거구나.」
놀이공원을 짓고 이제는 학교를 짓는다. 스타일리스트가 킥킥 웃었다.
「황태명 어르신 핑계 대면서 학교까지 짓지 않아도 그냥 같이 있고 싶다고 말씀하시면 되잖아요?」
「솔직하게 얘기해 보시지 그러셨어요?」
미미가 웃었다.
「핑계 대는 거 아니야. 정말로 학교를 짓고 싶었다니깐.」
「하하하.」
스타일리스트가 신문 기사를 내놓았다.
「이거 봐요, 임진혁 쉐프님에 대한 기사에요. 리암 에이든이라는 기자가 썼네요.」
「줘 봐! 읽어 볼래.」
미미가 손을 뻗자 왕 비서가 신문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칼럼을 소리 내 읽었다.
「임진혁. 그를 수식하는 말들은 많다. 젊은 나이에 성공한 사업가, 제과제빵사의 아들. 쿠프 드 몽드 파티쉐리 최연소 우승자. 제과제빵계의 피카소.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왕관은 바로 ‘최연소 월드 페이스트리 챔피언십의 우승자’라는 것이다. 이전 우승자 중 제일 나이가 어렸던 이가 46세라는 점을 감안하면 26세 동양인의 우승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이 젊은 페이스트리 쉐프가 걸어온 인생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휴전 국가인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2년간 성실히 군대에서 의무 복무를 수행하였으며 이후 아버지의 빵집에서 일을 도왔다. 지방 소도시의 작은 빵집은 제빵 천재 아들의 힘으로 성공적인 프랜차이즈 사업체로 거듭났고….」
「에이, 임운정 대표님 사업이랑 임진혁 대표님 사업은 완전히 다른데. 조사를 잘못했네요.」
스타일리스트가 한마디 하자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쉿.」
「…아름다운 아내와 성공한 사업, 두 가지를 모두 가진 임진혁 쉐프는 자신의 삶에서 제일 중요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제일 중요합니다. 신혼 생활 중에 대회 참석을 응원해 준 아내에게 이 우승을 바치고 싶습니다.」
미미가 눈을 떴다가 감았다.
「흑.」
글썽거리는 눈빛을 보며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소리를 질렀다.
「미미 씨, 안돼요! 울면 안 돼요! 그럼 지우고 다시 해야 한다고요.」
「요즘 갑자기 감정적이 되는 일이 잦네.」
이중 유일하게 기혼 여성인 헤어 스타일리스트가 눈을 번득였다.
「미미 씨 마지막으로 건강검진 받으신 게 언제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