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9화
「일단 멀리 중국에서 찾아와준 아내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할 예정입니다.」
멀리 관객 속에 있던 미미가 그 말을 듣고 환히 웃었다.
「하하하하!」
「이렇게 젊은 페이스트리 쉐프라니 무엇이든 할 수 있겠군. 그 젊음이 부럽네.」
제프리 디버가 성급하게 물었다.
「좀 더 먼 미래에 대한 계획은 없나?」
교육자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빵 만들기에만 집중해 장인의 길을 갈 것인가.
반드시 지금 선택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심사위원들은 진혁이 어느 길을 선택한다고 할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진혁은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제자를 키우고 싶어 하는구나.’
하지만 진혁은 더 이상 다른 스승을 모실 생각이 없었다. 그는 웃었다.
「대회를 열 겁니다.」
아직 어느 것도 선택할 필요가 없다.
「대회? 무슨 대회를 말하는 건가?」
예상외의 답변에 놀란 심사위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월드 페이스트리 챔피언십의 우승자라면 어느 대회에 가서도 심사위원을 할 수 있네.」
「대회라니.」
「제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제과제빵사인 임운정 씨의 이름을 딴 대회를 만들 겁니다. 심사 위원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저에게 따로 연락 주십시오.」
수상자가 수상 소감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만들 타 대회에 대해 홍보를 하는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기자들과 관객들이 순간적으로 놀라 침묵했다.
◈ ◈ ◈
대회가 완전히 끝났다.
임 씨 가족들은 호텔 룸에서 늦은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다 함께 자리에 앉으면서 아버지가 진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진혁아. 축하한다.”
“그래, 진혁이 아주 잘했다. 우승하겠다, 우승하겠다 하더니 정말로 우승할 줄은 몰랐어.”
어머니가 거들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네 태몽이 뭔지 내가 이야기한 적이 있던가?”
황미미는 진혁의 옆에 앉아 남편과 시부모님의 대화를 듣던 중이었다. 그녀가 반문했다.
“들은 적은 없는데요. 진혁 씨 태몽이 뭐였어요?”
장은효가 대답했다.
“커다란 해와 달이 하늘에서 떨어져 품에 안겨 들어오는 꿈이었어.”
“큰 사람이 될 꿈이네요.”
“지금은 정말로 다 컸지. 이렇게 크려고 그렇게 속 썩였나 싶다.”
“하하하.”
진혁이 어설픈 웃음을 흘리며 얼버무렸다. 마침 그때 크림색 렌틸콩 수프가 나왔고, 모두 저마다 스푼을 들었다.
수프를 한 수저씩 뜨면서 임운정이 말했다.
“아니, 상을 줘서 고맙다. 아버지 감사하다. 이런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내 이름을 딴 대회라니, 그건 또 뭐냐? 무슨 생각으로 말한 거야?”
걱정 섞인 말에 어머니가 빙긋 웃었다.
“여보, 사실은 좋으면서 그래요.”
“좋기야 좋지. 그런데 너무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아버지는 어색하게 와인 잔을 들고 마셨다. 어머니가 혀를 내둘렀다.
“진짜로 역대에 길이길이 남을 수상 소감이었어. 그 대회 사람들이 눈 동그래진 거 봤니?”
“하하하하.”
전채 요리와 샐러드, 그리고 포모도로 파스타와 화이트 파이였다.
리코타 치즈와 야생 버섯이 올라간 파이는 갈색으로 바삭바삭하게 잘 구워져 있었다. 한입 물면 촉촉한 고기가 물컹하니 육즙과 함께 씹힌다. 파이를 맛보며 아버지가 한마디 했다.
“이것도 맛있는데 우리 아들이 구워준 게 제일 나아. 양념치킨 파이가 좋았지.”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 왔다.
‘세계 대회에서 제일 큰 상을 받았어. 그래도 아버지가 이렇게 한마디 해 주시는 게 더 기쁘구나.’
진혁이 흐뭇한 미소를 띠는 것을 보며 황미미가 웃었다.
“호호호.”
임진혁은 금빛으로 빛나는 트로피를 꺼내 들어 양손으로 잡았다.
“이건….”
그는 한순간 아버지와 어머니 쪽으로 트로피를 건네려고 했다. 하지만 미미가 자연스럽게 손을 내미는 것을 눈치채고 미세하게 몸을 돌려 반응했다.
“…전부 미미 씨 덕분입니다.”
황미미가 꽃처럼 활짝 웃었다.
“호호호.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요. 전부 진혁 씨가 알아서 했어요.”
진혁은 미미의 한국어가 훨씬 늘었다는 사실을 느꼈다. 발음이 훨씬 자연스럽고, 대화에 반응하는 속도도 빠르다. 무엇보다 귀에 꽂고 있던 비밀 자동번역용 이어폰이 없다.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아내를 보았다. 그녀는 평소보다 조금 더 진한 풀 메이크업을 했다. 머리카락도 동글동글하게 말아서 평소와는 모양이 달랐다.
임진혁은 진희의 조언을 떠올렸다.
‘아내가 평소와 옷이나 머리 모양, 화장이 다르다면 구체적으로 말해라.’
그는 예리한 시력으로 미미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분홍색 화장 분가루를 많이 썼군요.”
황미미가 입꼬리를 살짝 추켜올렸다.
“네에?”
어머니가 다급히 도왔다.
“더 생기있고 좋아 보이네. 복숭아색이 아주 잘 어울려. 그렇지?”
“…맞습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바빴을 텐데.’
아버지와 달리 진혁은 미미의 드라마 촬영 스케줄을 전부 알고 있었다. 왕 비서와 한 비서가 서로 공유해 스마트폰의 공유 캘린더에 시차를 감안해 띄워 주기 때문이다.
‘그동안에 너무 바빠서 그런지 화장으로 가렸어도 수척해 보이는데.’
하지만 방금 한 것은 말실수였다. 진혁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곱씹고 있는데 아버지가 말했다.
“며늘아기 한국어를 원래 잘했지만, 더 좋아졌어. 일 때문에 바쁜데 공부하느라 고생했겠네.”
진혁은 아버지의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나는 그걸 아까 눈치챘지만, 말로 안 했네.’
미미가 환하게 웃었다.
“어머니, 아버지와 이야기 나누려고 열심히 했어요.”
어머니가 수줍게 입을 열었다.
『미미 피이란.』
“네?”
황미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니가 머쓱해 하며 말했다.
“네가 예쁘다고 말하고 싶어서 배웠는데, 틀렸니?”
발음과 성조가 틀린 것은 물론이고 아예 단어 자체가 다르다. 진혁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하는데 미미가 생글생글 웃었다.
“맞아요, 맞아요. 예쁘다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누군가를 위해서 무언가를 한다고 해도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혼자서 알아서 하고 최종 결정이 필요할 때만 안건을 가져온다.
옛날에 광안마가 꼭 저런 식으로 일했다.
‘내 앞에서 있을 때와 부하들 앞에서 있을 때, 그리고 시부모님 앞에서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
지금은 최고 경영자라기보다는 그 보좌관처럼 행동하고 있다. 반면에 진혁은 어디서 누구를 대하건 친밀한 사람이 아니면 대하는 태도가 비슷비슷하다.
‘엄마 중국어 발음이 틀렸는데 지적해 주지 않은 점은 아주 어른스러워. 고맙네.’
진혁은 미미에게 감사의 말을 했다.
“미미 씨, 고마워요. 페이스트리 쉐프들을 초청해서 기술을 배우게 도와주었을 뿐만 하니라 대회 참석도 지지해 주었고.”
“그런 건 당연한 거지요.”
진혁은 머릿속을 쥐어짜 냈다. 어머니가 격려하듯이 눈빛을 보냈다.
‘자! 아들! 어서 며느리를 칭찬해!’
“그리고 화장도 예쁘고…, 하지만 피곤할 때는 굳이 화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
미미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식탁 위가 잠시 조용해졌다.
웨이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와 스테이크를 서빙했다. 먹음직스럽게 적갈색으로 익은 스테이크에서 향긋한 불 향이 풍겼다. 미디움 레어로 익은 쇠고기를 칼로 썰며 아버지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진혁아, 물엿 말이다. 뭔가 이야기하자고 했지?”
“예.”
고기의 육즙이 붉게 흰 접시를 물들였다. 서걱서걱 부드럽게 잘린 고기를 한 점 포크에 꽂아 입에 가져가며 아버지가 저절로 미소를 지었다.
“이 고기가 아주 살살 녹는구나.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진혁이 주저했다.
“그건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어머니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비밀이야? 우리에게도 말할 수 없어?”
“예.”
진혁이 딱 잘라 말했다.
“도대체 무슨 레시피길래 그래? 여보. 그럼 나중에 이야기하고 알려 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윙크했다. 아버지가 눈치를 보듯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네 엄마야 그렇다 치고 미미가 서운하지 않겠냐.”
미미가 생글 웃었다.
“사업 관련된 얘기라면 저는 괜찮아요. 나중에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까, 그때 이야기해 주겠지요.”
“그러게, 며느리가 상사였지.”
“상사는 아닌데요. 투자자입니다.”
진혁이 말했다.
본사 그룹 회장인 미미와 그런 미미에게 투자받아 <해와 달>이라는 제과제빵 프랜차이즈 사업을 총괄하는 진혁, 두 사람이다.
미미가 처리하는 일의 양을 보면 배우는 취미 생활이고 경영이 주 일이 분명하다.
“연기도 하고, 기업도 하고. 능력이 대단해.”
어머니가 말했다. 미미가 싱긋 웃었다.
“이번 드라마까지만 하고 당분간 쉬려고요.”
“그래? 너무 바빠져서 그래?”
“제가 원하는 작품은 그냥 <천마>뿐이었던 것 같아요. 현대 배경의 작품을 하는데 연기가 그다지 즐겁지 않았거든요.”
진혁은 괜히 찔끔해서 눈을 깜빡였다. 화기애애하게 가족 식사가 끝나고 아버지가 먼저 말했다.
“여보, 나는 혁이하고 이야기를 좀 하다가 올라갈게. 먼저 올라가 있어.”
“알겠어요.”
미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 씨, 그러면 이따가 봐요.”
어디선가 미미의 비서가 나타나 트로피를 챙겨 주었다. 미미와 장은효, 그리고 비서들은 숙소 층으로 올라갔다.
한편 아버지와 진혁은 함께 라운지로 향했다. 스위트룸 이상 숙박객들만이 방문할 수 있는 VIP 라운지다. 부드러운 가족 소파에 몸을 파묻고서 화려한 뉴욕의 야경을 힐긋힐긋 보며 아버지가 말했다.
“이러다가 이런 거에 익숙해질까 무섭다.”
“예?”
“너랑 며느리가 이렇게 사는 건 괜찮아. 하지만 나랑 네 엄마는 시골에서 살았잖냐. 와서 좋긴 하지만 말이야, 내 돈이 아닌데 아들 돈 쓰는 것 같아서 맘이 좋지는 않아.”
“아버지, 그런 건 걱정하지 마세요.”
“나랑 네 엄마가 흥청망청 쓰다가 아들 집안 기둥뿌리까지 뽑아버리면 어쩌냐.”
“아버지…, 그건 정말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번에 해외진출하면서 매출액이 얼마나 늘었는데요.”
진혁은 잠시 회사 상황에 대해 아버지에게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버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 잘 돼?”
“이번에 이탈리아 호텔도 빚 없이 현금으로 인수했는데요.”
“하하하, 며늘아기가 정말로 능력이 있네.”
진혁은 그보다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내려 했다.
“아버지, 그래서….”
하지만 아버지가 그 말을 가로챘다.
“진혁아,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내가 다 알고 있다.”
“예?”
“너무 어렵게 하지 말고 편하게 얘기해도 돼.”
진혁이 눈썹을 추켜 올렸다.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고 생각하시는데요?”
“물엿 이야기는 핑계잖아.”
“아니, 그게.”
진혁이 눈을 깜빡였다.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물엿 이야기는 단순히 계기일 뿐이다. 자신이 군대가 아니라 어디를 갔는지, 그리고 거기서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하고 싶다.
‘아버지가 이미 알고 있다면 말씀드려도 되지 않을까.’
이해받고자 하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아버지가 걱정스러워 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요즘 20대 젊은 남자들 정자가 우리 때하고는 달리 활동성이 떨어질 수도 있다고 하긴 하더라. 과로하면 특히 그렇대. 아직 젊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며늘아기도 어리고 자기 일 하고 싶어 하는데 임신을 서둘 필요도 없고 말이야.”
“아닙니다!”
“엥? 이게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