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483화 (481/656)

제 483화

생 무화과는 과즙이 풍부하며 보들보들하고 맛있다. 하지만 그러한 무화과의 맛을 케이크에 살리기는 어렵다.

민트 향 역시 잘 어울렸다.

강렬한 무화과의 맛에 살짝 끼얹어진 상큼한 과일 향.

좀처럼 시도하지 않는 배합이나 어색하지 않았다. 제프리 디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무화과 케이크 말인데, 실력이 많이 늘었군.」

그는 칭찬하면서도 이전의 케이크에 대해서 비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전의 케이크는 엉망진창이었지만 이번에는 순서 없이 먹어도 맛있다고 했지?」

「물론입니다.」

주느비에브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후후, 기대되는데」

두 사람의 시선이 오갔다. 주느비에브는 당당했고 제프리 디버는 입꼬리를 올린 채였다.

아서 J. 클라크가 물었다.

「제프, 간만에 케이크가 맛있다고 하는데?」

「그렇지, 이건 정말로 무화과를 먹는 것 같은 케이크야. 신선하지 않나?」

제프리 디버는 방금 전에 맛본 케이크가 마음에 들었다.

「다른 케이크들도 기대가 되는데.」

제프리 디버는 장미 케이크를 포크로 떠냈다. 장미 꽃잎 하나를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촉촉한 살굿빛 속살과 핑크빛으로 레이어드 된 버터크림까지 보기에 완벽했다.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전략이지. 케이크 자체의 디자인보다 맛 자체로 승부하는 것.」

안토니오 바트가 거들었다.

「그렇게 할 수 있지.」

막상 입안에 두 번째 케이크를 먹어보고서 제프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케이크는 여전히 맛있었다.

장미 수로 향을 낸 것으로 보이는 무화과 케이크 역시 촉촉하고 달콤했다. 케이크를 한입 물 때마다 농익은 무화과 과즙이 톡 터져 나오는 것만 같다.

「이건 방금 전에 먹은 것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는데.」

그는 로즈 무화과 케이크를 내려놓고, 다음 층에 있던 오렌지 무화과 층에 손을 댔다.

이쪽은 살굿빛이 아니었다. 오렌지 껍질을 갈아 제스트로 만들어 맛을 냈는지 조금 더 씁쓸한 맛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레이어드한 케이크 자체는 같은 맛에 가까웠다.

‘같은 반죽을 써서 향만 조금씩 다르게 했나? 실망인데.’

오렌지 제스트에는 민트 향이나 로즈 워터와는 다른 맛이 조금 더 강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질리기 마련이다.

「이건 좀 진부한데.」

실망한 것은 제프리만이 아니었다. 아서와 안토니오 같은 온건한 심사위원들 역시 다른 케이크를 먹어보고서는 조금 실망한 기색을 비쳤다.

「케이크 디자인이 단순한 만큼 다양한 테크닉을 보여주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최소한의 장식으로 우아함과 고상함을 보여주려고 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자네를 좋게 평가할 만한 요소가 너무나도 부족하지 않나?」

「케이크가 맛있어야지. 맛있는 것은 좋아. 하지만 자신 있는 맛 하나만으로 평생 영업을 할 수는 없어. 페이스트리 쉐프란 언제나 도전하고 도전해서 새로운 메뉴를 개발해야 하는 몸일세.」

「건축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보여주던 그 놀라운 케이크 빌딩들은 어디로 갔나? 해보지 않았던 것을 해보는 건 좋지만, 자신만의 색채를 잃을 필요는 없어.」

격려에 가까운 평들이 쏟아졌으나 주느비에브는 그 자리에 서 있기가 힘들었다.

이번에는 달라진 모습,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통일성을 주는데 과도하게 집착했어. 너무 단순해서 재미가 없네.」

「셋 다 똑같은 맛이니 어느 순서로 먹어도 똑같을 수밖에. 향만 조금 다르잖아.」

제프리 디버의 폭언을 마지막으로 주느비에브에 대한 심사가 끝났다.

그녀는 비틀거리지도, 울지도 않았다.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로 무대에서 내려갔다.

장은효가 한 비서에게 물었다.

“지금 뭔가 반응이 안 좋은가 봐?”

“안타깝게도 좋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는 듯싶습니다.”

“뭐. 그게 자기 실력인 거지.”

아버지가 냉정하게 말했다.

“저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좌절하지 않고 계속 만들어야 실력이 좋아지는 거야. 나도 처음에 만들 때는 얼마나 어설펐는데 말이야.”

“쉿, 여보. 지금 다음 심사하고 있네요. 이번에는 누구지?”

“당신이 먼저 말 걸었잖아?!”

임운정이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마리오가 장은효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진혁이 어머님. 지금 나오는 사람은 모카 캘러한이라고, 영국의 마술사 출신 페이스트리 쉐프에요. 마술 베이킹 쇼도 하고 이것저것 하는 사람입니다.”

“어쩐지 조리모가 중절모처럼 생겼는데 챙이 없는 특이한 검은색 모자라고 생각했어.”

“저 조리모도, 에이프런도 일부러 마술사 분위기 내려고 특별 주문한 거라고 들었어요.”

“그런데 저 사람이 가져온 케이크는 뭐지?”

“책장…? 처럼 생겼는데.”

“설마 가족의 이야기를 각자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일대기처럼 담았다거나?”

“하하하. 그럴 리가, 그렇게 가족이 많은가?”

아버지는 현실과 전혀 반대인 추측을 했다.

◈          ◈          ◈

「<마법의 책장> 케이크입니다.」

모카 F. 캘러한이 자신의 작품을 간단하게 소개했다. 하지만 그 작품은 전혀 간단하지 않았다.

책장의 뒷면을 보면 평범한 3층 레이어 케이크처럼 보였다. 하지만 앞면에는 책-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색색별로 가지런히 꽂혀 있다.

부드러운 쿠키와 촉촉한 쿠키, 그리고 단단한 쿠키 등. 책 모양으로 구워내고 책등에 다양한 색깔의 식용 재료를 발랐다.

새빨간 딸기잼이 발려진 책등은 금박으로 장식된 에칭과 더불어 우아한 마법서처럼 보였다. 이쑤시개로 식용 금박을 찍어 써 놓은 글자는 ‘Magic(마법)’이었다. 책등에 선명한 자줏빛 라즈베리 잼을 발려진 책에는 일기장이라고 쓰여 있다. 실용서부터 마법서, 그리고 일기장이나 학교 과목용 노트까지 온갖 책들이 빼곡하게 책장에 꽂혀 있었다.

제프리 디버가 말했다.

「우리 주제가 도서관이었나?」

안토니오 바트가 끼어들어 정정했다.

「먼저 이 케이크가 어떻게 주제를 반영하는지, 그리고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소개해 주게나.」

캘러한은 바로 대답했다.

「책장은 야생화 꿀과 시나몬, 크림을 넣어 만든 러시안식 허니 케이크입니다. 책은 각종 쿠키와 잼, 그리고 어울리는 초콜릿과 장식이 들어 있습니다.」

「호오.」

「특이한 시도이긴 한데.」

「용케 쿠키를 저렇게 끼워 넣었네.」

「러시안 허니 케이크는 비교적 단단하니까.」

러시아의 전통 케이크인 허니 케이크에는 꿀과 무염 버터, 달걀과 계피, 고운 소금, 휘핑크림과 샤워크림 등이 들어간다. 즉 극히 단순한 재료로 만들어낸 단단한 케이크다. 켜켜이 얇은 레이어를 촘촘하게 쌓으며 중간에 크림을 바른다.

「저 책들이 가족을 상징하고 있나?」

「상징하고 있는 게 아니라 실제 가족입니다.」

「하?」

「어렸을 적 서재에서 혼자 책을 읽으며 자랐죠. 부모님과 이모, 일가친척 등 이십여 명이 한꺼번에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시고 난 후에 말입니다. 가까운 가족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다 보니.」

「….」

캘러한이 대수롭지 않게 뱉어낸 옛이야기에 심사위원들이 숙연해졌다.

제과제빵 매거진의 기자들은 저마다 수군거렸다.

「모카 캘러한이 어린 시절이나 가족에 대해서 언급한 적은 없었지.」

「인터뷰도 전부 거절했는데.」

다른 제과제빵 잡지의 기자인 제임스가 말했다.

「그래서 저런 성격으로 자랐나?」

리암 에이든이 고개를 저었다.

「모카 캘러한이 일부러 어디서도 언급하지 않은 옛이야기를 꺼낸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야. 심사위원들에게 더 충격을 주기 위해서가 분명해. 놀라움은 감각을 변화하게 하고, 평범해 보이는 것에도 의미를 부여해주지. 고도로 계산한 게 틀림없어.」

제임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렴 대회우승을 위해서 자기 과거까지 팔아버리려고 했을라고?」

「월드 페이스트리 챔피언십이지 않나. 우승하고 나면 제과제빵계의 원로로 대접받으며 산하 대회들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할 기회가 주어지지. 자기 이름으로 학교를 열기도 쉬워지고,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수 있는 기회야. 모카 캘러한이 지금도 유명하긴 하지. 하지만 그것도 영국과 유럽 내에서만 알려져 있고, 컨셉 자체도 마술이랑 관련된 특이한 쇼를 하는 사람이라고밖에 알려져있지 않아.」

「뭐, 그렇긴 하지.」

「모카 캘러한이 이번에 우승한다면 단순히 마술이라는 컨셉에 집착하는 유별난 마술 오타쿠 페이스트리 쉐프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뛰어난 제과제빵 실력에 마술 실력과 쇼 기획력까지 겸비한 유능한 엔터테이너로 말이야.」

「아예 매직 베이킹 쇼라는 장르 자체를 완전히 하나의 트렌드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겠어.」

「그럴 가능성도 있을걸.」

무대 위의 심사위원들은 캘러한의 이야기를 곱씹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쿠키와 허니 케이크라.」

「말랑말랑하고 촉촉한 초콜릿 쿠키인 줄 알았는데, 이건 작게 썰어 놓은 브라우니로군.」

작은 쿠키와 빵 책들은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대략 열 가지의 맛이 번갈아 가면서 나타났는데, 같은 종류의 쿠키라도 겉에 바른 잼이 달라지면 당연히 다른 맛이 났다.

「이 케이크는 방금 전의 프랑스 팀 케이크와 완벽하게 대칭점에 서 있어.」

「하지만 오트밀 쿠키와 허니 케이크는 별로 어울리지 않아.」

「그래서 이 잼으로 균형을 맞춘 거 아닌가? 꽤 노력한 모습이 보이는데.」

심사위원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최종 점수 발표는 어차피 모든 심사가 끝난 후에 나올 것이다.

브라이언이 양손을 모아쥐고서 모카 F. 캘러한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우리 케이크가 저 사람 것보다 훨씬 나은데.」

「그래?」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집어넣으려고 했잖아. 그래서 오히려 번잡스러워졌어. 나라면 책장을 제한하고 몇 권의 책만 꽂아두었을 거야. 정말로 심사위원에게 맛보여주고 싶은 케이크만 남겨 두었겠지.」

「프랑스 팀과 영국 팀의 중간선에 서고 싶다는 거군.」

「그런 셈이지.」

그리고 갑자기 큰 소리가 났다.

제프리 디버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소리를 지른 것이다.

「이 안에 딱딱한 게 느껴지는데, 미스터 캘러한! 이게 뭔가!」

심지어 쉐프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그는 입안에 있던 딱딱한 것을 휴지로 감싸 접시 옆에 놓았다.

제프리 디버가 분노했는데도 모카 F. 캘러한은 전혀 놀란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쉐프.」

「뭐?」

「당신이 왕입니다.」

제프리는 순간적으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옆에서 그 상황을 보고 있던 아서 J. 클라크가 웃었다.

「아하하하하! 킹 케이크로군!」

안토니오 바트가 침착하게 말했다.

「무엇을 넣었나?」

「식용 금박으로 장식한 왕관 모양 사탕입니다.」

킹 케이크(King’s cake)란 국가에 따라 크리스마스나 주현절, 사순절 축제와 관련된 케이크다. 대략 300여 년 정도 전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일컬어진다.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축제를 위해 화려하게 장식한 케이크 속에 특별한 뭔가를 넣는다. 영국에서는 완두콩을 넣었다. 가족들이 함께 케이크를 잘라서 나누어 먹다가 이 완두콩을 발견한 사람이 그날의 왕이 되었다.

최근에는 완두콩 대신에 프러포즈용 금반지부터 식용 설탕 장식까지 다양한 물품들이 숨겨진 킹 케이크가 영국에서 유행하고 있다.

제프리 디버는 방금 전 자신이 내려놓은 휴지를 펼쳐 무엇이 있는지 살폈다.

「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