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0화
진혁과 브라이언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즐겁게 작업하는 동안 덴마크 팀은 아주 조용했다.
주제가 발표되자마자 침묵이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평소라면 한두 마디 이야기를 나누며 작업했을 토마스 닐슨 크리스티얀센은 말없이 손을 움직였다.
보조는 옆에서 닐슨이 건넨 쪽지를 보고 재료를 다듬고 크림을 만들며 생각했다.
‘그 소문이 사실인가? 따로 큰 재산 물려받기로 하고 경영권을 포기했다는 이야기.’
그는 토마스 닐슨과 보조를 맞춰온 지 오래됐지만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 추측밖에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토마스 N. 크리스티얀센을 부러워했다. 학교 친구들은 토마스와 친해지고 싶어 했고 어른들도 친절했다.
덴마크의 작은 도시에서 크리스티얀센 가문은 영주 가문처럼 떠받들어졌다. 토마스 닐슨은 그 친구들이 정말로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환상은 곧 깨졌다.
열 살 때의 일이다.
학예회에서 모두가 토마스에게 왕자 역할을 양보했다. 왕자는 금박 종이로 만든 왕관을 쓸 뿐만 아니라 대사도 많지 않았다. 남자 주역에는 왕자, 그리고 트롤과 나쁜 마법사가 있었다.
왕자가 클라이맥스에 등장해서 대사를 하면 트롤과 악당 마법사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야 했다. 그리고 나면 반에서 제일 예쁜 여자아이인 헬레나와 손도 잡을 수 있었다. 공주 역할을 맡은 헬레나가 쓰러져 있으니 손을 잡아 일으켜야 했기 때문이다.
이 왕자 역할은 대사가 많지 않지만 멋있는 역할이라 모두가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토마스는 그 사실을 몰랐다. 특별히 왕자 역할을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다들 하라고 하기에 그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학예회 연극 발표 날, 그는 화장실 속에서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거지 같은 트롤 역할 때려치우고 집에 가고 싶어, 엄마.」
「얘는! 잘 하면 되지!」
「나도 왕자 하고 싶었단 말이야!」
「토마스는 크리스티얀센이잖니.」
「그래도.」
「토마스하고 친하게 지내야지. 그래야 아빠도 잘 되고, 엄마도 잘 되는 거야. 네가 지금 작은 크리스티얀센이랑 같은 반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럼 오늘 저녁에 햄버거 사 줘.」
「그럼, 그럼.」
아이들과 느끼고 있던 미묘한 거리감.
다들 자신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했다. 동급생들은 축구를 할 때 공을 양보해 주었고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의 반찬을 나누어 주었다. 집에 놀러 오고 싶어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토마스와 싸우지는 않았다. 자신이 무언가 하자고 할 때 거절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장난으로라도 때리려고 하는 이도 없었다.
막연하게 다른 아이들과 진짜로 친하지는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친한 애들은 서로 주먹질을 하며 코피를 터트리기도 하고, 사소한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토마스는 물 위에 둥실둥실 떠 있는 풍선처럼 거리감을 느꼈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토마스와 친해질 수 있도록, 차기 레고 그룹의 후계자와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나이가 들면서 이웃과 친구들은 점점 더 사근사근하고 다정해졌다. 토마스는 그게 진저리치게 싫었다.
‘내가 차라리 크리스티얀센이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단지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같이 놀만한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충분했다. 하지만 대등한 관계를 맺을 만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가족들, 그리고 주변 이웃들과 학교 친구들에게 이 있어서 ‘토마스 닐슨’이 아니었다. ‘크리스티얀센의 후계자’일 뿐이었다.
10대가 되어 그는 할아버지에게 다른 일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모두가 그에게 바보라고 했다.
빵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자신이 너무나 특별한 그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제과제빵 일을 하면서 그는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야단을 맞았다. 사소한 실수를 했다고 혼이 나기도 했다. 가족들은 토마스가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고 수군거렸다.
가족의 사업에 함께 참여해야 하지 않냐며, 책임감 없는 모습을 보여주지 말라고 화를 냈다.
‘어쩌면 나는 빵을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냥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평범하게 새 출발을 하고 싶었던 거지. 빵 만들기는 그냥 그 수단일 뿐이었고.’
토마스 닐슨 크리스티얀센은 할아버지에게 소액 투자를 받아 자신만의 가게를 냈다. 철저한 시장 조사 끝에 연 가게는 디저트를 판매하면서 크게 성장했다.
그는 성공적인 커리어를 밟아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금전적으로 성공해도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삼촌과 사촌들이 일하고 있는 회사의 규모에 당할 수는 없었다. 레고 그룹은 덴마크의 재벌가였고, 그의 가게는 구멍가게에 불과했다.
성공해서 연 1억 크로네에 당하는 매출을 올려도 몇 조 단위의 매출을 올리는 그룹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하아.’
삼촌들은 토마스가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가족 기업에 헌신하며 일생을 바치는 것만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토마스 형,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것만 알아둬.」
사촌 동생인 작은 얀센은 토마스 닐슨이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자신이 그룹을 물려받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갈 거라며, 멍청한 선택을 비판했다.
「가족들을 다 버리고 혼자서 그렇게 조그만 가게에 아무리 매달려도 필요 없다고.」
아버지는 다시 토마스를 믿어보겠다고 했다.
「토미, 네가 네 나름의 방식대로 가족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아. 이번에 레고 케이크를 만들어 보렴. 그럼 다른 가족들도 널 인정해 줄 거야.」
그는 자신의 가족들을 사랑했다. 하지만 동시에 증오하기도 했다.
성공한 사람들. 오만한 사람들.
자신을 이해하려고는 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을 생각하면 심장이 무거워지며 가슴이 답답해진다.
다른 이들은 가족이 따뜻하고 포근한 존재라고 말했다. 하지만 토마스에게 있어서 가족은 장벽 같았다. 하늘을 가릴 만큼 솟아있고 땅속에도 깊이 뻗어있다. 외치고 외쳐도 벽 너머에는 아무런 소리도 닿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가까워야 할 사람들.
하지만 너무나 먼 사람들.
그는 먹먹한 마음을 담아, 사막같이 생긴 도톰한 케이크를 만들었다.
생강과 레몬을 넣은 파운드 케이크.
윗면이 평평하지 않고 사막처럼 독특하게 솟아 있다는 점이 다른 케이크와 차별화되는 점이었다.
보조는 토마스가 지시한 대로 생딸기를 갈아, 꿀을 넣어 끓이고 졸였다.
붉고 뜨거운 딸기가 점차 형체를 잃고 녹아내렸다.
보조가 땀 흘리며 잼을 젓는데 문득 잊은 것을 생각해낸 토마스가 지시했다.
「잼에 레몬즙도 넣어 줘.」
「예, 예.」
졸이는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잼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지 정성이 들어갈 뿐이다.
보조는 레몬을 갈면서 힐긋힐긋 잼을 살폈다. 레몬즙을 가득 넣고 나서 퐁퐁 솟아오르는 하얀 거품을 일일이 걷어냈다.
이 거품을 걷어내지 않는다고 해서 맛이 변하는 건 아니지만 색깔이 얼룩덜룩해진다.
선명한 붉은색이어야 할 딸기잼에 곰팡이처럼 보이는 흰색 입자가 잔뜩 보여서야 안 될 일이다.
‘다른 사람들은 분명히 알록달록하고 예쁜 것들을 잔뜩 만들지 않을까….’
그런데 이렇게 칙칙하고 우울해 보이게, 단순한 맛의 케이크를 만들어도 괜찮을까.
딸기 잼으로 포인트를 주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부족하지 않을까.
솟아오르는 걱정을 외면하며, 보조는 나무 국자를 사용해 쉬지 않고 잼 냄비를 저었다.
새빨갛던 딸기들은 이미 형체를 잃은 지 오래다. 녹은 딸기들은 검붉은 액체가 되어 지옥의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조금 넣은 레몬즙은 붉은색 속에 잠겨 든 지 오래다.
「잠깐만, 세브닉.」
토마스 닐슨이 보조를 힐긋 보며 말했다.
「예?」
「레몬즙을 조금 더 넣는 게 좋겠어. 이대로라면 레몬 향이 전혀 안 나겠는데.」
「알겠습니다.」
보조는 조금 안심했다. 자신이 끓이고 있는 잼까지 파악하고 있을 만한 여유가 있다면 괜찮다.
토마스 닐슨 크리스티얀센은 꽤 멀쩡해 보였다. 평소와 달리 빵을 구우며 가벼운 잡담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 ◈ ◈
진혁과 브라이언은 유쾌하고 즐겁게 케이크를 만들고 있었다.
브라이언이 지적했다.
「수플레 케이크를 4층에 놓을 수는 없잖아, 정말로 그렇게 할 셈이야?」
진혁은 드물게 길게 설명해 주었다.
「아, 이건 4층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맨 밑에 있어. 그리고 위에 있을 케이크 역시 수플레 케이크의 위에 있을 건 아니야.」
진혁은 아까 만들어 완전히 식은 바닐라 커스터드 크림을 냉장고에서 꺼냈다.
직접 쳐서 만든 머랭을 1/3 정도 커스터드 크림에 넣고 나서 섞었다.
「이리 주면 내가 믹서로 섞을게.」
「괜찮아.」
진혁은 자신의 손으로 하는 편이 기계로 하는 편보다 더 수월하다고 여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브라이언은 고개를 저었다.
「손으로 한 게 정말로 기계보다 낫다는 점이 미스터리라니까. 손이 안 보인다, 안 보여.」
「너도 연습하면 할 수 있을걸.」
「아니, 난 기계의 힘을 빌릴게.」
진혁은 완전히 섞은 반죽을 케이크 틀에 부었다. 노랗고 걸쭉한 반죽은 작은 폭포를 만들며 느긋하게 떨어져 내렸다. 진혁은 케이크 틀을 들어 올리고 살짝 흔들어 반죽의 표면이 평평해지도록 했다.
케이크 틀의 모양을 본 브라이언이 크게 놀랐다.
「수플레 케이크를 이렇게 키 크게 굽는다고?!」
「응, 그래야 원하는 높이가 되지.」
수플레 케이크는 공기가 많이 들어가 있어 크게 부풀어 오른다. 그래서 컵케이크나 머핀 모양의 틀에 넣어 굽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홀케이크로 만들어, 9인치나 12인치의 원형 판에 굽는다.
하지만 이렇게 하늘을 향해 고층 빌딩처럼 높게 솟은 수플레 케이크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혁!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들에는 이유가 있다고. 이거는 구워도 틀에서 꺼낼 수도 없고, 꺼낸 순간 그대로 무너져 버릴 거야.」
「괜찮아.」
진혁은 따로 구울 긴 과자를 보여 주었다. 굽고 나면 빼빼로처럼 얇고 길어질 것이다. 브라이언은 나중에 진혁이 이 반죽을 케이크 겉의 장식용으로 쓸 것이라 추측했었다.
「그걸 수플레 안에 욱여넣겠다고?」
「반죽 안에 통통한 빨대를 집어넣어서 공간을 만들 거야.」
브라이언은 아무래도 염려를 떨치지 못했다.
「그게 케이크를 찢고 나올 것 같은데. 그래서 세 개 굽는 거야?」
「음, 뭐 비슷해.」
5층 케이크라고는 하나, 이 케이크는 사실 5개의 케이크를 서로 블록처럼 끼워 맞추는 것에 가까웠다.
아까 스케치를 보았으나 이제야 이해하게 된 브라이언이 놀라서 말했다.
「그럼 이거, 다른 케이크들은 거의 공중에 떠 있는 셈인데?! 어떻게 할 셈이야?」
「다 방법이 있어.」
「기둥을 세울 수도 없고, 다른 케이크와의 사이에도 공간이 비어 있는데. 낚싯줄에 매달 수도 없고.」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가벼우니까 괜찮아.」
「…전혀 답이 안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