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9화
「아예 없는 건 아니지.」
모카 F. 캘러한이 꿈을 꾸는 것처럼 천천히 말했다. 그는 어딘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듯 무대 저 너머 어딘가를 멀찍이 바라보았다.
보조는 문득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있을 리 없는 일이지만 지금이라도 캘러한이 당장 어딘가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캘러한은 도제가 보기에도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는 금전적인 성공이나 대회의 우승보다는 마술 트릭, 대중을 놀라게 하는 방법 등에 더 신경을 썼다. 그러면서도 제과제빵사로 이 정도의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현실적인 사업가라기보다는 예술가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캘러한은 느닷없이 떠오른 착상이 있다며 하던 일을 전부 그만두고 새 마술 트릭을 만들기 위해서 집중하기도 했다. 설령 그 ‘하던 일’이 만 달러 이상을 주는 마술 제과 공연이어도 자신의 아이디어가 더 중요하다며 지체 없이 중단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케팅이나 사업에 대한 감각이 나쁘지 않아, 어느 정도 사회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놀라울 만한 업적이었다.
‘조금 더 사업에 집중하면 훨씬 더 일이 커질 텐데 말이야.’
캘러한은 최근에는 사업적인 규모를 줄여 가고 있었다. 행정적인 일은 귀찮다며 디저트 만드는 일을 중점으로 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마술 제과 공연(Magic Baking Show)도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쪽으로 거의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꼭 만들고 싶은 것이 있다며 그것에만 집중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것도 그 ‘만들고 싶은 것’을 제대로 만들기 위한 방안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보조는 지금 그가 여기서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길 바라지는 않았다. 캘러한이 어서 케이크 디자인을 끝내고 멋진 케이크를 만들어 주기를 바랐다.
오만하고 자기 멋대로지만 실력만은 확고한 스승이다. 제대로 케이크를 만든다면 분명히 우승할 것이다. 이전의 화석 디저트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 그가 시간 부족으로 입상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아까운 일인가.
간절한 마음을 담아 보조가 불렀다.
「어떤 존재였습니까?」
대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보조는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캘러한이 싫어하는 동작이다.
「좋은 페이스트리 쉐프는 손톱을 물어뜯지 않아.」
‘좋아! 돌아왔다.’
한두 마디 타박 듣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다. 보조가 황급히 말했다.
「그보다 가장 가까웠던 존재에 대해서 얘기해 주세요.」
답은 그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서재에 있던 책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을 듣고 보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족 대신… 책이요.」
보조는 잠시 생각했다.
‘주변에 가까운 사람이 없어서 성격이 이렇게 된 건가? 아니면 뭔가 책을 잘못 읽었나.’
조금 무례한 생각인지도 모른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반죽을 시작한 페이스트리 쉐프가 있었다. 아직 스케치를 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을 놓고 서 있는 사람은 오직 모카 F. 캘러한밖에 없었다.
보조는 마음이 더 급해져 말했다.
「그럼 그걸 만드시면 되겠네요.」
「오, 웬일로 네가 쓸모 있는 생각을 다 하는군.」
캘러한은 드디어 펜을 들었다. 그가 스케치북에 도안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하자 보조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
스승은 대하기에 편한 사람은 아니었다. 까다롭고 괴팍하며 자신만만하고 고집이 셌다. 그래도 실력 하나는 좋다.
그러니까 여기서 어이없이 탈락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걸 만들면 되는 거지.」
캘러한은 비로소 확신을 갖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조는 안심하며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 ◈ ◈
주느비에브는 요가 수업에서 배웠던 호흡법을 되새기며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어째서 잘 알고 있던 걸 잊어버렸을까.
시몬은 항상 ‘먹는 순서’를 고려해서 접시 위에 디저트를 배치하도록 조언했다.
성격은 어땠건 간에 시몬이 가르쳐준 것들은 아주 중요했다.
‘다른 순서로 먹으면 눅눅해지니까 꼭 이 순서대로 먹어야 한다고 설명하기만 했어도 됐는데.’
그 생각이 계속 떠올라서 새로 케이크를 만드는 데도 집중할 수 없었다. 아까 레쥬올레를 만든 것이 후회될 지경이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다시 했다.
보조가 물었다.
「주느비에브, 괜찮습니까.」
「아니, 안 괜찮아.」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괜찮을 리가 없지, 지금 저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됐는데.」
보조는 주느비에브를 위로했다.
「그래도 맛있었어요, 쉐프.」
「고마워.」
「이번에는 열대 과일을 섞지 않으실 건가요? 아까 괜찮았는데.」
「그렇게 안주하면 안 돼.」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까 심사위원들이 좋아했다고 해서 그걸 또 만든다는 건 완전히 아웃이야. 그건 한 번 먹었을 때 맛있는 거지, 두 번 먹으면 질려. 무엇보다 진부해 보이면 안 돼. 내가 갖고 있는 스킬을 한계까지 발휘해서 보여줘야 한다고.」
「그렇죠.」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일단 내가 만들어내는 맛의 조화는 마음에 들어 하는 게 틀림없어. 그러니까 이번에는 열대과일이 아닌 다른 향신료를 사용해서 어떤 맛의 조화를 이룰지 보여줄 거야.」
복합적인 맛을 한 층 한 층 쌓아 올려서, 심사위원들이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맛을 만든다. 새로운 목표를 가진 주느비에브는 조금 기운이 났다.
「할머니가 무화과를 좋아하셨거든.」
「레쥬올레를 만든 그 할머니 말씀이시죠?」
「아니, 엄마에게는 어머니가 두 분 계셨거든. 그래서 다른 할머니인데, 이 분은 무화과와 민트를 정말로 좋아했어. 의외로 둘이 꽤 어울린다?」
「그럼 할머니가 세 분이었어요?」
「그렇지.」
그녀는 할머니 세 분을 모티브로 하여, 우아한 3층 케이크를 디자인했다.
1층은 무화과와 바닐라, 2층은 무화과와 민트, 그리고 3층은 무화과와 오렌지를 기본 재료로 잡았다.
「바닐라는 알겠는데 민트와 오렌지를 쓰는 건 조금 생소해요.」
보조는 오렌지의 껍질을 벗겨 설탕에 절였다. 그리고 별도로 모양 좋은 것들만 골라, 나중에 케이크 장식용으로 사용할 신선한 오렌지를 따로 빼놓았다.
「꽤 잘 어울려, 여러 번 만들어 봤어.」
「그래요?」
「응, 그리고.」
주느비에브는 케이크 반죽을 저으며 말했다.
「이건 세 층 어디서부터 파먹어도 순서 상관없이 맛있을 거야. 그 정도 테크닉은 나도 얼마든지 재현할 수 있다고.」
「아.」
「아이스크림이 쉘을 눅눅하게 하는 건 당연한 거지, 아까는 그냥 설명을 잘못 했을 뿐이야.」
보조는 장식용 재료로 쓸 장미 꽃잎을 꽃송이에서 떼어 따로 가지런히 놓았다.
「이 장미는 데코레이션 용인 거지요?」
「응, 오렌지와 장미, 그리고 무화과는 아주 잘 어울리거든. 로즈 워터를 조금만 넣어서 향을 가미하고, 오렌지 곁에 장미 꽃잎으로 장식을 할 거야」
「할머니가 장미를 좋아하셨어요?」
「세 번째 할머니가 장미를 좋아하셨어. 장미 정원에서 신종 품종을 교배해서 대회에 내놓는 게 취미셨지. 새 장미에 내 이름을 붙이기도 하셨어.」
「손녀딸을 무척 아끼셨나 봐요.」
주홍빛 우아한 식용 장미 꽃잎을 흘깃 보며 주느비에브가 말했다.
「그 반대야, 난 그 장미 정원이 싫었단 말이야.」
「그래요?」
「말이 장미 정원이지 일 년 동안 한 계절에만 장미가 피고, 다른 기간 동안에는 그냥 가시 삐죽삐죽한 미로 같은 곳이었어」
「하하하, 장미 가시가 따갑긴 하죠.」
「그래도 셋째 할머니를 생각하면 항상 장미가 떠오르니까.」
「그래요.」
보조는 주느비에브를 격려했다.
「좋은 장미 케이크를 만들어요.」
◈ ◈ ◈
“어머니는 백숙을 요리하실 때 꼭 달걀 요리를 같이 내놓곤 하셨어.”
“그래? 미국에서는 닭고기 요리와 달걀 요리를 같이 하는 경우는 드물어. 그리스풍 아브고레모노 수프라면 모를까.”
“아브고레모노 수프?”
“응. 한국 요리 중에서는 삼계탕이랑 비슷할걸? 닭 한 마리에 레몬과 달걀, 쌀과 소금을 넣어 죽처럼 끓여내는 요리야. 새콤한 죽이라서 환자들의 입맛을 돌리는 데에도 좋지.”
“그건 의외로 꽤 괜찮을지도 모르겠는데. 어머니께서 삼계탕을 좋아하시는데 인삼은 싫다고 빼고 만들려고 하시거든. 레몬을 넣어도 괜찮겠다.”
어머니는 달걀 요리를 퍽 좋아하신다.
하지만 페이스트리와 디저트에서는 비린내 때문에 달걀을 쓸 때는 바닐라를 함께 쓰는 경우가 많다.
‘크렘 앙글레즈(Creme anglaise)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커스터드 크림.’
따로 분리한 노른자가 총총히 쌓였다. 색은 거의 주황빛에 가까우며 톡 튀어 올라온 것이 반구형이라기보다 아래가 납작한 구슬처럼 보였다.
“달걀 진짜 신선하다. 어떻게 이런 것만 골라서 가져왔어?”
보통 보조가 재료를 가져오지만 진혁의 팀에서는 반대였다. 브라이언이 밑준비를 하는 동안 진혁이 재료들을 골라서 가져온다.
그 재료들은 하나같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브라이언은 그 눈이 궁금했다.
“밀가루야 유통 기한 보고 가져온다고 쳐. 채소는 신선도를 보면 알 수 있지. 달걀도 소리 들으면 되고. 그런데 어떻게 실수 한 번이 없어.”
“그냥 보이니까.”
“가르쳐 주기 싫으면 그냥 가르쳐 주기 싫다고 하면 되지.”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달걀과 바닐라를 넣은 수플레 케이크.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것은 뭔지 잘 알고 있다. 이전에 크림슨 치즈 케이크를 만들었을 때 정말로 좋아하셨다. 그러니 그 케이크를 약간 변형해서 만들면 된다.
진희는 크림이 풍부하며 달콤하고 느끼한 케이크보다 좀 더 담백한 것들을 즐겼다. 그러니 수플레와 치즈 케이크, 두 가지와 어울릴만한 담백한 케이크를 생각해야 했다.
‘연한 당근즙에서는 부드러운 밀크쉐이크 같은 맛이 나. 그러니 살짝 달콤한 당근 케이크에 가을 첫물 호두를 넣으면 포슬포슬하게 씹히겠지.’
네 번째 층을 보고서 브라이언이 물었다.
“그런데 가족이 셋 아니었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1남 1녀라고 들었는데.”
“종족이 다른 동생이 있지.”
“외계인?!”
“왜 거기서 외계인이 나와? 고양이야.”
“그럼 고양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려고?”
케이크의 디자인 자체는 아주 단순했다. 집안의 기둥인 아버지가 모든 것을 받치고 있고, 그 위에 어머니가 좋아하는 맛의 케이크가 있다. 그리고 진희, 진호가 있었다.
“…걔 호박과 고구마 케이크는 잘 먹긴 하는데. 설탕이나 다른 재료가 전혀 들어가지 않아서 고양이가 먹기에도 좋지.”
“제발! 반려동물용 식품을 만들려고 하지 말자.”
“당연히 인간 버전으로 만들지. 소금과 설탕이 빠져 버리면 간이 맞지 않는다고.”
“그래도 다른 거로 만들자.”
“그래?”
“고양이를 기념하고 싶으면 맨 위층을 고양이 모양으로 만들던지. 고양이용 사료를 사람 먹을 케이크 위에 뿌릴 수 없는 거랑 똑같은 거야.”
“그래? 난 또. 그 녀석들이 상식이 없는 거였군.”
“그 녀석?”
“전에 개용 음식 레시피를 사람 주겠다고 가져간 녀석이 있어.”
“…설마 그 환자식, 아니다. 아니야. 난 알고 싶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