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8화
「다음 주제는 ‘가족’입니다」
◈ ◈ ◈
“진혁 쉐프님 간식, 반응이 좋았죠?”
재희가 자신이 칭찬받은 것처럼 신나서 말했다. 도을이 거들었다.
“저것 봐, 저기 제프리라는 사람이 처음에는 되게 띠꺼운 표정 하고 있다가 점점 더 표정 풀리는 거. 이거 GIF 짤로 만들어서 뿌려야지.”
정지숙이 웃었다.
“그러면 이쪽에 계신 여러분들은 영어권 커뮤니티 사이트에 홍보 부탁해요.”
“제가 레딧에 올릴게요.”
“그럼 난 쿼오라에 사진 첨부해서 올릴게! 제목도 생각해 놨어. 당신의 세상이 바로 뒤집혀 버릴 정도의 맛, 어때?”
“앗, 누나. 사진 첨부할 거면 이 GIF로 해 줘.”
도을은 순식간에 사진 몇 장을 편집해서 단톡방에 뿌렸다. 팬클럽 회원들은 저마다 자신이 주로 활동하는 커뮤니티 사이트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임진혁 한 명만을 독재자처럼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글을 복사해서 붙여넣지도 않는다. 진심이 담긴 예찬의 글을 정성스럽게 썼다.
그리고 정지숙이 돌아다니면서 조언해 주었다.
“이 글은 참 좋군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너무 진혁 쉐프님 개인을 찬양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일 필요는 없어요. 뛰어난 솜씨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적는 것이 좋겠어요.”
“제 글은 어때요?”
“아, 이건 심사위원들의 경력에 초점을 맞추었네요. 이런 것도 좋겠어요. 이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우리 임진혁 쉐프님의 케이크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플러스 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좋아요! 그럼 트위터에도 올려야지.”
열심히 활동하는 팬클럽 회원들을 보며 김가영이 말했다.
“오늘도 진짜 맛있어 보이더라. 사람들 표정 바뀌는 것 좀 봐. 여기 주방에서 만드는 거였으면 나도 한 입 정도는 달라고 할 수 있었을 텐데.”
백진영이 턱을 괴었다.
“진혁이 쟤는 나이를 거꾸로 먹는지 요즘 들어 체력이 더 좋아진 것 같아. 그래도 지금 즈음이면 딱 커피 한잔 챙겨주면 좋아할 텐데. 아인슈페너를 좋아하니까.”
김가영이 찡긋 윙크를 하면서 말했다.
“나도 아인슈페너 좋아해.”
“알았어, 가영이 네 것도 만들어 줄게.”
백진영은 두말없이 다시 커피를 볶기 시작했다. 향긋한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커피 드실 분 또 계신가요? 오늘은 제가 모두 쏩니다!”
“저도요!”
“저도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뉴욕은 지금 오후 3시경.
하지만 한국은 새벽 4시경이다.
밤하늘은 깜깜하기 그지없다.
“자, 자. 몸 신경 써가면서 합시다.”
“굳어있는 사람들은 스트레칭 좀 해요.”
“커피 못 마시는 분들은 여기 따뜻한 물이 있어요.”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이들은 저마다 거북이처럼 굳어 버린 목을 펴고, 팔을 쭉 뻗었다.
도을은 따뜻한 물을 홀짝홀짝 받아 마셨다. 백진영이 외쳤다.
“아까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문하신 분.”
“그걸 어떻게 만들었어요?”
진영이 피식 웃었다.
“뜨거운 커피에 얼음을 따로 주면 되지.”
도을은 그 간단한 해결 방식에 의아해했다.
“그럼 그냥 뜨거운 커피잖아요?”
“몰라, 그거까지 내가 책임져 줄 순 없지. 알아서 하겠지.”
◈ ◈ ◈
한편 진혁과 다른 페이스트리 쉐프들은 방금 발표된 주제를 듣고서 저마다 바쁘게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관객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족이라… 진혁이가 우리들을 만들까? 어떻게 만들까?”
“그렇게 하면 너무 단순하지 않을까요? 차라리 ‘어머니의 사랑’ 이런 식으로 추상적인 개념화를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럴 수도 있겠네.”
마리오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가족들을 한 명 한 명 전부 만들기에는 시간도 모자랄걸요? 지금 사람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에요.”
“그렇지.”
“결국 ‘맛’으로 가족을 표현해야 한다는 건데.”
앨리슨이 말했다.
「마리오, 저 주제는 너무 잔인하다.」
「웅? 뭐가?」
밥 앤더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가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네.」
「그렇죠? 임진혁 쉐프야 행운이지. 여기 계신 것만 봐도, 부모님이 얼마나 아들을 아끼시는지 알 수 있잖아. 하지만 가족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이가 좋기만 한 건 아니야. 저기 무대에 있는 페이스트리 쉐프들 중에서도, 불행한 가족사를 가진 사람이 없지는 않을걸.」
앨리슨이 무대 한구석에 서 있는 페이스트리 쉐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당장 저기에 있는 덴마크 팀만 해도 그래. 소문이 좀 있었어.」
「무슨 소문?」
「내가 굳이 입 밖으로 내서 얘기할 건 아닌 거 같아.」
마리오가 구시렁거렸다.
「그러면 아예 처음부터 얘기하지 말라고, 말해줄 것도 아니면서 궁금하게 만들기는.」
「레고 그룹은 거대한 사업이잖아, 서로 경쟁하지 않을 수가 없지.」
「저 사람이랑 레고 그룹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데?」
「….」
앨리슨은 마리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 왜?」
「넌 그냥 이대로만 자라 줘. 세상의 더러운 소문 같은 건 모른 채 이대로.」
「우리 동갑이야! 갑자기 왜 어린애 취급을 하고 그래!」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루이스가 킥킥 웃었다. 밥 앤더슨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뭐, 나도 그쪽 집안일은 잘 모르지만 말이야. 여기 아가씨가 말하는 것 말이지. 그게 오히려 더 강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드나.」
「불행한 가족사가 강점이 될 수 있다고요?」
「그래. 희극보다는 비극이 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게 마련이지. 누군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열어젖힌다는 건, 그만큼 더 충격적이고 파문이 깊은 일이야. 물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상처를 스스로 감싸고, 회복하고 나서 알릴 수 있을 만큼 성숙한 사람이어야 할 테지만 말일세.」
「아.」
「미술 쪽도 마찬가지야. 개인적인 불행을 떠안고 있었던 화가 중 역사에 남을만한 깊은 명작을 그린 이들도 있지. 인상파의 화가도 있고.」
「빈센트 반 고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꼭 그 한 명을 말한다기보다 그런 사람도 있고 이런 사람도 있다는 거지.」
밥 앤더슨은 무대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임진혁은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뭔가를 그려내고 있었다.
「행복한 가정에서 컸지만 멋진 명작을 그려내는 사람도 있고, 불행한 환경을 비료 삼아 자라나서 깊은 뿌리를 맺고 독특한 화풍을 완성하는 사람도 있지. 인간은 환경에 영향을 받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게야.」
「그렇긴 합니다.」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녀석도 저하고 분명히 같은 부모님 아래에서 자랐는데 어찌나 다른지 원.」
「형 지금 나 욕하는 거야?」
「하하하하하하. 다른 건 다른 거지 그게 어떻게 욕하는 게 될 수 있겠어.」
「표정이 아니잖아!」
루이스와 마리오가 티격태격하는 동안 장은효는 양손을 모으고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진혁아. 가족들을 배려할 필요는 없어. 우리들을 예쁘거나 아름답게 만들려고 고민하지 않아도 돼. 그냥 솔직하게, 네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렴. 우리는 그냥 지켜보기만 하는 거로도 충분하단다.”
“무대에 들리지도 않을 거야, 여보.”
“그래도 기원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 ◈ ◈
‘다 들립니다, 아버지.’
임진혁은 무엇을 만들지 이미 결정해 두었다. 그는 이전에 한식을 한껏 차려 내놓은 연회상을 만들려고 한 적이 있었다. 다른 페이스트리 쉐프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 그러한 연회상이었을까?
‘나는 한정식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한국의 음식 문화도 잘 모르고. 그냥 어머니가 만든 음식을 계속 먹어왔을 뿐이지.’
그는 스케치를 하다가 잠깐 멈칫했다. 진혁은 브라이언을 돌아보았다.
“…내가 어머니의 맛을 재현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응.”
“그게 맛이 없으면 어떡하지.”
“….”
브라이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뭐, 어떤 요리를 재현하려고 했는데?”
“된장국.”
「덴장꾸?」
「일본에서는 미소 수프라고 하는 그거 말이야.」
「그걸 디저트로 만들겠다고? 미쳤어?」
「역시 별론가.」
열심히 상차림을 구상하고 있던 진혁은 조금 풀이 죽었다.
「그래도 그게 어머니가 만들어내는 특징적인 맛인데.」
브라이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족이 주제긴 하지만 정말로 가족들의 현실을 보여줄 필요는 없어, 진혁.」
「현실?」
진혁이 되물었다.
「사랑하는 내 아내가 썼던 칼럼이 있는데 말이야.」
브라이언이 피식피식 웃으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양말을 뒤집어서 세탁기에 집어넣는 게 그렇게 싫대.」
「그럼 똑바로 넣으면 되잖나?」
「나도 알고는 있는데 피곤할 때는 그게 바로 바로 고쳐지지 않으니까 그렇지. 여하튼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고.」
브라이언은 조곤조곤 설명했다.
「아내가 왜 날 사랑하는지 로맨틱한 말을 할 때 그런 디테일을 넣을 필요는 없다는 거지. 특히 디저트에 미소 수프는 안 돼! 절대로 금지!」
Never! Ever! (절대로! 안돼!)를 몇 번이나 외치는 모습을 보고 진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알겠어.」
「잠깐, 너 정말로 이해한 거지? 지금 와서 갑자기 미소 수프가 아닌 청국장을 만들겠다던가 이런 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
브라이언이 말하는 청국장의 발음이 조금 어눌했지만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진혁이 반문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덕분에 방향을 정했다.」
「다행이다. 뭔데?」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디저트를 만들어야겠어.」
「네가 만든 거야?」
「그런 셈이지.」
진혁이 씩 웃었다.
「어머니, 아버지, 진희 그리고 진호가 좋아하는 디저트까지 전부 만들 거야.」
언뜻 보면 이전에 보았던 탑 케이크와도 유사한 형태였다. 브라이언이 스케치를 보고서 휘파람을 불었다.
「오, 5층 케이크인가?」
「그렇지.」
진혁은 집중해서 선을 그었다. 하나의 선은 뻗어 나가 덩굴처럼 케이크를 휘감고 위쪽으로 올라갔다. 겉에 씌우는 초콜릿 링이다.
「맛이 기대되는걸.」
「하하.」
여유 있게 케이크를 디자인하는 진혁과 달리, 고민에 빠져 있는 이도 있었다.
모카 F. 캘러한은 진지하게 말했다.
「가족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라는 거지.」
「예?」
보조가 눈을 굴렸다.
「지금 당장 없는 걸 만들어낼 수도 없고, 이거 참. 곤란한걸.」
「아하하.」
알고 싶지 않은 상사의 사생활을 알게 된 보조가 어설피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키워 주신 분이 있지 않습니까?」
「부모님의 신탁 재산을 맡아서 관리하던 변호사?」
「그분을 얼마나 자주 만났는데요?」
「일 년에 두 번 정도.」
「그건 가족이라고 할 수가 없겠는데요. 그럼 집에서 누가 밥을 챙겨 준다거나,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까.」
보조는 열심히 캘러한을 도우려 했다.
「인도에서 온 가정부가 식사를 차려 주긴 했는데 말이 안 통해서 말이지. 아, 그래도 인도식 커리는 맛있었어.」
「함께 밥을 먹는 사람이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정부와 함께 밥을 먹지는 않았지.」
보조는 정말로 캘러한의 어린 시절이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주변의 다른 페이스트리 쉐프들이 슬슬 재료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평상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행동하던 이가 진지하게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상황이다. 그는 돕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상시에 이 주제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건가?’
그렇다면 정의하는 데까지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
「그럼 주변에 가족이라고 생각할 만큼 가까웠던 존재가 정말로 단 하나도 없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