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477화 (475/656)

제 477화

‘건방지군.’

제프리 디버는 기분이 상했다.

「어떻게 먹어도 맛있다라, 그럴 수가 있을까?」

조금 전에 맛보았던 주느비에브의 디저트를 떠올리게 하는 발언이었다.

특정한 순서로 먹으면 맛있지만, 조금만 뒤집어도 놀라울 정도로 맛이 변한다.

식탁 위에서 쉐프의 의도대로 따라가 주어야 하는 것이 맞다.

‘내가 맛있게 먹어주겠다는데 그 어느 것도 전부 맛있다고 자신만만하게 장담하다니.’

이런 식으로 오만한 젊은 쉐프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다.

제프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서, 안토니.」

친구라고 하기까지는 어렵더라도, 오랫동안 함께 심사를 해온 사이다. 안토니오가 빙긋 웃었다.

「나는 가장 오른쪽에 있는 물고기부터 먹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나는 왼쪽부터.」

「난 가운데.」

다른 심사위원들도 호응했다.

「가운데부터 먹는다고 해도 두 가지 방법이 있잖아?」

다른 심사위원들도 저마다 말을 꺼냈다.

「가운데, 오른쪽, 왼쪽 말이지?」

「가운데, 왼쪽, 오른쪽 순서로 먹어도 되고.」

「어떤 코스요리라도 어떤 식으로 먹어야 할지는 정해져 있지. 맛이 연하고 식감이 부드러운 음식을 먼저 내놓잖나.」

「일본식 초밥도 그렇지? 양념 된 장어 초밥은 제일 마지막이잖나. 제일 먼저 먹어야 하는 게 광어였나?」

「왜 생선이나 초밥 따위를 먹으려고 해? 훌륭한 페이스트리 쉐프라면 당연히 빵과 케이크를 먹어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세상 모든 진미를 맛봐야 좋은 디저트를 개발할 수 있지. 자기가 생선을 못 먹는 걸 왜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여서 못 먹게 하려고 해? 제철 생선회가 얼마나 맛있는데.」

「난 날 것은 비려서 못 먹겠던데, 비위도 좋아.」

안토니오 바트가 다른 심사위원들에게도 제안했다.

「자, 자. 그럼 이 순서대로 먹을까?」

그는 과거 진혁의 케이크를 맛보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싱긋 웃었다.

「사실 서로 자기가 먹은 게 맛있다고 하면 어쩐다. 각자 취향 차이라는 게 있으니 말일세. 모든 사람에게 네 종류의 디저트를 제공하는 게 평가하기에는 편했을 텐데 말일세.」

진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 디저트는 이 상태로 이미 완성된 겁니다.」

「그래, 그래. 넉넉하게 더 만들지는 않았나?」

「아직 드시지도 않았는데요.」

「하하하!」

안토니오 바트는 왼쪽에 있는 물고기를 먼저 집어 들었다. 검지보다 조금 작은 정도다. 포크에 찍힌 물고기의 겉껍질이 부스러지면서 파스스 바닥에 흩어졌다.

‘슈가 크래프트 장식이 아닌데? 이건 초콜릿이잖아.’

부착된 채로 조명을 받으며 빛나고 있을 때는 설탕 장식인 줄로만 알았다. 지나치게 달콤하기 쉬운 슈가 페이스트가 아니라면 꽤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는 물고기를 절반으로 뚝 잘라냈다.

머리 부분과 꼬리 부분이 동강 나 접시 위에 굴렀다.

이미 굳어버린 피처럼 진보랏빛 액체가 꿀렁하니 비추어 보였다. 하지만 맑은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퍼지지는 않았다. 케첩보다도 더 진한 밀도로 아주 조금 꿀렁일 뿐,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단단한 포도색 필링을 보고 안토니오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하아?」

한 겹이 아니었다. 연보라색에 흰색 그리고 보랏빛, 자줏빛에 진한 포도색까지 웨하스처럼 다섯 겹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웨하스처럼 바삭바삭해 보이지는 않았다.

‘한 층은 과자, 한 층은 크림인가?’

가운데에 있는 흰색 층은 제대로 구워낸 과자 같았다. 아무리 봐도 어떻게 만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과자와 크림을 이런 식으로 엇갈려서 구울 수가 있나? 설마 구워서 깎아냈을 리도 없고.’

그렇다면 처음부터 크림이 들어갈 만한 부분을 잘라내고 구워냈나? 그렇게 할 수가 있나?

아까 임진혁이 이미 구워낸 과자를 깎아낸 모양을 보지 못했던 안토니오는 호기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민해봤자 소용없지.’

그는 일단 맛을 보기로 했다.

그는 한 입, 물고기의 꼬리 부분을 물었다.

「오.」

젤리처럼 과자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자주색 필링이 비어져 나왔다. 이 필링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맛이었다.

겉은 말랑하고 쫄깃하며 안쪽은 과일을 갈아 설탕에 절인 것처럼 눅진하고 달다.

「젤리 풍선 안에 포도 잼을 넣은 것 같은데.」

필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완성도다. 이 필링만 따로 내놓고 팔아도 좋을 정도다.

‘이건 앤젤라한테 맛보여 주고 싶은데.’

젤리를 좋아하는 아내를 떠올리며 안토니오는 저절로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놀라운 부분은 젤리 필링만이 아니었다. 과자가 바삭바삭했다.

「이 과자, 씹히는 맛이 아주 좋은걸.」

「그렇지?」

다른 심사위원이 동의했다.

「신이시여! 바삭바삭한 과자에 잼이라니, 이건 실패할 수가 없는 조합이지 않나.」

「그리고 생각을 한 번 더 했지. 잼에 젖어서 눅눅해지지 않도록 겉에 무슨 껍질 같은 걸 씌운 것 같은데.」

「보통 비닐을 씌우잖나.」

「이건 먹을 수 있는 비닐 같은데.」

안토니오를 비롯해 왼쪽의 물고기를 가장 먼저 먹기 시작한 심사위원들이 흥분해 대화를 나누었다.

반면에 가운데 물고기를 먼저 맛본 이들은 다른 의견을 냈다.

「이건 사실 과자라고 하기가 어렵지 않나, 카스테라처럼 푹신푹신한 과자 안쪽에 과일 필링이 들어 있어.」

「이거 내가 알던 포도가 맞나? 포도주에 절인 건가?」

「와인 같지는 않아.」

안토니오는 다른 이들과 한참 동안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두 입째 먹고 나서는

「오오.」

세 입째를 먹고 나서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오오오….」

이것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까.

세상에 포도가 있다.

포도를 제일 맛있게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밭에서 갓 딴, 신선한 포도를 먹으면 되지 않을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먹으면 금방 질린다.

아무리 신선한 포도라고 해도, 한 송이를 혼자 먹으면 지루해진다. 같은 맛이 반복되면서 달콤한 맛보다 떫은 뒷맛이 강하게 인상에 남기 마련이다. 이것은 인간의 선천적인 감각적 특성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냄새가 독한 화장실에 들어가면 놀라서 숨을 멈추려고 한다. 하지만 조금만 지나도 금방 그 향에 익숙해져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게 된다.

그런 것처럼 같은 맛을 계속해서 느끼면 지겨워 더 이상 맛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된다.

하지만 임진혁은 같은 맛을 변주했다.

포도는 부드러우며 말랑말랑했고 꼬들꼬들하면서 바삭바삭했다.

어떤 포도는 새콤하였고 다른 포도는 여름처럼 시었다. 살짝 쌉쌀한 맛이 나는 포도가 있었으며 농익어 초콜릿처럼 다디단 포도가 있었다.

부드러우며 새콤하고, 꼬들하면서 시다. 쌉쌀하면서 바삭하고, 말랑말랑하면서 달콤하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이 전부 포도의 맛이다. 그렇기에 그 어느 것을 먼저 먹어도 맛이 이상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다음 맛을 더 고대하게 만들었다.

음악 듣기를 즐겨 아마추어 클래식 음악 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아서 J. 클라크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같은 박자의 음악을 계속 들으면 지겹지. 그래서 음악가들은 똑같은 음조에 다양한 리듬을 통해 강약을 주어 변화를 주잖나? 같은 박자의 마디라도 흐름 결이 달라지면 완전히 다른 노래처럼 들리지.」

다른 심사위원들이 동의했다.

「그래, 이건 내가 알던 포도의 맛이 아니야.」

개중에 미각이 극도로 예민한 페이스트리 쉐프가 있었다. 그가 말했다.

「미미하지만 치즈가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해.」

「그래, 하지만 치즈는 메인이 아니야. 어디까지나 포도의 맛을 더 깊게 하기 위해서 배경으로 등장했지.」

「임진혁 쉐프는 치즈를 좋아해서 자주 쓰는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도 활용할 줄 알았다니 놀라워.」

안토니오 바트가 중얼거렸다. 그는 세 개의 물고기를 다 먹었다.

과연, 어느 것을 먹어도 맛있다고 할 만했다.

재료의 질감과 맛의 농도가 미묘하게 다르지만, 어떤 것을 먹어도 어떤 순서대로 먹어도 맛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느끼는 정도가 다를 뿐이다.

안토니오는 시니컬한 동료 심사위원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해 고개를 돌려 보았다.

「…제프리?」

제프리 디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앞에 놓인 하얀 접시는 깨끗하게 비었다. 포크에도 아무것도 묻어있지 않았다.

「제프리?」

「말 걸지 마.」

비교적 친한 아서가 물었다.

「제프.」

제프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안구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입술은 터져 있고, 목에도 핏줄이 서 있다.

아서 J. 클라크가 놀라서 물었다.

「뭐야, 제프! 자해라도 하고 있었어?」

「무슨 소리야.」

제프리 디버는 심호흡을 하고서 어깨를 폈다.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같은 재료를 썼으니까 뭘 먹어도 맛있게 한 거잖아, 이건 트릭이나 마찬가지지.」

「뭐라는 거야.」

「삶은 달걀과 구운 달걀, 그리고 에그 스크램블을 내놓고 나서 어떤 순서대로 먹어도 맛있다고 자신만만해 하는 거랑 똑같다고. 이건 인정할 수 없어.」

안토니오가 지적했다.

「에그 스크램블은 버터에 구운 거잖나. 당연히 그걸 제일 마지막에 먹고, 삶은 달걀을 처음에 먹어야 맛있지.」

제프리 디버는 안토니오를 완전히 무시하고 진혁에게 바로 말을 걸었다.

「포도 젤리에 말랑말랑한 껍질 옷을 씌운 건 어떻게 한 건가?」

진혁이 곧장 대답했다.

「젤라틴을 비닐처럼 얇게 펴서 동그랗게 만들어 풍선처럼 매듭을 짓고, 안쪽에 필링을 주입하면-.」

흥분한 제프리 디버는 쏜살같이 질문을 쏟아냈다. 진혁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계속 질문을 던지는 형국이었다.

「그러면 터지잖아?」

「잘 하면 안 터집니다.」

「풍선은 고무라서 질기지만 젤라틴은 얇게 편 젤라틴에 불과하니 찢어져 버릴 텐데.」

「잘 하면 안 찢어집니다.」

「….」

제프리 디버는 불신에 가득 찬 눈으로 임진혁을 바라보았다.

「허, 초능력자도 아니고.」

「아닙니다.」

「방금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고.」

「아.」

안토니오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겉으로 보기에도 훌륭하고, 맛 역시 그에 뒤지지 않는 완성도였습니다. 제프리 디버 쉐프가 칭찬할 정도로 말입니다. 특히 포도 필링을 얇은 젤리에 감싼 테크닉이 대단했는데. 혹시 이 기술도 앞으로 공개할 생각이 있습니까?」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제프리가 옆에서 눈을 부라렸다.

「물론 맛있긴 하지만 내가 칭찬할 정도는 아니지.」

「초능력자라고 부를 정도라면, 자네 입에서 나오는 말 치고는 최고의 칭찬이지.」

심사위원들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하늘 아래 새로운 기술은 없다고 했는데 말이야. 이건 정말로 신기술이라고 할만하지 않나?」

「그렇지. 이 기술은 정말이지 배우고 싶은데.」

「젊은 페이스트리 쉐프라서 이런 생각을 해낸 걸지도 모르겠네.」

「내가 저 나이 때만 되었어도 말이야, 하루에 세 개씩 엄청난 생각을 해냈다고. 하지만 그걸 실제로 접시 위에 구현하지는 못했어.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빵 만드는 실력이 부족해서 그랬지. 그런데 저 쉐프는 둘 다 갖추고 있구만.」

안토니오 바트가 한 손을 들었다.

「자, 이로써 임진혁 쉐프의 심사를 마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케이크 주제를 발표하겠습니다.」

그는 하얀 봉투를 꺼내 들어 열었다. 그리고 안쪽에 쓰여 있는 내용을 소리 높여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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