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3화
「달걀이랑 밀가루 없이 뭘 만들려고!」
「하려면 할 수는 있으니까.」
「아니야, 아니야. 그렇게 고민할 시간에 원래 만들려고 했던 걸 빨리 만들어.」
「그럼 레몬 껍질 갈아서 레몬 제스트 좀 만들어 줘.」
「오케이!」
브라이언은 진혁이 미리 골라 놓은 레몬을 다듬었다. 진혁은 휘파람을 불면서 손을 움직였다.
브라이언은 진혁을 힐끔힐끔 보면서 스크린에 떠오르는 다른 페이스트리 쉐프들의 모습을 보았다.
「임진혁 너 진짜 빠르긴 빠르다.」
초콜릿을 데우고 녹이는 동안 당연히 그 옆에서 서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진혁은 보지 않고도 냄비의 온도를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냄비를 불에 올려놓고 잠시 자리를 떠서 과일을 손질하고, 초콜릿이 타기 전 딱 적당한 온도가 되었을 때 딱 좋은 타이밍에 나타나 불을 끈다.
브라이언이 한마디 했다.
「넌 참 위험한 남자다.」
진혁이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알았어?」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보는데 브라이언이 킥킥거리며 웃어버렸다.
「그렇게 불 켜놓고 돌아다니면 위험해. 네가 아무리 불을 잘 안다고 해도 사고 나면 한순간으로 끝이야.」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는 염려 섞인 조언을 대충 흘려 넘겼다. 그러다가 관객석에서 보고 있는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아버지는 입술을 벙긋거리고 있었다.
“불 끄고 다녀라!”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진혁은 그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어머니 역시 휘둥그레 눈을 크게 뜨고서 가스레인지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떡해, 어떡해. 얘가 또 불을 켜고 자리를 떴네. 이러다가 불이라도 나면 어쩌면 좋아.”
아들이 불을 낼까 봐 걱정하시는 것이다. 한 비서는 곁에서 부모님에게 말을 건넸다.
“이사님은 괜찮으실 겁니다. 전에도 항상 저렇게 하셨거든요.”
“그럴 리가! 내가 불은 조심하라고 얼마나 교육을 시켰는데.”
“맞아요, 하다못해 라면 물을 들일 때도 지켜봐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부모님이 와 있다는 것은 의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분이 평온하고 즐거운 상태라는 것만 파악하고 있었지, 무슨 말을 하는지까지 신경 쓰지는 않았다.
「얘기해줘서 고마워. 불은 항상 조심해야지.」
진혁은 브라이언에게 고마워했다. 예상 밖의 반응에 놀란 브라이언이 눈을 깜빡거렸다.
「아니, 아니.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 내가 뭐라고 할 건 아닌데. 걱정되니까 그렇지.」
◈ ◈ ◈
「세상에, 주느비에브!」
프랑스 팀.
레쥬올레, 즉 크림 캐러멜은 완성된 지 오래다.
보통 레쥬올레는 투명한 유리컵에 넣어 스푼으로 떠먹게 한다.
하지만 주느비에브는 따로 페이스트리 슈를 구워내어 그 안에 크림 캐러멜을 층층이 짜 넣었다.
「이것만 먹으면 너무 달고 부드럽잖아. 그러니까 바삭바삭한 느낌을 주고 싶거든.」
「시리얼과 말린 베리류 썰어둔 거로 하드쉘 타코를 만들 줄은 몰랐어.」
「슈가 차분하고 노르스름한 컬러니까, 타코 부분은 요란하고 예뻤으면 했거든.」
그녀는 접시 위에 올라오는 모든 것은 먹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멕시코식 요리를 디저트로 만들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보통 초콜릿 크림이나 생크림을 많이 찍어 먹잖아. 그런데 이미 크림 캐러멜 슈가 달콤하고 부드러우니까, 새로운 계열의 맛이 필요하지. 그리고 여름! 단단한 껍질과 상큼한 소스가 동시에 필요했는데, 그러니까 멕시코 요리가 생각났어.」
「그래서 후르츠 살사와 타코가 된 거야??」
「응.」
상큼하면서도 매콤한 후르츠 살사 소스.
보통 토마토 살사 소스는 토마토와 양파, 파프리카와 고수, 라임즙과 청양고추를 사용해서 만든다. 그렇게 만든 토마토 살사 소스는 나초 칩이나 무난한 식사 빵과 아주 잘 어울리는 음식이다.
하지만 그녀는 즉석에서 살사 소스를 업그레이드할 생각을 했다.
열대과일과 꿀, 그리고 인도식 소스인 차트 마살라, 녹색 칠리 고추.
그녀가 잘라 썰어놓는 열대 과일은 저마다 선명한 색깔을 자랑했다.
거칠지 않고 깔끔한 맛을 내도록 깊은 속만 파내어 각지게 손질한 파인애플. 얼리지 않은 신선한 망고뿐만이 아니다. 단순하게 매콤한 맛을 내는 것으로 끝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주느비에브는 다양한 과일들을 골라 왔다. 그중에서는 보조가 처음 보는 과일들도 있었다.
「이건 뭐에요? 바나나가 좀 작네.」
「이건 크루아이 카이 바나나. 태국산인데, 손가락 모양이라서 그런 이름이 됐대.」
「일부러 이렇게 요상하게 생긴 과일을 골라 온 거예요?」
「아니, 이게 더 달아. 쉽게 물러진다는 단점이 있으니까 으깨서 쓸 거야.」
크루아이 카이 바나나, 드래곤후루츠와 산톨, 땡모 달.
전체적으로 노란색 계열의 달콤한 과일들이었다.
「땡모 달?」
「이건 노란색 수박인데, 이것도 붉은색보다 좀 더 달거든. 아삭아삭한 식감이 나니까, 토마토 대신 상큼한 맛을 줄 수 있어.」
「주느비에브, 이 후르츠 살사 소스는 진짜 맛있을 거 같네요.」
「당연하지, 누가 만든 건데.」
「하드쉘 시리얼 껍질하고 진짜 잘 어울리겠다.」
「당과류라고 하면 보통 초콜릿 바, 초콜릿 씌운 캔디, 누가 바 같은 걸 떠올리잖아. 그건 너무 재미없다고. 공장에서도 똑같이 해내서 팔잖아」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부드러움과 바삭함. 말랑말랑하고 따뜻하며 달콤한 것, 그리고 새콤하고 시고 단단한 것. 밤과 낮처럼 대조되는 게 참 좋아.」
「뜻도 너무 좋고요!」
◈ ◈ ◈
영국 팀 역시 분주하게 마무리를 하는 중이었다. 결과물을 보고서 보조가 턱을 매만졌다.
「이거, 괜찮을까요.」
「딱 내 의도대로 잘 됐어.」
케이크는 스모그가 낀 도시처럼 부옇게 회색으로 마무리된 케이크.
검은색 바삭바삭한 다크 초코 쿠키지 위에, 망고 케이크가 올라가 있다.
하지만 흐릿한 회색을 보면 누구라도 이것이 망고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캘러한 쉐프, 보이는 것과 느껴지는 맛은 전혀 달라야 한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이건 딱 보기에 먹을 것처럼 보이지 않았는데요. 폼페이의 폐허에 남아있는 빵 화석 같습니다.」
「하지만 그 화석을 먹을 수 있다면 어떨까.」
「예에?」
「평소에 항상 봐오던 일상, 재미없어 보이는 칙칙한 빌딩 속으로 출근하는 하루하루. 그런 나날이 지겹다고 생각해 오는 사람도 어딘가에는 있을 거야.」
「그렇긴 하죠.」
「그러니까 더 놀라운 거지. 마술은 평범함 속에서 의외성을 찾아내는 거야. 허리케인 때문에 엉망진창으로 무너진 건물을 토대부터 다시 지었을 때 느껴지는 행복감. 평범한 소녀가 안경을 벗었는데 의외로 아름다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느끼는 놀라움. 세상 어디에나 그런 것들이 있지. 그러니, 평범함 속 비범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어둡게 눌러 줄 필요가 있는 거야.」
「모자 속에서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것처럼요?」
「그래! 바로 그거야. 어디를 봐도 그냥 모자지만, 그 안에서 느닷없이 새가 푸드덕 날아올랐을 때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도 즐거워하는 거지. 바로 그걸 만들고 싶은 거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겉보기에도 예쁘고 맛도 좋은 것들을 만들고 있는데, 불안하지는 않습니까?」
「맙소사, 마이클! 어째서 다른 페이스트리 쉐프들을 신경 쓰고 있는 건가?」
캘러한은 장갑을 낀 채 그대로 보조 마이클의 양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는 부리부리한 눈썹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지금 내가 작업하는 것만 보기에도 바쁠 텐데 말일세.」
「앗, 앗. 딴짓한 건 아닙니다! 쉐프님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걱정이 돼서….」
「아니, 걱정을 왜 해. 그런 쓸데없는 거 하지 말지. 잘 배우고 싶다며. 당장 배우는 것만 해도 정신없을 텐데, 어딜 한눈을 팔아?」
「시정하겠습니다, 쉐프!」
보조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캘러한이 차갑게 말했다.
「그래, 정신 차려. 지금 내 케이크에 대한 감상을 얘기해 달라고 널 부른 게 아니잖나. 네가 지금 여기에 왜 와 있는지는 기억하고 있어?」
「쉐프를 보조하러 와 있습니다!」
「그래. 네가 나중에 성공해서 심사위원이 된다면 케이크를 출품한 사람들에게 평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 여기서는 단순히 일을 돕기 위해서 와 있는 거잖나.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면서 미래의 자신을 훔쳐오려고 하지 말라고.」
「주의하겠습니다!」
◈ ◈ ◈
옥빵상제라고도 불리는 김도을.
그는 이미 고등학생이다.
다양한 빵, 특히 <소망 베이커리>를 비롯해 다양한 빵에 대한 의견을 솔직하게 방송해 인기를 얻고 있다.
대형 마트나 편의점 등에 나오는 모든 빵들 중 그가 리뷰하지 않은 빵은 없다고 할 정도로, 빵돌이 중의 빵돌이로 통한다.
“도을아, 밥 먹어야지!”
도을의 어머니가 벌컥 문을 열었다. 하지만 김도을은 자리에 없었다.
“아니, 얘가 말도 안 하고 도대체 어딜 갔담?”
그 시간, 김도을은 서울에 있었다. 임진혁의 팬클럽 <진바라기>. 그들은 진혁의 국제 대회를 응원하기 위해 모이며 도을을 초청했다.
그는 거기에서 라이브 방송 DJ와 같은 역할을 맡았다.
“진혁이 형은 오늘도 여유롭네요. 다른 사람들이 치열하게 사는 동안, 나는 이 속도로 산다. 뭔가 거북이가 미친 듯이 달려가는 동안 토끼가 느긋하게 걷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거 결국 토끼가 패배하는 이야기 아니야?”
여고생 재희가 눈을 깜빡이며 말하자 도을이 태연하게 정정했다.
“그렇다고 진혁이 형을 거북이에 비교할 수도 없잖아요.”
“손이 빠르다고 듣기는 했는데.”
“아우, 그건 그냥 손이 빠른 정도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도 오래 일하다 보면 손이 빨라지긴 하거든요? 근데 그 형은 그냥… 혼자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아. 우리들이 1배속의 세상을 살고 있는 동안, 8배속의 세상에 살고 있슴다.”
거칠어 보이는 덩치 큰 남자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까부터 와 있던 남자다.
재희가 물었다.
“그런데 이 분은 누구시죠?”
“아, 이분은 이번에 제가 초빙해 온 특별 손님입니다.”
“그건 나도 아는데….”
왜 이런 사람을 특별 손님으로 초대해 왔는지 재희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팬클럽 회원인가?'
그녀는 나름대로 팬클럽 원조 회원이었다.
그래서 이런 비공개 오프라인 미팅에 모일만한 멤버 전부는 빼놓지 않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험상궂은 인상의 사람은 몰랐다.
“그래서 어떻게 알게 되신 분인데?”
“이분은 <해와 달> 본점의 인턴 제과제빵사 강운종 씨입니다.”
“오오오오오!”
조용히 모여앉아 있던 진바라기의 회원들이 박수를 쳐 주었다.
“진혁 쉐프랑 같이 일하는 건 어때요?”
“쉐프님이 대회 준비하시면서 거의 가게에 안 나오셨슴다.”
“그래도 직접 배웠다고 들었는데.”
“운동하는 법을 제대로 배웠죠.”
“이야, 생활 습관까지 가르쳐 준다니. 진혁이 형 몸 진짜 좋잖아요. 헬스도 안 다니던데 어떻게 하는지 몰라.”
강운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운동을 안 해본 사람일 리가 없는데요. 손 쓰는 게 달라. 몸을 제대로 써본 적이 있는 분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