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1화
◈ ◈ ◈
시간을 조금 돌려 그날 이른 저녁, 뉴욕의 한 식당가.
우아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분위기 있는 식당.
리암 에이든은 아내인 줄리아와 함께 테라스에서 식사 중이었다.
「여긴 언제 와도 맛있네.」
줄리아가 스테이크를 썰면서 칭찬했다. 리암은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역시.」
「누구야?」
「제임스. 임진혁 쉐프가 본선에 진출했다는데.」
「음, 그 완성도면 당연히 진출했겠지.」
「내일도 가서 봐야겠어.」
「내일도?」
「도대체 어떤 걸 만들지 너무너무 궁금하거든.」
「알았어, 나도 같이 갈게.」
의외로 순순히 수락하는 모습에 리암이 스마트폰을 닫으며 물었다.
「일하는 것 같다며 싫어했잖아? 나 혼자 가도 되는데.」
「나이도 젊고 패기가 있더라. 실력 있는 쉐프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모습을 보는 건 싫어하지 않아. 내일은 아예 제대로 된 카메라를 챙겨 와야겠어.」
리암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임진혁 쉐프 결혼했는데.」
「나도 결혼했어!」
「같이 간다니 잘 됐다. 그럼 아예 객원 기자로 기사 올리겠다고 신청도 할까?」
「이왕 가는 김에 일도 하면 좋지, 그러자.」
리암이 밝게 웃었다.
「고마워, 줄리.」
◈ ◈ ◈
새벽에 공항에 도착한 루이스는 공항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이를 발견했다.
「마리오! 대회 끝나고 피곤했을 텐데 여기까지 나왔어?」
「누가 할 말인데! 갑자기 왜 여기까지 와.」
루이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디 구석에서 혼자 질질 짜고 있을 테니까 봐 주려고?」
「필요 없어!」
「됐고 이거나 들어.」
금색 리본에 붉은색 포장지로 둘러싸인 상자였다. 상자를 건네받은 마리오는 다짜고짜 상자를 흔들어 보았다.
「너 그게 뭔 줄 알고 흔들어?!」
「내 꺼 아니야?」
「네 건 맞는데.」
「그럼 내 맘대로 해도 되지!」
「몽쉐르쉘 쿠키야.」
파리 본점에서만 판매하는 한정판 바삭바삭한 쿠키다. 마리오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좋아하는 음식이다.
개별 포장되어 있더라도 이런 식으로 구워진 섬세하고 얇은 과자들은 방금 전처럼 움직여 버리면 당연히 흔들리고 부서지기 마련이다. 마리오가 질겁했다.
「으악! 그걸 왜 이렇게 포장했어?!」
마리오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에 루이스가 킥 웃었다.
그는 동생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아얏!」
「농담이야, 그건 네 탈락 기념 넥타이고 몽쉐르쉘 쿠키는 여기.」
「심술궂기는!」
「숙소로 가자, 너도 피곤할 텐데.」
「1인실인데.」
루이스는 마리오의 어깨를 잡고서 끌고 갔다.
「내가 새로 2인실로 잡은 데 있으니까 거기서 얘기 좀 하고 가, 할 말도 있고.」
「너무 오래 하면 안 되는데.」
「너 지금 내가 파리에서 왔다는 건 알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형이 쉬어야지.」
「하하, 언제부터 그렇게 내 생각을 해 줬다고.」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루이스가 묵을 호텔로 이동했다. 룸 키를 받고 올라가면서, 루이스는 룸서비스로 샴페인을 예약했다.
「그런데 진짜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온 거야? 갑자기 급한 일이라도 생겼어? 여기에 숨겨놓은 여자라도 있어? 아니면 진혁이가 불렀어? 회사에서 뭐 새로 또 한 대?」
마리오는 내내 질문을 퍼부으며 따라왔다.
루이스는 적당히 둘러댔다.
「넌 걸어가면서 뭐 그렇게 말이 많아? 올라가서 얘기해.」
「에이, 그거 대답해주는 게 뭐 어렵다고.」
루이스는 마리오를 흘깃 보았다. 피로해 보였다. 눈가는 살짝 부었고, 어깨도 축 늘어져 있다. 평소처럼 행동하고는 있지만, 기운이 없었다.
‘오기를 잘 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룸서비스가 올라왔다.
「여기 있습니다, 손님.」
「감사합니다.」
루이스는 먼저 샴페인부터 땄다.
투명한 유리잔에 노란 술을 따르는 것을 보며 마리오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나 오늘 탈락했는데.」
「알아.」
「그런데 왜 샴페인이야?」
「맛있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루이스는 먼저 샴페인 잔을 마리오에게 건네주었다. 마리오는 루이스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홀짝홀짝 마셨다.
「넌 형을 기다리지도 않고 혼자 마셔?」
「나 마시라고 따라 준 거잖아.」
마리오는 평소라면 맛과 향을 즐기며 천천히 마셨을 고급술을 순식간에 다 마셔 버렸다. 루이스는 무어라 한마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새 동생의 눈가가 시뻘겋게 되어 있었다.
「너 우냐?」
「안 울어.」
「18살도 아니고 술 먹고 울어?」
「우는 거 아니라니깐!」
「그래, 너 안 운다.」
루이스는 가방에서 새로운 상자를 꺼냈다. 낯익은 쿠키 상자를 알아본 마리오가 반색했다.
「앗싸! 내 쿠키!」
「넌 나보다 먹을 게 더 좋지?」
「먹을 걸 주는 형이 좋지.」
「이럴 때만 좋아하는 척하기는.」
루이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뉴욕 상공에서 인터넷이 잡히자마자 온라인으로 예약한 호텔은 비싸게 주고 구한 만큼 야경이 예뻤다. 창문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뉴욕 시내는 가히 불야성(不夜城)이라 할 만했다. 작은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건물들이 수없이 눈에 들어왔다.
마리오는 말없이 술을 마시고, 과자를 주워 먹었다. 과자를 쉴 새 없이 입에 밀어 넣으며 새삼스러운 칭찬을 했다.
「여기 과자는 언제 먹어도 맛있다니깐.」
여러 겹으로 층층이 올라간 페이스트리 생지에 버터를 발라 구워낸 과자는 마치 작은 크루아상처럼 바삭바삭했다.
그렇지만 이 과자가 맛있다는 사실은 루이스도 알고 마리오도 알고 있었다.
「말하기 싫어서 과자 칭찬하는 거 다 안다.」
「그런 건 아니구.」
마리오는 입을 다물었다. 루이스가 말했다.
「이제 대회 나가보니까 홀가분해?」
와구와구 과자를 입에 밀어 넣고 있던 마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또 대회 준비할 거야?」
「응.」
「방송도 계속할 거고?」
「응.」
도토리를 가득 문 다람쥐처럼 양 볼을 과자로 가득 채운 마리오는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다.」
루이스가 기지개를 켰다. 마리오는 씹던 과자를 전부 삼키고 물었다.
「아니, 왜 물어본 건데?」
「너 기죽었을까 봐.」
「내가 기가 죽긴 왜 죽어? 대회에서 한두 번 떨어질 수도 있지. 완전 세계 대회인데. 형처럼 아예 대회 나갈 성적도 있는데 안 나가는 것보다 낫지.」
루이스는 마리오의 귀를 잡아당겼다.
「내가 안 나간 거냐? 못 나간 거지! 일이 쌓여 있는데 어떻게 나가.」
형이 귀를 잡아당겨도 마리오는 할 말을 다 했다.
「형, 형이 없어도 원래 회사란 건 어떻게든 돌아가게 되어 있어. 자기 하고 싶은 일은 알아서 해야지.」
루이스는 마리오의 입술도 잡아당겼다.
「요 망할 입.」
「아얏얏얏!」
「네가 뭐가 이쁘다고 샴페인을 시켰는지 모르겠다. 넌 물이나 마셔.」
루이스는 남은 샴페인을 전부 병째 마셔버렸다. 마리오는 루이스를 말리려고 매달렸지만 실패했다.
「어어어어, 형! 형! 형님!」
「됐어, 잠이나 쳐 자라.」
루이스는 마리오를 질질 끌고 가서 침대 위에 떠밀었다. 외출복을 입은 채로 침대 위에 나동그라진 마리오가 항의했다.
「으, 나랑 같이 마시려고 산 거 아니야?!」
루이스는 마리오가 신고 있던 구두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만 처먹고 일찍 자.」
「아, 왜!」
마리오는 두 발로 루이스를 걷어차면서 저항하려 했으나, 루이스는 능숙하게 두 발을 잡았다.
「내일 진혁이 대회.」
마리오는 그대로 동작을 멈추었다.
「…그게 왜.」
「보러 갈 거잖아.」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확언이었다. 마리오가 즉시 대답했다.
「당연하지! 응원하러 갈 거야.」
대답하는 동생의 눈에서 질투심이나 열등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루이스는 내심 안심했다.
'걱정해야 할 상황은 아니야.'
임진혁은 친구이지만 동시에 라이벌이면서 고용주다. 열등감과 시기심 그리고 질투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동생 녀석의 눈동자는 맑기만 했다.
루이스는 침대의 이불을 잡아당겨, 동생을 그 안으로 굴려 넣었다.
「그럼 닥치고 쳐 자!!」
「으악!! 형이 동생 죽인다!」
장난 섞인 비명이 들리며 밤이 깊어갔다.
◈ ◈ ◈
다음날.
아들을 응원하러 새벽부터 대회장에 나온 임운정과 장은효 부부는 의외의 손님을 만났다.
“미스터 밥!”
진혁의 결혼식에 와서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던 밥 앤더슨이었다. 유명한 화가를 본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밥 앤더슨이 제과제빵 대회에 관심이 있었나?’
‘누군가 아는 사람이라도 있나?’
기자들이 다가와 아는 체를 했으나 밥 앤더슨은 무시하고 임 씨 부부에게 다가왔다.
“암녕하쎄요.”
밥 앤더슨은 서툰 한국어로 인사를 했다. 이후에는 한 비서가 통역을 해 주었다.
「우리 진혁이를 보러 오신 겁니까?」
「아니요.」
「아.」
임운정이 머쓱해 했다. 밥 앤더슨이 들고 온 스케치북을 보여 주었다.
「케이크를 만드는 진혁이를 그리러 온 겁니다.」
「진혁이의 케이크를요? 케이크를 만드는 진혁이를요?」
밥 앤더슨이 씩 웃었다.
「케이크를 만드는 진혁이를 보고 있으면 힘이 납니다.」
「씩씩하죠.」
「아뇨, 그게 아닙니다. 임 쉐프가 케이크를 만드는 걸 보면, 생명의 기운 그 자체를 내뿜는 것 같죠. 진혁 쉐프가 만든 케이크도 그래요. 맛보는 순간 전신의 영혼을 두드려 깨우는 듯한 느낌. 그걸 한 번 맛본 사람들은 더 이상 다른 것들을 먹지 못할 겁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지금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보러 온 거지요.」
「전이었다면 아들에게 과찬을 하신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저도 이제는 그게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습니다.」
「예?」
「정성을 다해 반죽을 하고 수없이 같은 일을 하다 보면 드물게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 생명의 일부가 빠져나가는… 그래서 눈앞의 음식이 조금 더 완전해지는 느낌이요.」
밥 앤더슨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하. 그림은 남아서 누군가 계속 봐주지만 내 빵들은 사람들이 먹으면 없어져 버리잖습니까. 아무리 잘 만들어도.」
「그렇다고 해서 먹지 않으면 그 빵이 맛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니 말이야! 그건 더 이상 빵이 아니라 그냥 장식품이지.」
밥 앤더슨이 고개를 들었다.
「본선이 이제 시작하는 모양인데. 아, 저기 임 쉐프가 나오네.」
「라고 하십니다.」
한 비서는 무표정하고 성실하게 두 사람의 말을 옮겨 주었다. 페이스트리 쉐프들이 저마다 새하얗게 다려진 쉐프복을 입고 제자리에 가서 섰다. 깔끔한 조리모와 새 앞치마.
그들 대부분 어제의 예선 때문에 지쳐 있었는지 피곤해 보였다. 진혁의 뒤에 마주 서 있던 브라이언 역시 잠을 설쳤는지 안색이 거무죽죽했다.
하지만 진혁은 푹 자고 나온 것처럼 평안해 보였다. 무대용 메이크업을 받았을 리도 없는데 혼자서만 쌩쌩하다.
기운이 넘치는 모습을 보고서 어머니가 흐뭇하게 웃었다.
“우리 아들 건강해 보이는 것 좀 봐, 어제 한정식집에 가길 잘 했나 봐요.”
“아니, 쟤는 뭘 먹건 간에 상관없이 그냥 기운이 항상 팔팔 넘치던데. 혼자 20대라서 그런 게 아닐까?”
아버지가 객관적인 사실을 말했다.
한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체력이 좋으시죠.”
“그나저나 비서님, 우리 며늘아기는 언제 온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