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9화
“진혁아, 우리 빵집은 지금도 사람 많다.”
아버지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여보, 진혁이가 뭘 말하고 싶은지 알잖아요.”
“음.”
“역사 깊고 유명해서, 지역 명소가 되어버린 빵집들이 있잖아. 진혁이는 소망 베이커리에 있는 역사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싶은 거예요. 소망시에는 임운정과 소망 베이커리가 있다고. 뭐, 나쁘지 않지.”
어머니는 따뜻한 시선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빵집은 빵이 맛있으면 됐지, 뭘. 애들 괜히 귀찮게 해.”
아버지는 고개를 휙 돌리며 중얼거렸다.
진혁은 아버지의 몸동작에서 숨긴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 그리고 탁자 위를 두드리는 손동작. 좋긴 좋더라도 괜히 아들과 그 친구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아버지, 이건 사업이에요. 소망 베이커리는 <해와 달>과 법인은 분리되어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원조’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야 그렇지. 네가 거기서 배웠다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내가 별로 가르쳐준 것도 없는데.”
“아버지가 평생을 바쳐서 가꿔 온 빵집이잖습니까. 그곳이 어떤 곳인지 사람들이 제대로 알게 될 거예요.”
“뭐, 우리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앨리슨이란 분이 하고 싶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럼 하고 싶다고 하면 하게 두던지.”
아버지에게서 승낙을 끌어낸 진혁이 기쁘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아니, 네가 고마울 게 뭐가 있냐! 허허허.”
턱을 괴고서 가족들 간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마리오가 말했다.
“진혁이 너는 아버지랑 진짜 사이가 좋구나.”
“하하하.”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에게 운전사가 짧게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아버지가 제일 먼저 내렸다. 아버지는 뒤에서 따라 내리는 어머니에게 장난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가실까요, 은효 씨?”
“그래요, 운정 씨.”
어머니도 웃으면서 아버지의 손을 맞잡아 주었다. 마리오가 조그맣게 임진혁에게 속삭였다.
“부모님이 사이좋으셔서 좋겠다.”
마리오의 얼굴에 부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지, 뭐.”
‘마리오네 부모님이 이혼하셨던가? 사별하셨던가.’
언뜻 들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케이타운은 미국이라기보다 한국처럼 보였다. 거리 곳곳에 있는 한국어 간판과 영문 간판들. 그것도 80년대의 한국 거리처럼 보였다. 선명한 빨간색 바탕에 굴림체를 닮은 옛 글씨체로 희게 적어놓은 세탁소라는 글자, 가라오케, 그리고 한국식 식당과 병원들.
“이 동네는 한국 같긴 하네. 타임머신 타고 시간여행 온 것 같구만.”
“한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기억하는 한국이 이런 모습인 건가?”
마리오가 맞장구쳤다.
“프랑스에도 코리아타운이 있어요. 여기보다 조금 더 낡은 편인데, 그쪽하고 여기는 분위기가 다르네요. 맨해튼 한복판이라서 그런지 좀 더 세련되어 있달까.”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동양인보다 서양인들이 많아 보였다. 백인과 흑인, 그리고 라틴계와 유럽인들이 섞여 있었다.
“그래도 돌아다니는 사람들 보니까 확실히, 외국은 외국이야.”
“이태원하고 비슷한 것도 같고.”
부모님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한 비서가 말했다.
“이쪽입니다, 사모님.”
“호호호호호. 사모님이라니.”
어머니가 한 비서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서 말했다.
“그래! 저기 저 한식집이야. 완전히 한옥 스타일로 꾸민 집.”
어머니는 직접 웹서핑을 해서 맛집을 알아냈다며 수선을 떨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앞섰다. 마리오와 진혁은 그 뒤를 따랐다.
일행이 식당 안으로 들어가기 전 한 비서와 운전사는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 ◈ ◈
한 비서가 이미 룸을 예약해 두었다고 했다.
정갈한 한식당의 방은 언뜻 보기에 좌식처럼 보였다. 마리오가 고개를 쑥 들이밀며 말했다.
“어, 나는 바닥에는 잘 못 앉는데.”
“아니야. 여기는 미국인들도 많이 오는 데라고 했는데?”
진혁이 마리오의 등을 쿡 찔렀다.
“여기 식탁 밑이 파여 있어.”
“아, 잘못 봤다. 그냥 앉아서 먹는 덴 줄 알았네.”
미리 주문해두었는지 모두가 앉고 나자 바로 한국인 종업원이 요리를 내왔다.
진혁이 눈을 깜빡거렸다.
“아버지, 음식을 미리 주문했어요?”
“여기서 제일 잘 나가는 좋은 거로 이것저것 4인분 갖다 달라고 했지.”
어머니가 눈썹을 추켜올리며 물었다.
“여보, 애들이 뭐 먹고 싶은 게 있을 수도 있잖아요. 못 먹는 것도 있을 수 있고.”
아버지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런. 미안하다, 너희가 배고플까 봐 그랬는데… 의견을 먼저 물어봐야 했는데 말이야.”
보나 마나 진혁이 배고플 걸 걱정한 아버지가 빨리 주문하라고 한 것이 분명하다. 진혁은 혹시 마리오가 못 먹는 것이 있던가 흘깃 보았다.
마리오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잘 나가는 좋은 게 뭐에요? 맛있겠다.”
‘그래, 저 녀석은 아무거나 잘 먹지.’
진혁이라고 해서 매번 만들어내는 빵이 맛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보카도 오일을 뿌린 햄에그 샌드위치 등 비교적 실패한 음식들도 있었다. 하지만 마리오는 실험적인 빵이라도 뭐든지 잘 먹었다.
“김치찌개하고 불고기 김치볶음밥, 그리고 신선한 김치 부리또하고 갈비 바게트.”
“마리오는 김치 잘 먹니?”
“없어서 못 먹죠.”
“갈비 바게트라, 한식 메뉴로는 신기한데.”
아버지는 음료수 메뉴판을 보고 재미있어했다.
“암바사하고 쌕쌕, 맥콜을 파네. 한국 소주도 있고.”
어머니가 아버지를 힐긋 바라보았다.
“여보, 지금 여기서 술을 마시려고?”
아버지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지, 그냥 있다는 거지. 그런데 가격은 좀 세다.”
“미국인들한테는 신기한 캔 음료일 수도 있겠네.”
진혁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자리마다 깔려 있는 사군자가 수 놓인 붉은 공단 방석, 그리고 벽에 걸려 있는 산수화. 문 역시 창호지가 발린 제대로 된 미닫이문이다.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자개장도 보기에 좋았다.
“여기는 진짜 아예 한국식으로 밀고 나가는구나.”
“공간만 그렇고, 메뉴는 사람들 입맛에 맞춰서 바꿨나 봐.”
“김치 불고기 볶음밥이 궁금하네요. 김치볶음밥도 봤고 불고기 볶음밥도 봤는데 그 두 가지를 합친 건 처음 봐.”
곧 점원이 카트를 밀면서 등장했다. 카트가 도르륵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밝은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미리 주문해서 그런지 바로 나오네. 고마워요.”
진혁은 나온 메뉴를 흘긋 바라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보글보글 끓고 있는 김치찌개였다.
새빨간 국물 위에 투명하게 부풀어 올랐다가 터져가는 거품, 그리고 그 위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하얀 김.
언뜻 보이는 송송 썰린 파, 그리고 가득 담긴 김치. 드문드문 보이는 베이컨이 눈길을 확 끌었다. 점원은 주방 장갑을 낀 양손으로 찌개가 담긴 새까만 뚝배기를 고체연료 버너 위에 올려놓았다. 검은 뚝배기 그릇은 이미 연료가 내뿜는 파르스름한 불꽃에 달아올라 한껏 뜨거워져 있었다.
어머니가 턱을 괴었다.
“김치찌개 안에 베이컨을 넣었네? 나는 보통 돼지 앞다릿살을 넣는데.”
“베이컨이 아주 큼직하구만.”
어머니는 국자를 받아서, 국그릇에 김치찌개를 덜었다.
김치찌개 안에 든 재료 중에는 낯선 것들도 보였다.
“한식은 한식인데, 좀 외국 사람들 입맛에 맞췄나 봐요.”
부대찌개에서 보일 법한 베이크드 빈을 보고서 어머니가 웃었다.
그다음에 식탁에 올라간 것은 김치볶음밥이었다. 밥알 한 알 한 알까지 전부 새빨갛게 양념으로 물든 것이 마치 양념 된 고기를 구워 먹고 난 후에 그 양념으로 볶은 밥을 담았다. 볶음밥에서는 짙은 불고기 향내가 풍겨왔다.
곁들여진 계란프라이도 톡 튀어나온 노른자가 노릇노릇하니 신선해 보였다.
“김치볶음밥에는 역시 계란프라이가 잘 어울려. 빨간 밥 위에 하얗고 노란 게 있으니까 보기 좋지 않니?”
“하하하.”
“김치볶음밥에 불고기를 왜 넣나 했는데 의외로 괜찮네.”
어머니가 찌개와 밥에 대해서 가볍게 감상을 늘어놓는 동안 진혁과 아버지는 갈비 바게트에 집중했다.
“이 바게트는 여기서 직접 만든 건가?”
“여기서 만든 건지는 모르겠는데 구워서 며칠 숙성한 것 같긴 하네요.”
“맛있어지라고 일부러 시간을 들인 거로 보여.”
희고 각진 도자기 대접 위에는 갈색 크라프트지가 깔렸고, 그 위에는 반으로 잘라서 갈라 속이 보이게 올린 바게트가 있었다. 보기 좋게 갈색으로 구워진 바게트 겉면은 단단하나 안쪽은 부드럽고 희었다. 연한 속 위에는 부드러운 녹색 잎채소를 얹었고, 그 위에는 양념 된 갈비가 듬뿍 올라가 있었다. 두툼한 살점에서 향긋한 갈비 향이 솔솔 풍겨왔다.
진혁이 빵 접시를 받아드는데 점원이 물었다.
“잘라 드릴까요?”
진혁은 칼을 받아들었다.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어, 이거는 조금 어려우실 수 있어요. 빵이 두꺼워서요.”
점원이 머뭇거리자 진혁이 싱긋 웃었다.
“괜찮습니다.”
“우리 아들이 빵 자르는 건 잘 해요.”
어머니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웃었다. 진혁은 칼을 들어 올려 바게트를 천천히 잘랐다. 고기부터 빵까지 깔끔하게 잘리는 모습을 보고서 직원이 크게 놀랐다.
“갈비 바게트를 이렇게 잘 자르시는 분은 처음 봐요. 이게 고기가 썰리면서 움직이고, 빵도 뭉개지고 그러는데.”
“우리 애가 제과제빵을 하거든요. 그래서 빵도 잘 잘라요.”
어머니가 다시 한 번 더 자랑스럽게 말했다. 진혁은 얇은 또띠아에 감싸인 김치 부리또 역시 네 조각으로 잘라 주었다.
조각조각 잘린 부리또의 단면에는 진한 치즈와 김치볶음밥 밥알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볶음밥에는 동글동글한 쇠고기 조각과 조그맣게 썬 당근과 양파, 그리고 다른 재료들이 섞여 있었다.
“서양식 김밥 같아. 진짜 맛있겠다.”
아버지가 입맛을 다셨다.
“그럼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점원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아버지는 먼저 궁금했던지 갈비 바게트에 먼저 손을 뻗었다.
따끈따끈한 바게트와 갈비.
쫄깃하게 씹히는 육즙이 흘러나와 바로 아래의 바게트를 적셨다. 달콤하고 진한 양념이 촉촉하게 배어든 바게트 속살은 입안에서 살살 녹아내렸다.
“이거 진짜 잘 어울린다!”
“맛있다. 여태까지 LA갈비는 밥이랑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치, 햄버거에 감자튀김을 곁들여 먹는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먹는 것도 맛있네.”
“단품 메뉴 자체는 좋은데, 이건 식사 메뉴라고 하기엔 애매하다. 맥주 한 잔 시켜서 같이 먹으면 좋겠어.”
김치찌개와 볶음밥도 호평이었다.
“어머, 이건 제육볶음을 그대로 밥으로 볶아낸 것 같네.”
“불고기가 익숙하니까 이름을 불고기라고 붙였나 봐요. 매콤하게 맛있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하고 있을 즈음, 아버지가 운을 떼었다.
“진혁아, 전에 네가 만들었던 물엿 말이다. 사람이 점도 봐가면서 계속 저어야 해서, 지금으로서는 너밖에 만들 수 없다고 했던 거.”
마리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비결이었어?”
진혁은 마리오를 무시하고 아버지에게 대답했다.
“예.”
“그거, 나도 만들 수 있더라.”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