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8화
앨리슨은 약속이 있다며 먼저 떠났다.
진혁은 마리오와 브라이언, 두 사람과 함께 대회장에서 나왔다.
진혁은 익숙한 이들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한 비서와 부모님, 그리고 익숙한 운전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진혁아! 많이 피곤하지 않아? 어디 가서 밥이라도 좀 먹어야지.”
어머니는 테이크아웃 커피를 한 손에 들고서 주차장 앞에서 서성거리고 계셨다.
분명히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뜻한 커피만 드시는 분이다. 하지만 얼마나 기다렸는지, 커피에서는 김이 올라오지 않았다. 차갑게 식은 커피를 양손으로 감싸 안고서 어머니가 미소지었다.
“두 분도 식사를 좀 해야 하지 않아요?”
“아, 저는 좋습니다. 아내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브라이언이 바로 대답하자, 옆에서 마리오가 속삭였다.
“그런 경우에는 좋다고 하면 안 돼….”
“엥? 그래?”
어머니가 깔깔 웃었다. 마리오가 말했다.
“어머니, 말씀 편하게 하세요. 진혁이 어머니면 저한테도 편하게 대하셔도 괜찮아요.”
“그래, 마리오는 괜찮지? 밥 먹고 가도 되지?”
“그럼요! 저는 아내도 없고~ 여자친구도 없고~”
마리오는 어설픈 동작으로 스텝을 밟으며 춤 같지 않은 동작을 선보였다. 무표정하게 보고 있던 아버지마저도 웃어 버렸다.
“맨해튼 32번가 쪽에 맛있는 한식집이 있다고 해서 그쪽으로 예약했어.”
“한식 좋죠, 잘 먹어요.”
브라이언은 두리번거리다가, 낯익은 자동차를 발견했다. 익숙한 번호판을 확인하고 그는 인사를 했다.
“저기 아내가 데리러 와 있네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내일 또 보자고.”
그 말을 들은 아버지가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보조 역할을 하는 브라이언이 내일도 참가한다고?’
임진혁이 본선을 통과했다는 이야기다.
즉, 마리오는 탈락했을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마리오를 힐긋 바라보았다. 눈가가 살짝 붉어지긴 했지만 크게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속삭였다.
“혼자서 뉴욕 관광을 하고 싶을 수도 있는데, 우리끼리 하는 식사에 데리고 가면 오히려 불편해하지 않겠어?”
“어머, 여보.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다고 그래. 낯선 곳에 혼자 있으면 오히려 외로울 거 아냐. 그리고 입이 하나 더 있으면 좋지, 메뉴를 네 개 시켜서 나눠 먹으면 되잖아.”
“….”
아버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마리오를 힐긋거렸다.
‘우리가 같이 가면 천상 진혁이를 축하한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고, 그럼 마리오가 탈락했다는 말도 나올 수밖에 없는데.’
승패(勝敗)야 어쩔 수 없으나 굳이 탈락한 사람 앞에서 승리를 축하하는 것은 좋지 않다.
아버지는 마리오가 괜한 상처를 입을까 염려했다. 진혁의 부모님이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브라이언은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마리오 너도 잘 가고, 진혁이 넌 컨디션 관리 잘 하라고. 두 분도 안녕히 계세요.”
“그래!”
마리오는 해맑게 양손을 붕붕 흔들며 인사를 했다.
진혁과 부모님, 그리고 마리오까지 자동차의 뒷좌석에 탔다. 검은색 코팅이 된 SUV는 뒷좌석에 성인 4명이 타도 넉넉했다.
운전기사는 말없이 운전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키 높은 빌딩 숲을 보며 어머니가 말했다.
“여기나 저기나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은 것 같아.”
아버지는 턱을 괴고서 물었다.
“여기까지 와서 한식을 먹는 게 좋을까? 뉴욕 명물인 스테이크 같은 걸 먹고 싶지는 않고?”
“여기 와서 저녁마다 파스타니 스테이크니 뭐니 먹고 나니까, 이제는 그냥 맨밥에 고추장 얹고 비벼 먹고 싶지 뭐야.”
“진혁이가 먹고 싶은 걸 먹어야지, 당신이 먹고 싶은 걸 고르면 어떡해….”
아버지가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진혁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머니가 드시고 싶은 거로 해요, 저도 좋습니다.”
“그래? 너도 좋지? 한식 좋아하잖니.”
“이탈리아에서도 거의 피자랑 파스타, 치아바타에 파니니, 샌드위치니 뭐니 먹었거든요. 슬슬 한식을 먹을 때도 됐죠.”
어머니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래! 내가 우리 아들이 뭐 먹고 싶어 하는지 모를 리가 없잖아.”
마리오도 맞장구를 쳤다.
“케이타운 한식이 진짜 맛있다고 하던데 덕분에 맛 좀 보겠어요.”
한 비서가 말했다.
“한가람 4인실로 예약해두었으니 그쪽으로 바로 가시면 됩니다.”
어머니가 물었다.
“그러지 말고 비서님도 같이 가셔서 식사하시지 그래요? 기사님도요.”
“저와 기사님은 근처에서 대기할 예정입니다.”
“여보, 그것도 일이야. 식사는 자유롭게 하는 편이 좋을 거야.”
임진혁이 말했다.
“아 참, 부탁할 게 있는데….”
한 비서가 경계하는 듯 눈을 여러 번 빠르게 깜빡거렸다.
“말씀하시지요.”
‘설마 맨해튼의 호텔을 하나 더 사려고 하시는 건 아니시지요?’
진혁은 그 눈빛에서 한 비서의 마음을 한순간 읽은 듯싶었다.
“마리오한테서 소개받을만한 사람이 있는데.”
“응? 내가? 누굴?”
“앨리슨 쉐프, 일을 꽤 잘하던데.”
“음~? 앨리 말이야? 앨리가 얼마나 빠릿빠릿한데. 제과학교 다니던 시절에 선생님들도 엄청 좋아하고, 또래들도 책임감 있다고 신뢰하는 애였지. 지금도 그래.”
마리오는 앨리슨에 대해서 묻지도 않은 사실을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빵 만드는 걸 좋아하고 성실한데, 막 재능을 타고난 타입은 아니야. 너같이 미친 듯한 천재가 세상에 여러 명이 있을 수는 없잖아. 그런데 성실성하고 인간성, 그것만큼은 진짜 따라올 데가 없어.”
“유튜브를 하려고 한다며?”
“응, 기계같이 같은 빵을 찍어내는 건 이제 지쳤대. 자기만의 빵을 만들어보겠다고 생각하고 있더라. 진짜 자기 계획이 확고한 애야. 진짜 알뜰하게 모으고 투잡으로 뭐 만들어 팔고 하더니 혼자 15만 유로나 모은 거야. 이제 2년 동안은 세계를 여행하면서 그 동네의 빵 굽는 법을 배우고, 그리고 그걸 유튜브에 찍어서 올릴 거래.”
15만 유로는 대략 한화로 2억 원 가까이 된다.
진혁은 예상외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기획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인재야.’
마리오는 앨리슨이 굳이 밝히지 않았던 미래 계획까지 전부 이야기했다.
‘마리오 녀석은 역시 눈치가 없고.’
앨리슨이 그 계획을 진혁에게 알리고 싶었다면 아까 직접 얘기했을 것이다. 그러니 친구라면 이 사실에 대해서 남에게 떠들 이유는 없다.
하지만 진혁은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진혁아, 네가 직접 소개해주면 되지. 왜 내가 비서님한테 앨리슨을 소개해줘야 돼?”
진혁이 어린애를 타이르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응? 무슨 오해?”
“들어보니까 굉장히 좋은 계획이야. 하지만 수입이 들어오지 않는 데 계속 쓰기만 하면, 나중에는 결국 쪼들려서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잖아.”
“그거야 그럴 수도 있긴 하지. 돈을 벌지 않고 쓰기만 하면 언젠가 다 떨어질 수도 있으니….”
마리오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그래. 네 친구기도 하니까 내가 돕고 싶어.”
“앨리슨은 누가 도와주는 걸 싫어할 텐데. 걔도 나하고 성격이 비슷해, 일방적으로 도움받는 건 원치 않아.”
“당연히 그런 게 아니지. 우리 아버지가 소망시에서 빵집을 하고 계신 건 알고 있지?”
“응? 나?”
아무 생각 없이 창문을 들여다보며 흘러가는 뉴욕의 풍광을 보고 있던 아버지가 깜짝 놀랐다.
“나는 왜 불렀냐?”
“우리 아버지는 한국의 전통 빵을 만들고 계셔.”
“전통 빵이라니, 그냥 만들고 있는 거지. 전통이라고 할 것까지야….”
“소보루빵이나 팥빵, 튀김찹쌀빵 같은 빵 말이야. 예쁘고 화려하게 꾸며놓은 카페 같은 빵집이 아니라, 시골 노인들도 다가와서 사 먹는 그런 빵을 구우시거든. 앨리슨이 첫 영상을 한국에서 찍으면 좋지 않을까?”
“어! 그건 진짜 좋은 생각이다.”
마리오가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다.
“꼭 <해와 달> 지점일 필요는 없지만 말이야. 한국에도 좋은 빵이 많이 있다고. 지방 구석구석에도 서울과는 다른, 역사 깊은 지역 빵집이 숨어있어.”
“그래?”
“군산의 이성당(李晟黨), 익산의 풍성제과(豊盛製菓), 광주의 궁전제과(弓箭製菓)… 유명한 빵집만이 아니야. 유명하지 않은 빵집들도 저마다 자기들의 매력을 뽐내고 있지. 미국의 지방 빵집들을 소개하는 것도 의미 있을 거야. 하지만 비빔밥이나 불고기, 갈비로만 알려진 한국 음식 대신에 한국 빵이 소개된다면 어떨까?”
마리오가 흥분해서 외쳤다.
“진짜 좋은 아이디어다. 내가 비서님을 소개해 주면 되는 거지?”
“응, 일방적으로 도와주려고 하는 게 아니야. <소망 베이커리>가 어떤 곳인지 세상 모든 곳이 알 수 있게 하는 거지.”
아버지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깜빡거렸다.
“방금 전에 네가 말한 빵집들도 굉장히 유명하고 좋은 곳들인데. 그런 곳을 가는 게 좋지 않겠냐?”
“아버지.”
진혁은 고개를 들어 똑바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아버지가 만드는 빵이 최고예요.”
“…진혁아.”
“가게 월세 낼 돈이 아슬아슬할 때도, 튀김 빵 튀기는 기름은 반드시 버렸잖아요.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아도 손님들에게는 진실하려고 항상, 노력하고 계셨잖아요.”
“….”
“지금 사람들이 저보고 빵을 잘 만든다, 빨리 만든다, 상을 받았다, 하고 떠들잖아요. 그런 건 사실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럼.”
“아버지가 한 자리에서 계속, 뿌리 깊은 나무처럼 서 계셨으니까 가능했던 겁니다. 이 임진혁이가 동네 빵집에서 아버지 어깨너머로 보고 자랐는데, 토종 제과제빵사인데 놀랍게도 잘 컸다, 이런 게 아니에요.”
진혁은 알고 있었다.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 출연하던 시절에도 그는 유일하게 해외유학파가 아닌 페이스트리 쉐프였다.
기자들은 그 사실을 이런 식으로 포장했다.
[‘조그만 시골 빵집’이란 불모지에서 일을 도우면서 컸다. 하지만 뛰어난 재능으로 말미암아 혼자서 모든 것을 깨우쳤다. 아무도 따라갈 수 없는 놀라운 재능이다!]
또한, 국내의 제과제빵대학을 조명하는 기자도 있었다.
[유학파들 사이에서 외로이 피어난 재능, 그 재능을 뒷받침한 데에는 국내 제과제빵 대학의 내실 있는 교육이 있었다]
진혁은 타고난 재능이라며 온갖 칭찬을 받았다. 제과제빵대학의 교육 커리큘럼 역시 호평을 받았다. 그동안 아버지는 완전히 잊혀졌다.
임진혁은 그게 싫었다.
사람들은 아버지의 ‘동네 빵집’을 소개하는 글에 악플을 달았다. 어떤 이들은 운 좋게 재능있는 아들을 만나 인기가 좋아진 곳이라며 험담을 했다.
그런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척박한 사막에 씨앗을 뿌렸더니 싹이 터서 꽃이 피고 열매를 열었다는 둥 헛소리를 했다.
하지만 진혁의 생각은 달랐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더라면.
아버지가 빵을 굽지 않았더라면.
아버지가 친구에게 선물 받은 오븐을 소중하게 닦는 모습을 보지 못했더라면.
아버지가 가족처럼 빵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진혁은 절대로 이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모두 아버지 덕분이다.
그는 아버지가 진정 어떤 사람인지 모든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