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467화 (465/656)

제 467화

‘돈보다 뜻이 먼저라면 더 많은 돈을 주면 되지.’

임진혁은 ‘돈이 필요 없다’라는 말이 어떤 뜻인지 잘 알았다. 정말로 금전에 관심 없는 사람은 ‘돈이 필요 없다’라는 말을 굳이 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이탈리아에서 구매한 호텔 역시 마찬가지다.

브라이언이 스크린에 떠오른 케이크를 보고서 말했다.

「이건 좀 괜찮은데? 생각 잘했다.」

빨간 레이어드 케이크 위에는 소프트아이스크림처럼 하얀 크림이 소용돌이처럼 길쭉하니 솟아있었다. 언뜻 봐도 크림만으로 30cm는 되어 보였다.

아이스크림과 유사하게 생겼지만 실제로 아이스크림일 리는 없다. 그렇다면 벌써 녹아내렸을 것이다.

희디흰 크림 아래 선명한 붉은색 케이크 역시 예뻤다. 위에 솟아있는 소프트크림 곁에는 화이트 초콜릿 달과 별이 장식되어 있다.

진혁이 물었다.

「어느 나라 국기지?」

「터키.」

「붉은색을 예쁘게 잘 뽑았네. 색감이 진짜 좋다, 최고급 루비처럼 투명하네.」

「응? 왜 하필 루비야?」

진혁이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듯 말했다.

「이번에 미미 씨가 산 루비가 딱 저 색깔이더라고.」

브라이언은 새삼스럽게 임진혁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래… 네가 너무 소탈하게 행동해서 잊어버릴 뻔했네.」

때때로 짜장면을 시켜 먹기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프라이드치킨을 주문하기도 한다. 브라이언이 처음 만났을 때 임진혁은 단순히 이제 막 텔레비전 쇼에 나온, 동네 빵집 아들이었다.

빵을 빠르고 정확하게 많이 맛있게 만든다는 점 외에는 특별히 다른 점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제과제빵 업계에서도 크게 성공한 사업가로, 국제적으로 그 저변을 넓혀 가고 있다.

‘그리고 나도 얘 밑에서 일하고 있고.’

디저트 서바이벌 쇼가 끝나고 뒤풀이에서 함께 술잔을 부딪칠 때만 해도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다.

브라이언은 새삼스럽게 임진혁을 바라보았다. 부유해진다거나 권력이 생기면 사람은 변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진혁은 전혀 변한 데가 없어 보였다.

처음부터 명리(名利)를 초월한 것처럼 자신의 케이크에만 열중하는 면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돈이나 명예에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브라이언 자신이 돈도 갖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돈과 명예를 돌같이 봐야 둘 다 가질 수 있게 되는 건가….」

브라이언은 갑자기 해탈한 도인처럼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진혁은 뜬금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브라이언을 보며 물었다.

「뭐야, 왜?」

「아무것도 아니야.」

주느비에브가 웃으며 말했다.

「아이베르크 씨가 아마 화가이자 조각가 출신일 거예요. 그러잖아도 다양한 형태와 색감을 잘 쓰는 거로 유명하죠. 브라이언 씨도 전부터 사실 디자인이나 색감 쪽으로 꽤 유명하지 않았어요?」

「아이베르크 쉐프의 터키식 스타일하고 제 스타일은 많이 다릅니다.」

「그거야 그렇지만요.」

주느비에브는 엉덩이에 한 손을 대고서 말했다. 저마다 자신의 감상을 이야기하는 동안, 오후 예선 팀의 케이크 심사가 종료되었다.

「아, 이제 끝났네요.」

「기다리는 것보다 케이크 만드는 게 더 좋은데, 주방도 못 쓰게 하고.」

진혁이 투덜거렸다.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떨떠름한 눈빛으로 진혁을 보았다.

브라이언이 피식 웃었다.

「그래, 넌 원래 그런 놈이었지. 진짜 달라진 게 없다.」

「뭐가.」

「보통은 대회 케이크 제작처럼 커다란 작업을 하면 지쳐서 쉬고 싶잖아.」

지금 참가자가 아니라 보조로 참석한 브라이언 역시 지칠 대로 지쳐 있다. 결과가 발표되면 자리로 돌아가서 쉴 생각이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 푹신한 침대에 잠기고 싶다.

다른 이들도 웅성거리며 동의했다.

캘러한이 말했다.

「젊은 게 좋긴 좋군, 체력이 넘쳐서 말이야.」

주느비에브가 묶어 올린 머리를 풀어헤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참, 부럽긴 부러워요. 예전에는 열정이나 재능이 부러웠는데 요즘은 체력이 부럽다니까. 숫자 앞자리가 바뀌니까 매일 매일이 달라. 전에는 일주일씩 밤을 새워서 구상하고 기획해도 체력이 넘쳐 흘렀는데, 요즘은 하루만 밤새도 이틀은 누워서 지낸다니까.」

스피커에서 방송이 울리기 시작했다.

「휴게실에 계신 페이스트리 쉐프 여러분,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방송과 동시에, 스크린에도 같은 공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진혁이 중얼거렸다.

「빨리 발표하고 끝났으면 좋겠다.」

토마스 닐슨 크리스티얀센이 한숨을 푹 쉬었다.

「예선은 참, 시상식이고 뭐고 없이 저렇게 발표하고 끝나니까 허무해.」

「괜히 단상에 올라가서 탈락한 거 자랑하는 것보다 낫지.」

캘러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탈락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않았다.

탈의실에 있던 마리오가 문을 열고 나왔다.

「어디, 지금 발표 시작했어?」

「아직 아니야. 이제 본선 진출자는 이름이 전광판에 나온다고 했어.」

「으으, 떨린다.」

마리오는 푹 쉬었는지 개운해 보였다.

눈이 조금 부었지만, 진혁은 모른 척해 주었다. 브라이언이 장난처럼 말했다.

「어차피 결과를 아는데 왜 떨려.」

「그래도 만에 하나, 혹시 모르잖아.」

마리오는 자신보다 실력이 월등한 임진혁이 출전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회 참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그늘 없이 환하게 웃었다.

「진혁이가 참가하는 만큼 나도 더 열심히 준비했으니까.」

「그래, 케이크가 좀 고개를 까닥~ 까닥하면 어때. 안 넘어졌으면 됐지.」

「브라이언!!」

「평생 놀릴 거다.」

「아, 좀 잊어버려 줘!」

「크크큭.」

브라이언과 마리오는 장난치면서도 불안한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반면에 진혁은 태평하게 하품을 하면서 눈앞의 제과제빵 재료 카탈로그를 뒤적였다.

「진혁아, 넌 저기 안 봐?」

「음.」

이미 심사위원들이 누굴 선발했고 누굴 떨어뜨렸는지 전부 다 들었다. 그렇기에 그는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동안에 홀로 다른 곳을 보고 있으니 확실히 눈에 띄었다.

「뭐, 난 확실하게 올라갈 거다. 이건가? 퀄리티가 남다르기는 했지만 말이야.」

캘러한이 시니컬하게 말했다.

「그 짧은 시간에 대자연을 그 정도로 소화해내다니.」

누군가 말했다.

「그래도 국기랑은 관련 없었잖아.」

캘러한이 단호하게 말했다.

「국기랑 관련이 있었어. 아까 심사 위원들이 하는 말을 못 들었나?」

「아.」

「나야말로 주제와 관련이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불안한데. 후우.」

「그래도 캘러한 쉐프, 카드 타워 멋있었어요.」

「충분히 국기의 뜻을 담아냈다고 생각했는데, 심사위원들이 다르게 생각하면 그걸로 끝이니까.」

캘러한 역시도 불안한지 등으로 돌린 손이 쉴 새 없이 옷자락을 구기고 있다. 토마스 닐슨은 스크린을 애써 외면하면서도 눈알을 계속 굴리고 있었다.

이름 모를 백인 쉐프는 입술을 물어뜯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초조함과 불안이 안개처럼 주변을 둘러싸, 다들 자기만의 걱정 속에서 스크린을 쳐다볼 뿐이었다.

모두가 긴장에 잠겨 있는 동안, 드디어 발표가 시작되었다.

월드 페이스트리 챔피언십에서는 특이하게도 본선 진출자의 이름이 아니라 탈락한 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이 하나씩 불렸다.

「테즈미 누란.」

「크흑!」

한쪽 구석에 있던 자가 앓는 소리를 흘리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는 상처 입은 어린 짐승처럼 몸을 웅크리며 쭈그러들었다.

「조나단 워즈워스.」

「….」

신음조차 내지 않고 이를 악무는 이도 있었다.

「이즈번 카르로네.」

「기르시 푸샨.」

저마다 절망을 표출하는 방식이 다양했다.

한 나라에서는 최대 2팀이 출전할 수 있다.

둘 중 한 팀만 본선에 진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둘 다 본선에서 탈락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두 팀 전부 탈락한 국가의 참가자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위로하기도 했다. 주느비에브는 같은 프랑스 출신의 헬렌을 포옹했다. 그녀는 본선에 진출하지만, 친구는 탈락한 것이다.

「네 몫까지 열심히 할게.」

「주느비에브, 응원할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헬렌과 주느비에브처럼 화기애애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의 탈락자 존 킴벌리는 캘러한을 욕하면서 나갔다.

「내가 떨어지고 그레이트 브리튼의 기상을 살리지 못한, 마술쟁이가 올라가다니! 심사위원의 눈이 잘못됐어.」

그는 독기어린 눈으로 대기실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고서 성큼성큼 나갔다. 킴벌리가 거칠게 문을 닫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이름이 불렸다.

「마리오 강.」

역시나 탈락했다.

마리오는 울거나 화내지 않았다. 그는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진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몫까지 잘 해줘야 해.」

악수를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이전에 같은 팀이었을 때 몇 번이나 했던 동작이다.

「알았어.」

주먹과 주먹이 살짝 맞닿았다. 진혁은 마리오의 작은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이전에는 완벽하게 탈색했던 정수리에 이제 까만 머리가 올라오고 있다.

그리 오래 지난 것 같지 않은데, 벌써 이만큼이나 시간이 지났나 보다.

마리오가 다시 말했다.

「꼭.」

진혁에 비해 마리오는 손이 작았다. 하지만 진혁은 마리오의 손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아주 잘 알았다.

‘연습을 많이 했나 보군.’

지난번에 만났을 때에 비해서 확연히 굳은살과 상처가 늘었다. 오븐에 데인 것이 분명한 화상 자국에, 칼에 베였다가 아물어가는 상처도 보인다. 불편해 보이는 어깨만이 아니다. 전신에 더께처럼 쌓여있는 피로가 무거워 보였다.

「그래.」

진혁은 주먹을 맞부딪히고 나서 뒤로 물러나려는 마리오의 어깨를 잡아 끌어당겼다.

「뭐, 뭐야?!」

「별 건 아니고.」

프랑스에서 자란 마리오는 동성이건 이성이건 상관없이 다가와 포옹을 하며 인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마리오가 다가와 포옹하는 경우는 많았으나 진혁이 먼저 하는 경우는 처음이다. 마리오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가만히 서 있었다.

「아니, 왜?」

진혁은 껴안는 것처럼 다가오더니 마리오의 어깨를 툭, 툭 두드렸다.

마리오는 순간적으로 전신이 오싹해지는 듯한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팔월에 무더운 파리를 걷다가 세느 강변에 접어들면 강바람이 불며 확 시원해질 때가 있다. 그때와도 유사한, 신기한 감각이었다.

「뭐야, 갑자기 확 춥다.」

「기분 탓인가 보지.」

진혁은 바로 거리를 벌리며 뒤로 물러났다. 마리오가 히죽 웃었다.

「너도 내심 내가 탈락해서 미안해하고 있었구나?」

「뭐? 전혀 아닌데.」

저렇게 흉터가 남을 정도로 열심히 연습했으니, 피로 정도는 없애줄까 싶어서 진기를 조금 불어 넣어준 것뿐이다.

마리오는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오더니 양팔을 활짝 벌렸다.

「자, 이 형님한테 와서 안겨.」

진혁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누가 누구 형님이야.」

「아, 왜! 생일은 내가 더 빠르잖아.」

「아닌데.」

「내가 다 알거든! 진희 씨한테 들었어.」

「잘못 알고 있는 거다.」

마리오는 진혁을 껴안으려고 덤벼들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진혁은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좀 안겨 봐! 내가 고마워서 껴안는다는데.」

「됐다.」

「계속 도망가기야?!」

마리오는 종료 벨이 울릴 때까지 진혁을 쫓아다녔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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