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6화
「방금 일어난 일을 봤잖아, 다들 팔아달라고 하니까 그렇지.」
「그럼 좋잖아? 네가 만들어서 팔면… 돈도 많이 벌고….」
「돈은 이미 많아. 일도 많고.」
「….」
「그걸 만들려면 나 혼자 가내수공업 해야 한다고. 그래서 안 돼.」
진혁은 짧게 설명했다. 마리오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도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안 되겠다.」
마리오는 바로 납득했다. 쿠프 드 몽드 파티쉐리를 함께 준비해 왔기 때문에 그는 진혁이 어떤 걸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넌 맥락 없는 단순 반복 작업 싫어하잖아.」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긴 한데. 이 경우엔 굳이 내가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일이 아니니까.」
아버지의 가게, 소망 베이커리에서 아버지와 함께 일할 때는 단순 작업이 즐거웠다. 빠르고 정확하게 일하면서 아버지의 일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굳이 하지도 않아도 될 일을 하는 건 사양이다.
마리오가 탭댄스를 추는 것처럼 오른발로 바닥을 빠르게 탁탁 두드렸다. 기대감을 품은 듯한 눈으로, 마리오는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뭐, 그거야 그렇지. 큰 혁신이 되긴 하겠지만… 아까 네가 하려던 얘기 말인데.」
「응?」
진혁은 마리오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긴장한 것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왼손 검지로 왼손 엄지 안쪽을 문지르며 마리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친구가 아니라 라이벌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지.」
「그래, 친구가 아니라 라이벌이라고….」
브라이언이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는 양팔을 크게 벌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마리오 네가 나보다 훨씬 빨리 진혁을 만났잖아? 대회에서 만나서 처음으로 처참하게 졌다고 했지. 그리고 진혁이 어떤 빵을 만드는지 알고 싶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알지 못했고, 우연히 들렀던 강남의 유명한 신흥 빵집에서 진혁을 만났다며. 그리고 몇 번이고 명함을 남겼지만, 진혁은 연락해주지 않았고….」
마리오는 바로 손을 뻗어 브라이언의 입을 막았다.
「…으아아아, 으아아아아! 듣지 마, 임진혁! 듣지 마!」
「아니, 난 이미 알고 있는 일이잖아.」
진혁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마리오가 이마에 주름살을 잡으며 외쳤다.
「어떻게 알았어?!」
「네가 하루에 명함을 세 장씩 남기고 가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그런데 나한테 왜 연락을 안 했어?」
「바빠서.」
「….」
마리오가 말을 잃었다. 브라이언이 검지로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오전 시간의 작업 이후에 이미 밀가루와 크림 등으로 얼룩져 있던 쉐프 복은 벌써 벗어서 세탁용 비닐봉지에 넣어둔 지 오래다. 그래도 어디서 묻었는지, 턱에 하얀 가루가 조금 묻었다.
진혁은 브라이언의 턱에 붙어 있는 가루가 신경 쓰였다.
‘슈가 파우더인가? 밀가루?’
「그 강남 빵집이 진혁이 네가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와서 맡게 된 가게였지? 미네소타 시골구석에서 매일같이 화이트 브레드에 베이글, 식빵을 구워서 팔다가 갑자기 인스타그램 스타일의 스타일리시한 가게에서 책임자로 일하게 된 거 아냐. 진짜 정신없었겠는데. 바쁠 수밖에 없지, 원래 새로 오픈한 가게는 바쁜데 그 가게 스타일이 전에 있던 곳하고는 완전히 다르니, 원.」
반면에 마리오는 브라이언의 얼굴에 묻어 있는 얼룩보다 설명 자체에 집중했다. 진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브라이언의 설명에 완전히 납득해버렸다. 마리오는 방금 브라이언이 했던 말을 따라 하면서 힘없이 고개를 여러 번 끄덕거렸다.
「그렇구나….」
「잠잘 시간도 없었겠지.」
「그런데 나는 그런 상황도 모르고 왜 나한테 연락도 안 하냐고 하고….」
「그냥 귀찮아서 안 한 건데.」
「에이, 그렇게 말해도 네 본심은 잘 알아. 만나서 충분히 제과제빵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을 나눌 만큼, 내가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간파한 거지. 그래서 네 라이벌인 내가 좀 더 성장해서 돌아올 때까지, 연락을 받지 않고 기다린….」
마리오가 제멋대로 상상력을 전개시키는 사이에 브라이언이 진혁을 쳐다보았다. 그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진혁에게 소곤거렸다.
「그랬어?」
진혁은 짧게 대답했다.
「아니.」
브라이언은 순간적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리고 힐긋 눈알을 굴려 마리오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저렇게 생각하게 내버려 두자, 행복해 보이네」
어쩐지 의기양양해 보였다.
‘이거 뭔가 익숙한데….’
부하들이 서로 임진혁이 누구를 더 아끼는지 경쟁할 때 이런 모습을 보였다. 브라이언이 조그맣게 하나 더 물었다.
「그래서 정말로 마리오를 라이벌로 생각하는 건 아닌 거지?」
진혁이 진지하게 말했다.
「글쎄, 라이벌이라기보다는 회사 직원이라고 생각하는데, 일도 잘 하고」
「정말로?」
「향상심도 있고, 나쁘지 않지.」
「마리오는 부하더라도 나는 네 친구군, 후후.」
「…이 대화는 이제 여기까지 하자.」
「그래, 네가 쑥스럽다면 괜찮아.」
진혁은 그다지 말을 많이 하지도 않았지만 조금 피곤해졌다.
친해져서 즐거운 면도 있지만 조금 번거롭기도 하다.
‘둘이 하는 짓이 아주 똑같아.’
그는 휴게실 벽에 걸려 있는 전광판을 응시했다.
전광판 아래에는 100인치는 넘을 크기의 하얀 스크린이 걸려 있었다.
「저 나라는 크로아티아인가? 적색과 백색, 푸른색 가운데에 웬 바둑판무늬 방패와 뾰족이 모양들이 있네.」
「크로아티아 맞아. 가운데에 있는 저 모양은 크로아티아의 국장일걸.」
「흠, 디자인은 나쁘지 않은데. 누구 것처럼 흔들흔들한다.」
「내 케이크는 흔들리기는 해도 무너지지는 않았어! 비교하지 말라고.」
「저 팀 케이크도 아직 멀쩡하다고. 지금 무너지라고 하는 거야?」
주느비에브가 끼어들었다.
「이건 마리오 쉐프 말이 맞아. 저 케이크는 금방 넘어질 거 같은데? 토대가 불안정하잖아.」
「덧붙여진 조건은 그냥 ‘높이’밖에 없는데 왜 저렇게 다들 어려워하나 몰라.」
「가로로 넓게 만드는 게 차라리 쉽지, 높게 올리려면 그만큼 케이크가 조밀(dense)해야 하고 맛을 내는 재료도 한정되잖아.」
「조밀한 케이크를 만들면 되지.」
「말은 쉽지만 뭐어, 하하하.」
주느비에브가 눈꼬리를 추켜올렸다.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검지로 스크린을 가리켰다.
「봐, 저기. 지금 벌써 무너지잖아.」
크로아티아인 쉐프의 눈동자는 텅 비어 탁해 보였다. 그는 손을 떨면서 무너진 케이크를 그저 내려다볼 뿐이었다. 옆에 서 있던 보조가 황급히 케이크를 쓸어 담아 치우는 동안 그는 고개를 푹 떨구고 조리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지나치게 절망한 자는 눈물조차 흘리지 않는다. 패배자에게 할애할 시간 따위는 없다는 듯이, 카메라는 곧 그를 떠나 옆자리의 다른 페이스트리 쉐프를 향했다.
마리오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떨리는 양쪽 손을 등 뒤로 숨겼다.
「나도 저렇게 되었을지도 몰라.」
진혁은 그 모습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당연히 마리오를 도와주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내 부하’인 이 녀석이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기가 죽어 있으니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쓰러지지 않았잖아. 그러니까 괜찮지.」
진혁이 짧게 말했다. 길게 위로할 필요도 없다.
그 말을 들은 마리오는 떨던 손도 멈춘 채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우와.」
임진혁은 다시 한 번 마리오가 이해하기 쉽게 말해 주었다.
「그게 네 실력이야.」
반면에 브라이언은 마리오가 왜 저렇게 반응하는지 궁금해했다.
「왜 우와야?」
「아니, 진혁이가 날 칭찬하는 거 처음 봐서.」
「칭찬은 아니다. 사실을 말한 것뿐이지.」
마리오는 눈을 크게 흡하고 떴다. 그는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외쳤다.
「그게 칭찬이라고! 크흑, 끅.」
마리오는 끅끅끅 소리를 내며 제 입을 가렸다. 그더니 제 허리를 직각으로 꺾어서 배를 부여잡고 웃어젖혔다.
「아하하, 아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얘는 왜 갑자기 이래?」
친구들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뒤로 물러나 있던 앨리슨이 달려왔다. 그녀는 마리오를 부축해서 뒤쪽으로 물러나게 했다.
「마리오, 진정해.」
브라이언은 진혁을 재촉했다.
「진혁아, 우리는 저쪽으로 가자.」
「…그래」
그 말 한마디가 뭐라고, 그렇게 듣고 싶었을까.
휴게실 안쪽에는 옷을 갈아입거나 할 수 있게 비어 있는 개인실이 준비되어 있었다.
앨리슨은 마리오를 개인실로 끌고 가다시피 해서 데려갔다. 낡은 가죽 소파에 마리오를 앉히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앨리슨이 그렇게 현실 감각을 일깨워 주려고 시도하는 동안 마리오는 흐느끼는 것처럼 웃었다가 고개를 들었다가 흔들거나 했다.
격렬하게 흥분한 상태였다.
앨리슨은 이전에도 마리오가 이런 식으로 흥분한 것을 본 적이 있어 당황하지 않았다.
‘좋아하던 여자애한테 고백받은 날처럼 괴상하게 구네. 그게 그렇게 좋았나?’
「마리오. 마리? 마리! 정신 차려. 아무리 좋아도 인간처럼 행동해, 다른 사람들이 오해한다고.」
학창 시절에나 부르던 애칭을 부르며 앨리슨이 위로했다.
「그냥 인정받은 거 같아서. 그게 너무 좋아서 그랬나 봐. 쿨쩍.」
「그럼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되지 왜 그렇게 갑자기 드라마 퀸처럼 반응해?」
「감격해서?」
앨리슨이 휴지를 내밀었다.
「콧물이나 닦고 말해.」
「살다 보면 감동해서 콧물이 다 날 때도 있는 거야.」
「두 번 감동했다간 아주 눈물까지 좍좍 뽑겠네. 임진혁 쉐프를 존경하는 건 알겠지만 그렇게 칭찬 한마디 들었다고 울 정도인지는 몰랐어.」
「진혁이가 진짜 열심히 살아.」
「그렇겠지, 아니면 엄청난 천재거나.」
「그런데 나는 사실 그렇게까지 열심히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한 번 보면 대충 익히니까… 형 하는 만큼만 하자, 하고 따라 하면서 살았는데. 그래도 빵 만드는 건 재미있고 다들 잘한다 잘한다 해주니까 신나게 해 왔단 말이야? 그런데 지금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닌데 훨씬 잘하는 사람이 나타나니까 자존심이 확 상하더라. 내가 이것보단 좀 더 나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가 나 자신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본 느낌이었어.」
느닷없이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하자 앨리슨이 마리오의 콧방울을 살짝 잡아 비틀었다.
「그래, 그래. 너 잘났다는 건 잘 알았고, 나 유튜브 기획은 확실하게 컨설팅해 줘. 그렇지 않으면 직장 그만둔 게 너무 아깝잖아.」
「아까 진혁이가 제안한 건?」
「조건도 들어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바로 결정해. 이야기를 해 봐야지 알지.」
「앨리슨, 너 이야기도 안 들을 거잖아.」
「뭐, 네가 경외심을 갖고 있는 건 알겠지만 나한테는 그냥 네 회사 상사일 뿐인걸. 일적으로 얽히기로는 곤란하다고. 내가 들어가면 또 너하고 관련된 일을 할 수도 있고, 내 채널을 운영하는 게 어려워질 수도 있으니까.」
「그럼 너는 네 제과제빵 채널을 만들고 그걸 운영하는 게 목표인데, 괜히 회사에 입사했다가 회사 채널을 운영하고 나랑 같이 일하게 될까 봐 걱정하는 거야?」
「그런 것도 있고 이런 것도 있지. 처음에는 너한테 도움을 좀 받더라도 내가 원하는 채널을 만들어가고 싶으니까. 투자를 받으면 영향을 받게 되잖아. 내가 눈치도 보게 되고.」
탈의실 안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저 멀리 휴게실에 서 있는 임진혁에게 아주 잘 들렸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게 확고하게 있는 사람이군. 더 좋은데? 마리오도 아주 잘 다루고.’
그는 앨리슨을 어떻게 스카웃하면 좋을지 조건을 계산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