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4화
이변은 없었다.
예선 심사에서 이름이 꽤 알려졌던 후보들은 전부 본선 진출에 이름을 올렸다.
「좋아, 심사는 여기까지 하자고.」
오후의 예선 심사까지 마치고 나서야 최종결정이 될 테지만, 현재까지는 그러했다.
「자, 그럼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이번에도 도시락이야?」
「샌드위치 좀 만들지.」
「허, 참 불만 많군. 주면 주는 대로 먹어.」
심사위원들이 몰려가는데 한 명만 일어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아서가 물었다.
「제프, 안 가?」
「잠깐만. 난 생각해 볼 게 있어.」
「뭐, 알아서 해라. 먹든지 말든지.」
제프리 디버는 자리에 앉아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는 아까 맛본 케이크에 대한 궁금증을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사실은 다른 이들의 케이크를 심사하는 동안에도 머릿속 한구석에 그 의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도대체 케이크를 어떻게 세운 거지. 아무리 리치 후르츠 케이크라고 해도 그 정도 높이에서 서포터도 없이 고정될 리가 없는데. 커팅할 때도 분명히 아무것도 없었고.’
이것저것 생각해보았지만,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제프리 디버는 오후 팀 심사를 하는 도중에도 내내 심사에 집중하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쫓아가서 따져 묻고 싶군.’
그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심사위원이 참가자를 직접 찾아가서 물어볼 수는 없다.
‘케이크의 질감을 보면 그분에게 사사받은 게 분명해. 오랜만에 그분께 연락을 해보고, 정식으로 소개해 줄 수 있는지 여쭈어봐야겠어.’
제프리 디버는 실비안 웨인스톡의 스타일을 아주 잘 알았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실비안에게 연락을 하였다.
「실비안 쉐프님, 혹시 통화 가능하십니까.」
「제프! 한창 심사 중일 텐데 전화를 하네?」
「예, 무슨 일인지 알고 계실 텐데요. 이곳에 제자를 보내셨죠? 얼마 동안이나 키우셨습니까.」
「뭐, 네가 지금 나한테 추궁을 하는 거니?」
「아뇨, 아뇨. 아닙니다. 너무 잘 하니까 궁금해서 그렇지요. 어디서 그렇게 재능있는 쉐프들을 찾아내서 길러내시는지 알고 싶을 정돕니다.」
제프리가 황급히 정정했다. 그는 실비안 웨인스톡의 심기를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실비안이 전화기 너머에서 깔깔대며 웃었다.
「뭐, 세상 어디에 유능하고 천재적인 제자들이 쏟아져 나오는 샘이라도 있는 줄 아니? 그런 게 있으면 내가 벌써 찾아갔지.」
「그런 건 아니고요, 제가 여쭤보고 싶은 건.」
하지만 슈가 크래프트의 대가는 아서나 안토니오처럼 제프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멋대로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임 쉐프는 내가 찾아낸 게 아니야, 그쪽에서 날 초빙했지.」
「예?」
제프리 디버 역시 뉴욕 제과제빵협회의 회장으로 꽤나 잘 알려져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 역시 행사에 실비안 웨인스톡을 초빙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녀는 다른 쉐프들에 비해서 월등히 몸값이 비싸다. 실비안을 한 명 부르는 비용이면 다른 페이스트리 쉐프를 세 명은 부를 수 있다. 그러니 최고의 행사가 아니고서야 굳이 그녀를 초청하지 않는다.
「돈이 많은가 보군요.」
「자기 제과제빵 체인을 갖고 있다고, 성공한 사업가야. 미국에도 지점이 꽤 있을걸, 자네도 알 텐데?」
「예? 전혀 들은 바가 없는데요.」
「왜 그, 해링턴 클리닉에 입점한 브레드 카페 있잖나.」
「환자들한테 좋다는 그 빵이요? 듣긴 들었죠. 하지만 거긴 우리같이 대회용 빵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아.」
「거기가 임진혁의 사업체야.」
「젊은 나이에 크게 성공했군요. 돈을 얻었으니 이제 명예를 얻기 위해서 대회에 나온 건가?」
「특별히 공명심에 불타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럼 벌써 ‘물엿’을 발표했겠지.」
「‘물엿’이요?」
「아.」
「말씀해 주시죠.」
「…뭐, 비밀로 할 필요는 없다고 했으니 말해주자면 말이지. ‘물엿’은 엿이란 걸 액체 형태로 만든 거라고 했어, 원래는 캔디 종류인데, 아주 얇고 투명하게 만들어서 바르면 어떤 거라도 단단하게 붙여주지. 슈가 크래프트에 쓰기도 좋고, 케이크를 붙이기에도 좋아. 정말 최고라니까.」
「뭐라고요?!」
「정말로 엄청난 발명품. 유명해지면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면 그거만 팔아도 될걸. 그런데 그냥 자기 쓸 만큼만 조금씩 만들어서 쓰겠대.」
「…명예도 돈도 관심이 없는 장인 타입이군요.」
「그렇지, 그냥 자기가 만들고 싶은 케이크를 만들면서 즐거워하는 청년이야.」
「그런 장인 타입은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쉽지 않은데. 아무리 실력이 좋으면 뭐합니까, 혼자 고집부리다 보면 망하는데.」
「그래, 그래. 우리 제프가 그러다가 망했지?」
「….」
「하지만 말이야, 정말로 실력이 월등히 뛰어나면 망하기도 어렵다고.」
「실비안 쉐프, 그 청년을 저에게 소개해줄 수는 없겠습니까?」
「왜?」
「물어보고 싶은 게 좀 있어서요.」
「아, 뭐 소개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말이야, 하나 알고 있어야 할 게 있어.」
「예?」
「진혁 쉐프에게 물어보고 나서 괜찮다고 하면 소개해 줄게.」
「제자 아니었습니까?!」
「처음에야 그렇게 만나긴 했는데 말이야, 제자라기보다는 같은 길을 걷는 동지 같은 느낌이거든.」
「!!」
「제프 네가 맘은 착할지 몰라도 말은 엿같이 하잖니? 그러니까 함부로 소개해줄 수가 없어요.」
「실비안 쉐프!!」
「설령 내 제자라고 해도 내가 일방적으로 소개해 줄 수는 없지. 상대방 의사를 확인하는 건 기본이잖아. 너 그러다가 제니스에게도 이혼당하지 않았니?」
「실비안 쉐프, 말이 심하십니다! 그거랑 이건 상관없잖아요.」
「또 허니한테 젤리 만들어 준다고 이상한 삽질하는 거 아니지?」
「이상한 삽질은요. 제가 만드는 젤리가 제니스가 만든 것보다 더 맛있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인데요.」
「핸드메이드 젤리 맛 따위에 집착하지 말고 허니가 좋아하는 걸 생각하라고. 넌 항상 쓸데없는 데 신경 쓰느라 정말 중요한 걸 놓치는 경향이 있어.」
「…임진혁 쉐프가 소개받고 싶다고 한다면 제 연락처를 주세요, 실비안 쉐프.」
「그래, 다음에 보자고.」
「예, 쉐프.」
전화를 끊은 후에 제프리는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제니스 녀석, 도대체 실비안 쉐프한테 무슨 얘기를 한 거야?’
안타깝게도 이혼한 아내와 실비안 쉐프는 지나치게 친하게 지냈다.
아내 덕분에 실비안 웨인스톡 쉐프와 친해졌지만, 덕분에 이혼하고 나서는 더 어색해졌다.
‘내가 한창 실비안 쉐프와 함께 케이크를 만들 때도 이 정도로 인정받지는 못했는데. 소개받게 되면 대체 그 물엿이란 건 뭔지 물어봐야겠어.’
「허니가 좋아하는 곰 모양으로 키 높이 젤리 치즈케이크를 만들어 주겠어.」
그는 굳게 결심을 다졌다. 아까 실비안 웨인스톡 쉐프가 언급했던 ‘딸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새까맣게 잊어버린 후였다.
◈ ◈ ◈
심사위원 중 한 명이 풀리지 않는 궁금증 때문에 고민에 잠겨 있는 동안, 오전 예선 참가자들은 심사 결과를 기다리며 휴게실에 있었다.
케이크 제출이 끝나고 휴게실로 들어오자마자 브라이언은 바로 마리오에게 달려갔다.
「마리오!」
「브라이언. 걱정 많이 했어?」
마리오는 긴장이 풀렸는지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그래도 안 떨어졌어, 흐흐.」
진혁이 말했다.
「그래.」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케이크도 종류별로 다 만들어 볼 걸 그랬어. 진짜 할만한 건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하필 그게 나오냐. 어깨너머로 대충 봤던 걸 따라 하니까 마음대로 잘 안 되더라.」
「그래, 그냥 내가 해줄 걸 그랬나 봐.」
마리오의 보조인 앨리슨이 끼어들었다.
「아니, 그건 내가 해야지. 그게 내 실력이니까.」
묘한 데서 고집을 부리는 마리오였다.
「내가 할 줄 아는 건데 네가 해주는 거면 괜찮아. 그런데 내가 모르는 걸 보조가 해주는 건 비겁하잖아.」
「뭐,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다.」
브라이언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루이스는 안 왔네.」
「파리 쪽에서 미팅이 있다고 하던데, 슬슬 미팅이 끝나긴 했을 거야.」
마리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소파에 기대었다.
「으, 그래도 진짜 끝났다! 제대로 제출도 했고, 무너지지도 않았어. 허들을 하나 넘은 기분이야.」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래? 아직 대회는 시작하지도 않았잖아.」
「사실 진혁이 네가 출전하는 시점에서 이미 아, 가능성이 없다 라는 생각을 했거든. 마음가짐부터 완전히 지고 들어간 거야.」
「그런데?」
「그래도 그렇게 지는 건 싫잖아. 내가 얼마나 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어.」
마리오는 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신나 보였다. 브라이언은 마리오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마리오. 그래서 어때, 보여주고 싶었던 걸 충분히 보여준 거 같아?」
「흔들흔들하는데 안 넘어졌잖아? 그 정도면 된 거지. 어때, 진혁아. 나 잘 했지?」
‘괜찮은 척하기는.’
브라이언은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지만 진혁은 알 수 있었다. 마리오의 심장이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혁은 문득 무림초출(武林初出)의 첫 발걸음을 떠올렸다. 아무리 무공이 고절하건 내공이 깊건 상관없다. 첫 싸움과 첫 살인은 선명한 기억으로 강하게 남는다.
‘첫 싸움을 마치고 살아남은 이들에게 뭐라고 해줬더라?’
그는 가라앉은 옛 기억을 조금 떠올려, 마리오에게 말해 주었다.
「그래, 잘 했어.」
「…!!」
마리오는 울지 않았다. 그냥 코를 한번 훌쩍거리더니 등을 휙 돌렸다.
「난 오늘 오후에 촬영할 영상 콘티 기획해야 해서 바빠.」
뜬금없이 자기 계획을 주절거리더니 정말로 구석으로 가 버렸다. 하지만 어깨가 떨리는 모양을 보면 영상을 기획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영상 기획은 무슨, 아직도 방송 놀이를 할 생각이 드나? 지금 이런 상황에?」
브라이언이 그쪽으로 따라가려고 하자, 진혁이 말렸다.
「그냥 혼자 울게 내버려 둬.」
「뭐? 쟤가 지금 울고 있다고?!」
「소리 안 들려?」
「안 들려. …진혁 쉐프는 귀도 좋구나.」
「젊어서 그래, 젊어서.」
「젊기는 무슨!」
브라이언이 발끈했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데 앨리슨이 끼어들었다.
「진혁 쉐프님은 정말로 마리오를 잘 이해하고 있군요. 브라이언 쉐프님도 잘 챙겨 주고 계시구요. 겉으로는 활발하고 씩씩해 보여도 외로움을 좀 타는 애라서 걱정했는데, 두 분처럼 좋은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브라이언이 눈을 깜빡거리며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하는데, 진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는 친구라고 할만한 사이는 아니….」
브라이언은 임진혁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앨리슨 쉐프님은 마리오하고 프랑스에서 만났다고 하셨죠?」
「예, 같은 스승님에게서 빵 만들기를 배웠죠. 그리고 저는 파리의 빵집에 취업했고, 마리오는 한국의 학교에 진학하면서 헤어졌습니다. 오랜만에 마리오에게 연락이 왔는데, 대회 참가 시에 보조를 해 달라고 하는 거예요! 어찌나 깜짝 놀랐는지 몰라요.」
‘아까 보니까 손재주도 좋은 편이고 눈치도 있던데, 성격도 좋군. 이 사람도 데려오면 되겠다.’
임진혁이 눈을 빛냈다.
「앨리슨 씨, 지금은 어디서 일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