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1화
◈ ◈ ◈
무대를 촬영하는 카메라들은 저마다 다른 곳을 비추었다.
은빛으로 눈부시게 빛나던 스패츌러가 점차 크림에 뒤덮이는 과정.
울퉁불퉁하게 솟아있던 크림은 스패츌러가 지나간 다음에는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다리미에 다려진 외출용 셔츠처럼 구겨짐 없이 순백의 순수함을 뽐내는 케이크들.
진지한 페이스트리 쉐프들의 표정, 이마에 송골송골 흘러내리는 땀,
그 와중에 천천히 기울어져 가는 케이크.
「저기 저 사람 봐.」
「이미 틀렸네.」
「괜히 내가 떨려.」
관객석에는 기자들과 일반인들 중 추첨에 선정된 이들이 있었다.
케이크가 천천히 기울어지는 광경.
이제까지 천 개의 케이크를 만들었건, 만 개의 케이크를 만들면서 연습했건 상관없다.
지금 여기서 만든 케이크가 무너진다면 그걸로 끝이다.
기본조차 모르는 페이스트리 쉐프.
어린 나이에 출전했다는 점은 면죄부가 되지 못한다.
예선전 또한 전 세계에 송출되고 있는 지금은 더욱더 그렇다.
임진혁은 마리오의 상황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런.”
진혁처럼 케이크의 내부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무림 고수가 아니더라도 곧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응?」
조리대를 청소하고 있던 브라이언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생중계되고 있는 화면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마리오의 사탑인가….」
진혁이 물었다.
「브라이언, 너라면 어떨 것 같아?」
「죽고 싶겠지.」
「음.」
「그래도 저렇게 둘 수는 없잖아.」
같은 페이스트리 쉐프로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브라이언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틀렸다는 건 알아도 말이지. 신에게라도 빌 수밖에 없잖아.」
「신이라….」
이미 탈락은 기정사실화되어 있다.
더블 레이어 케이크 위에 더블 레이어 케이크를 올리면서 안쪽에 나무젓가락으로 기둥을 세워 꽂았다.
진혁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평범한 화이트 아이싱으로 감싼 케이크 바깥에는 국기 무늬가 팝아트처럼 그려져 있었다.
태극기의 태극 문양 그리고 건곤감리의 검은 줄무늬다.
하지만 태극기와는 문양의 크기도 위치도 달랐다.
아디다스 삼선 줄무늬를 가로로 그어놓은 것처럼 검은 줄 세 개가 나란히 케이크를 둘렀다. 중간 중간에 하얗게 끊긴 부분 사이사이 자그마하고 귀여운 태극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태극기의 무늬를 패턴화해서 귀엽게 변형했다.
‘녀석이 센스는 있다니깐.’
위층에 있는 케이크 역시 하얀 크림 아이싱을 덮었다. 언뜻 보면 아무런 무늬도 없어 보인다.
아래층 태극기가 가로로 놓인 것에 비해서 수수해 보이는 상단의 케이크에는 비밀이 숨어있다.
폴스미스(Paul Smis)라는 브랜드는 붉은색과 흰색, 푸른색과 노란색, 밝은 하늘색과 검은색 등 다양한 색깔을 언뜻 보면 랜덤해 보이는 패턴의 세로줄로 장식한다. 겉면은 검지만 내부는 무지개처럼 밝은 총천연색이다. 촌스러울 수도 있는 색 배합에 날씬한 세로줄 무늬로 통일성을 주어, 오히려 세련되어 보이게 한다.
강마리오는 위층의 케이크 내부에 그 세로줄 무늬를 가져왔다.
단지 굵기에 조금 변화를 주었고, 색깔은 세 가지만 썼다.
붉은색과 흰색, 파란색이다.
제멋대로 굵어졌다가 가늘어지는 삼색기의 패턴.
강마리오의 의도를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이것이 과연 프랑스의 국기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겉모양을 검게 하지 않고 희게 한 이유도 알 수 있다. 국기의 뒷면은 흰색이니까-다. 일부러 겉을 단순하게 장식하고 내부를 화려하게 만들었다.
‘맛도 괜찮아 보이는데.’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임진혁과 함께하는 동안 강마리오의 케이크 역시 발전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눈부시게 비상하는 동안, 뒤에 뒤처져 있는 것을 즐기는 이는 아무도 없다.
진혁이 아낌없이 전수한 기술.
식감과 다양한 맛을 살려 케이크를 디자인하는 기획.
무던하게 받쳐주는 담담한 맛과 달콤한 맛, 오렌지처럼 새콤한 맛과 커피처럼 씁쓸하면서도 향긋한 뒷맛.
자신이 주로 즐기는 맛을 케이크에 재현해내는 실력.
아래쪽에 있는 버터크림이 바닐라빈을 넣은 화이트 초콜릿 아이싱인데 비해서, 위쪽에 있는 크림은 코코넛 버터크림이다. 내부에 샌딩한 붉은색과 파란색, 흰색은 케이크 시트에 국한되었다. 케이크 시트는 당근 케이크다. 크림은 전부 순백의 버터크림으로 통일했다.
‘흠.’
진혁은 케이크의 내부를 살펴보았다.
마리오는 가운데에 두 개의 케이크를 관통하는 서포터를 세우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유감스럽게도 케이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지나치게 얇은 빨대를 넣었다. 그 빨대는 이미 아슬아슬하게 부러져 있었고, 케이크 시트와 크림이 위쪽 케이크의 무게를 지탱하는 중이다. 아래쪽이 푹 꺼졌다.
‘나라면 살릴 수 있지.’
하지만 지금 이런 식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과연 마리오에게 도움이 될까?
진혁은 이 제과제빵 대회에 임하는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강마리오 말고도 수많은 쉐프들이 저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자신의 케이크를 완성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마리오 녀석, 도움이 필요한 건가?」
사자는 자신의 새끼를 절벽에서 떨어뜨린다고 한다.
「나라도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주고 싶다.」
「가서 케이크라도 받쳐 주던가?」
브라이언이 정색했다.
「다른 사람의 케이크에 손을 대면 실격이지! 마리오만이 아니라 너도 실격이 된다고!」
「아, 다른 팀이었지.」
「….」
브라이언이 입을 벙긋거렸다. 그 이야기를 무시한 채 임진혁은 턱을 괴었다. 그의 케이크는 완성된 지 오래다.
‘저거 무너지면 울겠네, 울겠어.’
◈ ◈ ◈
「예선 케이크 심사를 시작하겠습니다. 키르기즈스탄의 리디아 쉐프, 케이크를 가지고 앞으로 나와주세요.」
「네.」
쉐프들이 한 명씩 카트를 밀고 심사위원의 앞에 케이크를 가져다 놓았다.
호평을 받은 이는 밝은 표정으로 빈 카트를 밀면서 돌아왔다.
세 명, 두 명, 한 명.
마침내 강마리오의 차례가 되었다.
「신이시여, 제발 무대에 나가는 순간까지만 버티게 해 주세요.」
앨리슨이 짧게 성호를 그었다.
무너질 것 같은 케이크와 무너진 케이크에는 차이가 있다.
「고마워, 앨리슨.」
섣불리 건드리면 더 빨리 무너져버릴지도 모른다. 마리오는 떨리는 양손으로 케이크가 고정되어 있는 케이크 바닥 판을 잡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케이크를 들어 올리려 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었다.
「오, 세상에!」
「쯧쯧.」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아!」
관객석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리오는 놀라운 집중력으로 케이크를 들어 올렸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케이크라는 점을 고려해 살짝 우측을 높게 들었다.
한순간 기우뚱했던 케이크는 곧 자연스럽게 안착했다.
「어, 이거. 무너지지 않았어.」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케이크를 응시했다. 여전히 피사의 사탑처럼 미묘하게 기울어져 있으나, 아까처럼 위태위태하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조금 전보다 오른쪽으로 덜 기울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마리오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흑.」
그는 황급히 쉐프복 소매로 눈을 가렸다.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어 드는 모습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훌쩍이는 소리는 마이크를 통해 모두에게 생중계되었다.
케이크가 견고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마이너스 점수를 받을 것은 예정되어 있다. 그러나 제출하기 전에 케이크가 무너진다면 심사위원의 심사를 ‘받을 수조차’ 없다. 기본 심사 자격인 ‘높이’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흐으으으.」
심사위원들을 비롯해서 예선대회장에 있는 사람들 모두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짧은 시간 기다려 주었다.
<마리오!>
진혁이 어디선가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아, 응.”
마리오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카트를 밀어 심사위원 앞으로 향했다.
「바닐라빈 화이트 초콜릿 케이크와 코코넛 버터크림 케이크입니다.」
「그럼 강 쉐프, 서빙해 주세요.」
◈ ◈ ◈
파리에서 대회 실황 중계를 보고 있던 루이스는 혀를 찼다.
“마리오 녀석 완전 정신이 나갔구만. 오늘 끝나면 또 펑펑 울겠네.”
프랑스에서 자라서 그런지 감정 표현에 솔직한 동생은 웃기도 잘 웃고 울기도 잘 했다. 그렇다고 해도 저런 국제대회에서 눈물을 보이다니, 평생 흑역사로 박제될 일이다.
“빨대 얇은 거 쓸 때부터 불안했는데, 멍청하긴.”
이론은 알지만 실제로 해보지 않아서 저지른 실수다.
옆에서 같이 대회를 보고 있던 어머니가 웃었다.
“루이 너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동생이 걱정되는 거잖니?”
“저렇게 멍청한 짓을 할 줄 알았으면 아예 관객 참여로 신청할 걸 그랬어.”
“지금이라도 가면 되지 않니?”
어머니가 스마트폰으로 검색한 항공편 일정을 내밀었다.
“어디 보자, 경유 없이 출발하는 직항편이 2시간 뒤에 샤를 드 골 공항에 있네.”
“여기서 뉴욕까지는 여덟 시간이 넘게 걸리잖아!”
어머니는 지갑에서 블랙카드를 꺼내 들었다.
“엄마가 항공권 사 줄게.”
“….”
“난 내일 아침에 비즈니스 미팅 있어서 못 가. 너라도 가서 좀 같이 있어 줘. 이불 뒤집어쓰고 펑펑 울다가 땀띠라도 생길라.”
“…항공권 정도는 내 돈으로 사도 돼.”
루이스는 급하게 뛰쳐나갔다. 파리를 방문한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3일 정도 휴가를 냈던 참이다. 이 휴가는 동생을 보러 뉴욕에 갔다 온다면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래도 루이스는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았다.
어머니는 빙긋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동생을 엄청 아낀단 말이야. 내가 아들들은 잘 키웠지.”
◈ ◈ ◈
마리오는 나이프를 밀어 넣어 케이크를 잘랐다. 진혁만큼은 아니지만 깔끔한 솜씨였다.
「코코넛 버터크림 당근 케이크 먼저 드셔주세요.」
눈가가 새빨개졌지만 떨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대기실에 있는 마리오의 스마트폰에는 짧은 문자가 도착했다.
[형 지금 간다].
머나먼 파리에서 친형이 날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마리오는 애써 웃음을 띄웠다.
「감사합니다.」
심사위원들은 눈앞에 보인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겉은 희고 안은 빨갛군요.」
「안쪽에 이런 원색을 집어넣은 이유가 있나요? 케이크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저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에서 오래 자랐습니다. 한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이방인입니다. 그래서 저에게서 숨길 수 없지만 드러나는 그 면을 케이크를 통해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당근 케이크가 진한 브라우니 같네. 아주 촉촉하게 아주 잘 구워졌어요.」
「코코넛 가루를 겉에 묻힌 게 아니라 안쪽 크림에 조금 섞었네. 왜 이렇게 했지요?」
「씹는 식감에 변화를 주고 싶었습니다. 촉촉한 당근 케이크를 씹을 때 단조로울까 봐 그렇게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리오 쉐프. 자리로 돌아가 주세요.」
무사히 심사를 받을 수 있었다.
마리오는 돌아서면서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앨리슨이 다가와 마리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잘했어, 마리오.」
「으.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나.」
「일단 얼굴부터 닦자.」
또 다른 한국 부스에서는 브라이언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심사받긴 받았네, 다행이다.」
「뭐, 그렇지.」
진혁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브라이언이 물었다.
「걱정 안 해?」
「걱정할 게 뭐 있어.」
걱정된다면 행동으로 실천하면 된다. 진혁은 멀리에서도 마리오의 기울어진 케이크를 똑바로 세워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 주지 않았다.
‘어린애도 아니고, 자기 일은 스스로 해야지.’
「저거 무너지면 쟤 그대로 이 바닥에서 완전히 매장되는 거잖아.」
「에이.」
진혁이 웃었다.
「이번에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다음에는 그만큼 더 잘하면 되지.」
진혁은 마리오를 아낀다. 현대로 돌아와 꽤나 초반에 만났던 동갑내기 제과제빵사는 나름대로 성격도 있고 실력도 있는 녀석이었다.
절벽에 떨어뜨리고 기어오라고 하면, 덩굴이라도 붙잡고 아득바득 올라올 놈이다.
굳이 도와줄 필요가 없다.
‘무림대회에 출전한 제자가 이기라고 응원을 할 수는 있지. 하지만 대회장에 단검을 던져서 승부를 도와주는 건 안 돼.’
진혁은 강호의 도리가 전부 옳다고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회의 기본적인 규칙은 지키고자 했다.
「아, 벌써 우리 차례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벌써 임진혁의 이름이 불렸다.
「임진혁 쉐프는 케이크를 가지고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진혁은 아까 옮겨놓은 케이크가 실린 카트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는 집 앞 편의점에 다녀오는 것처럼 한가롭게 말했다.
「다녀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