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0화
젤리 호수가 굳어가는 동안, 진혁은 제일 중요한 작업에 착수했다.
「케이크 올린다.」
「오케이!」
이렇게 거대한 케이크를 받침대라곤 없이 쌓아 올리는 것은 보기만 해도 떨리는 일이다.
톨 케이크를 변형한 익스텐디드 헤이츠 케이크.
진혁은 능숙한 솜씨로 망설임 없이 크림을 샌드하고 과일을 넣었다. 딱딱하고 단단한 견과류 사이에서 설탕에 절인 과일들은 쫄깃한 맛을 비롯해 새로운 색감을 더해줄 것이다.
「흐아, 여기에 과일까지 넣으면 이거 더 무너지기 쉬운 거 아니야?」
서포터가 없다.
케이크가 무너질까 봐 걱정하는 브라이언에게 진혁이 짧게 대답했다.
「물엿을 사용하면 돼.」
「그 물엿 진짜 만능이네.」
브라이언의 표정이 밝아졌다.
「나도 그거 써서 이것저것 만들어 봐야지.」
「대회 끝나면 해 보라고.」
「흐흐, 알았어.」
임진혁은 말하는 동안에도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샌드한 크림 위쪽에 또 다른 케이크 시트를 착착 얹어갔다.
「휴우우우.」
마지막 케이크까지 얹고 나자 브라이언은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비로소 안심한 모양이었다. 얹는 도중에라도 무너질까 봐 조마조마했던 탓이다. 케이크를 쌓다가 무너지기라도 하면 이거야말로 수습할 수가 없다.
「이제 다 된 건가?」
진혁은 나이프를 들고서 씩 웃었다.
「케이크를 깎아야지.」
「깎다가 쓰러지면 어떡하지?」
진혁이 웃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나, 칼질은 잘해.」
「그거야 그렇지.」
실제의 백두산 모양이 어떤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가운데에 호수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있다. 진혁은 백두산 자체를 만든다기보다 백두산‘같은’ 느낌을 내는 데에 주력했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도 잘 모를걸.’
가장 최근에 본 산을 생각하며 다듬다 보니 산봉우리는 점차 숭산을 닮아갔다.
‘아차, 일단 호수는 가운데에 있어야지.’
별생각 없이 깎다 보니 너무 많이 깎았다. 이미 깎아낸 빵을 붙일 순 없으니 진혁은 가운데에 호수가 들어갈 부분을 파내기 시작했다.
‘이 가장자리에는 적당히 뭘 붙여 주자.’
「브라이언, 쿠키 반죽 좀.」
「어떤 쿠키?」
「카카오 마들렌.」
「…초콜릿이 아니고?」
「여기하고 안쪽 전부 다 엄청나게 달아, 그래서 일부러 카카오로 할 거야.」
「초콜릿이나 레몬 마들렌은 봤지만, 카카오 마들렌이라. 진작 이야기해주지.」
브라이언은 급하게 재료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진혁이 물었다.
「시간 모자라지 않지? 아니면 내가 할까?」
「아냐! 내가 할게!」
브라이언이 급하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쯤이야 어렵지 않지.」
◈ ◈ ◈
한편 기자석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제과제빵 매거진의 기자, 리암 에이든이었다. 파리 대회에서 진혁을 눈여겨보았던 기자다. 리암은 이곳에 아내 줄리아와 함께 와 있었다. 그는 줄리아를 재촉하며 말했다.
「저기 저, 한국 대표를 중심으로 찍어 줘.」
「나 일하러 온 거 아닌데.」
유능한 카메라맨인 줄리아가 남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녀는 배 부근이 헐렁한 원피스를 입고서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데이트하러 오는데 카메라 챙기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다.」
그녀는 불평하면서도 임진혁을 카메라로 촬영하기 시작했다.
찰칵찰칵.
줄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당신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사람이 뛰어난 실력은 아닌 거 같아, 기본이 안 되어 있어.」
「그럴 리가? 저 사람이 쿠프 드 몽드 파티쉐리 우승자인데. 그것도 최연소 참가자인데 말이야.」
「그건 알겠는데, 톨 케이크는 만들어 본 적이 없나 봐. 서포터를 하나도 안 넣고 만드는 게, 이따가 케이크 옮기는 시점에 전부 무너져 버릴 것 같은데.」
「뭔가 생각이 있겠…지?」
「생각이 없는 거지. 현대 제과제빵 기술로는 불가능하다고.」
줄리아는 하품을 했다. 부른 배를 어루만지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렇게 기본도 안 되어 있는 페이스트리 쉐프라니 실망이야.」
리암 에이든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아내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는 손을 내밀어 아내의 손 위에 얹었다.
「여보, 이 쉐프는 진짜라니까. 내가 초콜릿 쿠키 싫어하는데 그걸 맛있게 만들었다고. 정말로 맛있는 음식은-.」
하지만 줄리아를 설득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어이없어하며 남편의 말투를 따라 했다.
「싫어하는 음식과 좋아하는 음식의 구분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라고 당신이 기고했었지.」
줄리아가 눈꼬리를 올렸다.
「데이트하러 나온다더니 여기 와서 뭐 하는 짓이야. 휴가 내고 와서 일하고 있잖아!」
「진짜로 볼만한 가치가 있잖아, 저 손놀림을 보라고.」
「실황중계로 봐도 되잖아.」
「당신도 알잖아, 카메라가 내가 원하는 곳만 비추지 않는다는 걸.」
줄리아는 카메라를 남편에게 내밀었다.
「그럼 직접 찍어! 난 볼 만큼 본 것 같아.」
「아하하, 당신이 잘 찍잖아. 줄리 사진이 최고라고.」
줄리아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러다가 저 케이크 무너질 것 같단 말이야. 괜히 내가 불안해. 그러면 저 쉐프는 또 얼마나 상처받을 거고, 다른 사람들도 다 비웃을 거 아니야.」
리암이 아내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그는 사랑이 담긴 눈으로 줄리아를 응시했다.
「아, 그런 이유 때문에 자리를 뜨고 싶어 했던 거였어? …당신은 역시 마음이 따뜻해.」
「일어나면 안 돼? 센트럴 파크 산책이라도 하러 가자.」
「당신 나 못 믿어? 저 쉐프가 만드는 케이크는 무너지지 않을 거야.」
「리암, 당신이 아니라 저 쉐프를 못 믿는 거야. 저 정도 높이의 케이크는 절대로 서포터 없이 설 수가 없어. 지금은 멀쩡해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 내려앉을 수밖에 없다고.」
친구인 제임스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저 안에 피아노실을 박아놓았을 리도 없어. 만드는 과정도 특별한 게 전혀 없잖나, 기껏해야 케이크에 시럽을 바르는 정도? 그거야 당연히 하는 거잖나. 무너질 수밖에 없어.」
리암 에이든은 제임스의 이야기를 완전히 무시했다. 그는 두 손을 모아서 아내에게 빌었다.
「아니, 줄리아. 제발, 한 번만. 저 쉐프가 만드는 케이크가 어떤 모양이 될지 너무 궁금하다고.」
「바위산을 만들고 있잖아?」
「그래, 국기가 주제인데 바위를 만들고 있다고. 엉뚱해 보이지만 분명히 무언가 의미가 있을 거야.」
「겉모양을 저렇게 울퉁불퉁하게 하면 더 불안정할 텐데 말이야.」
홈 베이킹을 자주 하는 줄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는 이 케이크의 미래를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정성 들여 만든 케이크가 무너지는 광경은 정말이지 보고 싶지 않다. 정확히는 그렇게 케이크가 무너질 때, 젊은 쉐프의 꿈이 산산조각이 날 때 절망하는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좋고 예쁜 것들만 보기에도 모자란 세상인데 말이다.
리암 에이든은 열심히 아내를 설득했다.
「임진혁 쉐프는 그런 생각도 없이 케이크를 빌딩 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 쉐프가 레인보우 컬러로 사랑을 표현했을 때 얼마나 감동적이었는데. 케이크가 아니라 철학을 빚어내는 쉐프란 말이야.」
줄리아가 웃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일어날 수 없잖아.」
「좋아, 이거까지 다 보고 가면 내가 저녁에 스테이크 요리해 줄게. 당신이 좋아하는 레어로!」
「가니쉬도 얹어서?」
「그럼, 당연하지.」
「알았어.」
줄리아 에이든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서 눈을 감았다.
「저 쉐프님이 케이크 만드는 거 끝나고 옮기는 것도 끝나면 알려줘.」
「잠깐, 그때까지 눈 감고 있게?」
「무너지는 걸 내 눈으로 보고 싶지 않거든.」
줄리아가 담담히 하는 말에 리암이 투덜거렸다.
「…무너질 리가 없다니까.」
「알았어, 알았어.」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리암과 맞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옆에서 제임스가 불평했다.
「꼭 일하러 온 사람 옆에서 데이트해야겠어? 왜 여기로 데이트를 하러 온 거야? 모처럼 연차를 냈으면 분위기 좋은 오케스트라나 어디 다른 데라도 가지 않고.」
리암이 말했다.
「불만이면 자네도 연애해.」
「좋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주던가!」
「그건 알아서 해야지.」
「….」
제임스는 투덜거리며 다시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오전 예선 조의 시간은 이제 한 시간 남았다.
새벽부터 참가해 이른 시간부터 케이크를 굽느라 바빴던 예선 참가자들은 이제 슬슬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단순히 반죽 덩어리였던 케이크들은 오븐에서 구워진 후 놀랍도록 형태가 달라졌다. 사랑스럽게 부풀어 오른 케이크 위에 크림을 바르고 장식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퐁당을 씌우는 사람도 있다.
높이를 감안해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서포터를 사용했다. 전통적인 빨대를 사용하는 이들도 보였다. 아래층의 1단 케이크에 두 개의 1단짜리 서포터를 집어넣고, 2단 케이크 위에는 좀 더 굵은 나무 막대를 사용하는 사람도 보였다.
아예 케이크 자체를 블록처럼 쌓아 올리는 이 또한 보였다.
「저 사람은 되게 특이한 방식으로 올리네.」
제임스가 아는 척을 했다.
「그 사람 아니야? 레고 그룹에서 허가받아서 유일하게 레고 모양으로 케이크 만들어도 되는 사람.」
「아, 그 재벌 아들인데 빵 굽는 사람 말이지? ‘먹을 수 있는 장난감’을 만든다고 하잖아.」
줄리아가 눈을 뜨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확실히 먹을 수는 있겠지. 그런데 저렇게 크림까지 덧바르면 블록을 다시 분리할 수는 없잖아. 그러면 이미 케이크지, 레고 블록이라고 할 수는 없지. 진정한 레고라면 언제 어디서든 분해해서 다시 다른 모양이 되어야 한단 말이야.」
레고를 좋아하는 줄리아가 열변을 토하자, 제임스와 리암 둘 다 입을 다물었다.
줄리아는 할 말은 다 마치고 임진혁 쉐프를 보았다. 그는 이제 이제 최종적인 장식을 하고 있었다.
줄리아의 시선을 따라가던 제임스가 말했다.
「바위산 모양도 어지간히 특이하긴 하네. 그래도 내가 보기엔 덴마크 팀이 예쁜 것 같아. 크림이 있어야 케이크도 촉촉해지고, 내 눈에는 저 레고 모양 케이크가 이뻐」
「역시 알록달록한 원색이 한눈에 확 들어오지?」
「응, 케이크 자체도 안정적이잖아. 크림을 샌드하면서 블록을 촘촘히 쌓았으니까 어디서 흔들리거나 떨어질 리도 없고.」
줄리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양이 좀 단순하긴 한데 그게 매력적으로 느껴져. 레고 모양을 케이크로 보니까 귀엽네.」
「솔직히 조금 불공평한 것도 같지. 이 중에서 레고를 갖고 놀아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어? 익숙한 걸 보면 친숙하고, 반갑지. 그 호감은 분명히 점수를 매기면서 드러날 거고.」
제임스는 말하면서도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리암이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야, 우리 의견을 네 의견인 척하고 쓰면 어떡해?」
「네 이름 밝혀 줄까?」
「아니, 아니. 내가 왜 라이벌 잡지사의 기자 기사에 이름이 나와야 하냐고.」
「다양한 사람의 반응을 적는 게 좋지, 그럼 익명의 일반인은 어때?」
「크. 대신에 맥주.」
「콜.」
제임스와 리암이 장난치는 것을 보며 줄리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쪽 팀 케이크가 더 먼저 무너지겠네.」
리암이 줄리아의 검지를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메어리 쉐프 말이야?」
「메어리가 아니라 마리, 마리오.」
◈ ◈ ◈
마리오는 창백한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케이크를 응시했다.
방금 구워낸 케이크를 위쪽에 얹었는데, 살짝 기울어져 버렸다.
무너지지는 않았으나 피사의 사탑 같은 모양이 되어 버렸다.
「젠장!」
앨리슨이 물었다.
「어떻게 하지?」
다른 이들은 한창 마무리 장식을 하고 있다. 마리오는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