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9화
‘뭐야, 환청인가?’
마리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연히 진혁은 여기에 없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진혁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남았다.
<주방에서 손 멈추고 뭐하냐?>
진혁이라면 할 만한 이야기다. 함께 주방에서 연습하던 시절에, 몇 번이나 들었던 이야기다.
마리오는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그래, 나는 혼자가 아니야.’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버터와 소금을 믹서에 넣고 밀가루를 섞으며, 반죽이 걸쭉해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케이크가 되려면 밀가루는 글루텐을 형성하며 화학적 성질이 변해야 한다. 애초부터 밀가루를 넣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임진혁은 자신이 대회에 출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감히 네 주제에?’라는 말 같은 것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빨리 말하지 않아서 다른 보조를 구해야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진혁도 자신을 데려가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자신을 믿어주는 실력 있는 친구가 있다. 그리고 형과 어머니와 친구들, 채널 구독자들이 있다.
“후우우우우.”
마리오는 심호흡했다. 갑자기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출신이라고 해서 반드시 한국 국기만 만들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
「마리오…?」
「아, 앨리슨. 이제 정신 차렸어. 괜찮아. 나 붉은색과 파란색, 검은색 식용 색소 좀 섞어줄래?」
「검은색?」
「아 참, 흰색이 제일 많이 필요해.」
「오케이!」
그는 프랑스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니 한국 출신이지만 프랑스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의 제빵 역사는 모두 프랑스 빵으로 이루어져 있다.
깃발을 하나만 만들라는 법은 없다.
마리오는 신이 나서 주방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레몬은 여기에 있고, 블루베리는 여기. 그리고 생크림?」
루이스가 봤더라면 주방에서 먼지 내지 말라고 야단쳤을 만한 광경이다.
「잠깐, 잠깐. 마리오! 물건 가져오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반죽부터 봐줘. 믹서기가 계속 돌고 있다고.」
「오케이, 앨리슨!」
앨리슨은 개구리처럼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마리오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방금 전까지 풀 죽어 있더니 갑자기 신이 났네. 다행이다.」
◈ ◈ ◈
‘이제 알아서 하겠지?’
임진혁은 기를 퍼트려 주변을 둘러보다가 마리오에게 무심코 말을 걸어버렸다.
‘저놈은 궁금해하지도 않네.’
갑자기 어디선가 친구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면 의아해할 법도 한데, 의문이라고는 없이 그 말에 순순히 따른다.
키우는 강아지도 아니고, 말을 너무 잘 들어도 탈이다.
‘마리오, 넌 세상을 좀 의심할 필요가 있어.’
이번에는 가벼운 조언이었다.
하지만 이 목소리가 조언이 아니라 흉계였다면 어떨까. 설탕 대신 소금을 넣으라거나 해도 마리오는 그대로 따라서 곤란함에 처했을 것이다.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도 모르지. 뭐, 전음의 존재를 모르니 아예 의심할 수가 없나?’
내 직원들이 너무 순진하다. 세상을 의심할 줄 모른다.
진혁은 혀를 찼다.
그가 저쪽 건너편 부스 쪽을 응시하는 것을 보고서 브라이언이 말했다.
「마리오 녀석은 잘하고 있나 모르겠네.」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눈치가 없고 먹을 걸 밝혀서 그렇지 멍청한 건 아니니까. 알아서 잘 하겠지.」
「…욕하는 거지, 지금?」
「아닌데.」
「푸핫.」
「걔는 먹을 걸 주면 아무나 따라갈 것 같은 느낌이라… 하다못해 우리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도 아무거나 준다고 따라가지는 않아」
진혁의 신랄한 평가에 브라이언이 눈을 깜빡거렸다.
「둘이 친구는 맞나보네.」
그는 추가로 필요한 버터크림을 믹싱하고 있었다. 촉촉한 크림이 믹서기 안에서 회오리를 일으키며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노란색이던 크림은 블루베리 가루가 포함되며 점차 보랏빛으로 물들어 갔다.
「응?」
「진혁이 너는 가까운 사람 아니면 아예 관심도 없잖아.」
「브라이언, 복숭아 주스로 젤라틴을 만들어 줘.」
「아, 저번에 만들었던 거랑 같은 거로?」
「응, 사이즈는 이 정도로.」
진혁이 손가락으로 크기를 만들어 보이자, 브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컬러는?」
「투명한데 약간 은은하게, 아니다. 조색은 내가 할 테니까 젤라틴만 녹여 줘.」
「오케이」
시몬 리옹은 함께 밤을 새우면서 젤리를 만드는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투명한 젤리에 색소를 조금 넣어 굳힌 다음에 내부를 파내고 스포이드로 우유 젤리나 조색한 젤리를 넣어서, 하늘빛 호수 속에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만들 수 있다.
진혁은 이번에 그 기술을 활용해 케이크의 위쪽을 꾸밀 생각이었다.
「젤리는 케이크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지만, 케이크는 젤리를 지탱할 수 있지.」
그렇다면 위에 올리면 된다.
한참 동안 케이크를 만드는 데 집중하다가 진혁은 문득 브라이언을 돌아보았다.
「마리오 녀석 말이야. 톨 케이크를 만들어 본 적이 없나?」
브라이언은 그동안 봐왔던 라이브 방송을 돌이켜 보며 말했다.
「제과보다 제빵 쪽에 더 흥미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형 따라서 이것저것 하다 보니 아무래도 프랑스 정통 빵 위주로 갔을 거야. 그러니까 제일 잘하는 건 최소한의 재료로 빵 굽기인 것 같은데? 케이크류는 방송하면서 깔짝깔짝 건드려본 거고.」
「아, 유럽식 식사 빵 쪽이구나. 그래도 학교를 제대로 다녔으면 톨 케이크 만들기 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을 텐데.」
마리오는 손재주가 없는 편이 아니다. 애초에 유튜브를 시작했던 콘텐츠도 <누구나 예쁘게 만들 수 있는 제과제빵>이었다. ‘쉽게’가 아니라 ‘예쁘게’가 포인트다.
그는 처음부터 반복해 연습해 숙달된 동작으로 빵을 반죽해 구워내는 모습을 촬영해 올렸다. 단순한 프랑스 빵에 건포도나 말린 베리류 같은 요소를 첨가해보기도 하고, 최종적으로 구워낸 뜨거운 빵 위에 치즈를 얹어 멜팅 치즈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단순하고 투박해 보이는 프랑스식 빵을 희고 정갈한 접시에 예쁘게 잘라 내놓기도 하는 둥, 다양한 시도를 했다.
그래서 그가 만드는 빵은 ‘아주 예쁘다’는 평을 받았다. 마리오는 쉽게 만들지만, 일반인들은 만들기 어렵다. 호감 가는 외모와 빵 만드는 실력이 좋아서, 유튜브에서 금방 인기를 얻었다.
한국어 연습 겸해서 시작한 유튜브였다. 한국인 시청자들이 늘어나면서 마리오의 한국어 실력은 급상승했다. 인터넷에서 배운 한국어다 보니 가끔 뜬금없는 유행어를 말할 때도 있지만 말이다.
브라이언이 피식 웃었다.
「학교를 제대로 안 다녔으니까 그렇지. 막상 학교에서 이것저것 배웠을 때는 자기가 집중을 못 했다고 하더라. 뭘 집중을 못 해, 그냥 수업 안 듣고 놀러 다닌 것 같더만.」
「아, 그래.」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송에서 얘기하던데? 원래 한국의 제과제빵 교육 시스템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대. 한 명의 교수가 몇십 명을 한꺼번에 가르치느라 실습하면서 실패한 학생들을 일일이 봐줄 수 없다는 점이 싫었대. 도제식으로 1:1로 배우는 것과 너무 달랐다고 하더라고.」
「프랑스와 한국에서 빵을 배우는 방식이야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지. 그리고 한국은 무슨 표준 교육과정인가 뭔가 있어서, 교수들도 거기에 맞춰서 가르쳐야 한 대.」
진혁은 아버지가 실습 교수로 나가면서 들었던 이야기를 했다.
「혁신적인 커리큘럼이 있어도 그대로 할 수는 없고, 미리 설정한 기준을 따라가야 하는 거지.」
「흐음, 여하튼 그렇게 배우다가 학교에서 대표를 해달라고 해서 제과제빵 대회에 나갔대. 그런데 당연히 우승할 거라고 생각하고 방송에서도 언급해서 팬클럽이 따라왔는데, 어이없게 동갑내기한테 져버리고 나서 아예 한국 학교 다니는 걸 그만둬 버렸다고 했지.」
「아아.」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한참 안 보인다 했지.」
「너 맞지?」
브라이언이 진혁을 보며 말했다. 진혁은 대답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브라이언이 피식피식 웃었다.
「뭐, 자기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열심히 했다고 하던데.」
「걔는… 혼자 영화라도 찍는 건가.」
「너한테 전에 나이프와 앞치마 스폰서 들어왔잖아. 이번에 자기한테도 스폰서 들어왔다며 널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신나했어.」
진혁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날 왜 따라잡아.」
「응?」
「자기 스타일을 만들어야지. 마리오하고 나는 너무 다른데.」
일단 무공을 쓸 수 없다는 점에서 누구도 진혁의 베이킹 스타일을 따라 할 수가 없다.
「같은 체질을 가진 쌍둥이라도 자라면서 자신의 팔길이나 몸길이 그리고 성격에 따라서 적성에 맞는 무기가 달라지잖아.」
진혁은 실제 무기를 언급하였으나 브라이언은 철학적인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렇지, 제과를 할 건지 제빵을 할 건지부터 달라져야 하는데 말이지. 누구나 자신만의 무기를 갈고 닦는 게 중요해. 나도 그렇고.」
「…냉각기 좀 보고 올게.」
「그거 10분은 더 식혀야 할 텐데?」
브라이언의 말을 뒤로하고서 진혁은 스테인리스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투명한 젤리는 아직 덜 식었다. 그는 손을 뻗어 젤리가 담긴 그릇을 만졌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젤리는 순식간에 적당한 온도로 식었다.
「떠내기 도구 좀.」
「오, 생각보다 빨리 식었네. 다행이다.」
브라이언은 미리 설거지하고 말린 도구를 가져다주었다.
진혁은 젤리를 거꾸로 뒤집어, 다른 그릇에 담았다.
날카로운 긁개를 사용해 젤리의 속을 파냈다. 거침없이 파내는 그 손길을 보면서 브라이언은 눈을 떼지 못했다.
「무섭지도 않아?!」
「다 됐다.」
「여기 아까 조색해 놓은 것들.」
진혁은 일부 젤리를 떠낸 사이로 주사기 바늘을 찔러 넣어 붉은색을 주입했다.
투명한 젤리 사이로 선명한 붉은색이 마블링처럼 퍼져나갔다.
이때 이 색깔이 잘못된 곳으로 퍼져버리면 안 된다. ‘그러면 완전히 망쳐 버리는 거야. 시간이 모자라게 된다고.’
투명한 젤리를 여분으로 만들어두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혁은 꼭 하나씩만 만들었다.
‘투명한 젤리부터 다시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니까 미리 준비해놓자.’
브라이언은 바스락거리면서 뒤쪽에서 젤라틴을 새로 녹이기 시작했다.
「브라이언, 뭐해? 안 만들어도 된다니까.」
「아니,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괜찮아.」
브라이언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진혁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진혁은 언제나처럼 여유롭기만 했다.
「역시 크랜베리 붉은색은 조금 탁한 느낌이 있어.」
주사기의 실린지를 누르며 색깔에 대해 불평할 여유도 있었다. 자신이 직접 한 조색을 다시 보니 불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 정도면 자연색으로는 충분히 훌륭한 것 같은데.」
「아니, 조금 더 선명했으면 좋겠는데….」
투명한 젤리 속에 꽃이 피어나듯, 조그마한 붉은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났다.
한 송이 한 송이, 손톱처럼 조그마한 꽃망울이 톡 톡 터질 듯 열릴 때마다 브라이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혁이 고개를 들었다.
「브라이언.」
「응?」
「진짜 괜찮다니까.」
「어엉.」
「그거 그만 만들어도 돼.」
「…알았어.」
브라이언은 여분의 투명한 젤리를 만드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수정처럼 깨끗한 호수 안쪽에 붉고 푸른 꽃이 피는 것을 응시했다.
「하아아.」
마침내 진혁이 마지막 꽃까지 전부 만들어 놓고 나서야 브라이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응?」
「시몬 쉐프가 젤리는 진짜 잘 가르치는 것 같아.」
「본인은 못 하지만 말이지?」
진혁의 냉정한 말에 브라이언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풉, 시몬 쉐프한테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너밖에 없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