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8화
「그냥 각자 만들고 싶은 케이크 스타일이 달라서 따로 출전했을 수도 있지. 모든 사람이 다 자네처럼 인간관계가 별로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고, 제프리.」
「내 인간관계는 아주 정상적이야!」
안토니오는 다른 사람을 보고 있었다.
「저기 저, 폴란드 출신의 야콥을 봐. 인스타그램 팔로워만 백만 명이 넘는다고 하던데. 색깔 조색을 아주 잘하네.」
폴란드의 국기에는 단 두 가지 색깔밖에 없다. 덴마크의 국기가 붉은 바탕에 희고 가느다란 십자가 있는 것에 비해 폴란드의 국기는 아래 측 절반의 붉은색 그리고 위 측 절반의 하얀색, 두 개의 굵은 가로줄로 구성되어 있다.
폴란드의 건국자 레흐(Lech)는 흰 독수리가 황혼이 저무는 창공을 활강하는 것을 보고 이 깃발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흰색이 기쁨, 붉은색은 독립을 뜻하기 때문에 독립에 대한 기쁨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그는 레모네이드 바닐라 케이크를 구웠다.
이미 오븐에 넣고 나서 장식용 색깔을 만들었다. 주황색과 붉은색, 노란색과 주황색, 은은한 상앗빛 등 온갖 종류의 색깔을 조색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준비한 유화 물감 팔레트처럼 알록달록하고 아름다운 색깔들.
안토니오가 말했다.
「보기에 예쁜 것과 맛이 있는 건 다르지.」
「그거야 그렇지.」
제프리는 금방 야콥에게서 흥미를 잃었다. 그는 우승 후보인 캘러한이 무엇을 하는지 궁금했다.
「흐음, 캘러한은 마술사라는 이름대로 가는 모양이야. 트럼프 카드처럼?」
「캘러한의 반죽을 못 봤는데.」
「아, 내가 봤어. 붉은색 반죽과 푸른색 반죽을 따로 만들어서 섞고 있더군. 케이크 안에 유니언 잭을 만들려고 하는 건가?」
「그래. 케이크 바깥쪽이 아니라 안쪽에 만들려는 사람이 한두 명은 있을 줄 알았어. 그게 유니언잭일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제프리는 손뼉이라도 칠 기세였다.
유니언 잭(Union Jack)은 영국의 국기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의 국기를 합쳐 짙은 남색의 바탕에 흰색 줄, 그리고 십자와 X자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유니언잭을 사용하는 곳은 영국만이 아니다.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 피지 등 다양한 나라의 국기에도 유니언 잭이 들어있다.
「유니언 잭 같은 경우는 당장 뉴질랜드나 호주 팀에서도 만들어야 하니까, 잘 만들고 못 만들고가 명확히 드러날 텐데 말이지.」
「그리고 화이트 초콜릿을 템퍼링하고 있는데? 뭘 하려는 거지. 카드 모양으로 하나씩 하나씩 뽑고 있는데, 탑이라도 쌓으려는 건가?」
「균형 잡기가 어렵겠군.」
「아니, 그런데 트럼프 카드는 영국의 국기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잖아.」
제프리 디버가 턱을 괴었다.
「이 ‘국기’라는 주제 말인데, 너무 유럽 애들한테 유리한 것 같아.」
안토니오가 웃었다.
「하하하하.」
그는 심사위원들에게 배부된 유인물을 흔들어 보였다.
「여기 이 대한민국의 국기를 봐. 태극에 온갖 무늬가 있다고. 하다못해 터키? 그런데 프랑스나 네덜란드, 스웨덴은 뭐 이렇게 쉽냐고.」
독일계 쉐프 토바이어스가 화를 냈다.
「우리 독일을 유럽하고 같이 끌어들이지 말게나. 독일 국기는 어렵다고.」
「대충 아무거나 만들고 검은색, 파랑, 노란색을 처바르기만 하면 되잖아.」
「처바르다니! 그리고 노란색이 아니라 금색이야. 각 국기 모양을 그대로 만들면 되는 게 아니잖나. 그 국기가 형상화하고 있는 뜻을 만들어야지.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말게나.」
기학(旗學) 즉 깃발에 대해서 다루는 학문에서는 금색과 황색을 구분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독 독일에서는 황색이 아니라 금색이라고 명시한다.
1900년에 나치 정권은 과거 독일에서 쓰던 흑백금기를 폐기하고, 흑백‘적’기를 사용했다.
동시에 과거의 흑적금기의 금색이 겨자색이나 똥색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나치 정권에서 말하는 민족주의의 우수함을 설파했다.
히틀러가 패망한 후에 독일의 국기는 다시 흑백금기로 돌아왔다. 1950년대, 독일의 공식 재판소에서는 국기가 흑적금이 아니라 흑적황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모욕하는 것은 나치와 다름없다고 언급하며 불법으로 명시했다.
「실제 국기에 금가루를 뿌려놓은 것도 아니고, 금색이건 황색이건 상관없잖아.」
제프리의 투덜거림을 무시하고서 안토니오가 중재했다.
「각 나라의 국기가 담고 있는 뜻을 만들어 달란 말이야. 그러니까 국기가 단순할수록 더 유리한 건 아닐세.」
토바이어스 역시 제프리에게 답하지 않고 안토니오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 독일 국기라면 <단결과 개인의 자유>가 되겠지.」
아서 클라크는 양손에 깍지를 끼고서 대회장을 응시했다.
「이들이 어떤 것들을 만들어낼지 기대가 되는데.」
「빨리 맛보고 싶군.」
「아서, 맛을 보려면 최소한 앞으로 다섯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그래도 이번 예선은 시간이 짧은 편이네.」
제과제빵 대회에 따라서 시간이 다르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특히 시간이 길지 않았다.
케이크를 반죽해 구워내고 식히고 장식하는 과정만 해도 아무리 짧아도 한두 시간 이상 걸린다.
한 종류가 아니라 서너 가지 종류의 케이크 시트를 만들고 부재료를 이것저것 더 넣는다면 더 걸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주제에 맞게 세계대회 급의 디테일을 요구하는 장식을 만들면서 지금의 기준인 ‘높이’까지 맞추려면 확실히 더 시간이 필요하다.
「이번에 시간이 더 줄었죠?」
「예선 참가자가 늘었으니까.」
이전 대회까지는 10시간의 준비시간을 주었으나, 이번에는 예선에서 여섯 시간으로 시간을 줄였다.
각종 세계대회의 우승자들이 접수를 하면서, 오전과 오후 두 타임으로 나누어 진행하기 때문이다.
오전에 스물여섯 명의 심사를 마치고, 오후에는 또 다른 스물여섯 명의 심사를 할 예정이다.
아서 클라크가 말했다.
「저기 저 사람, 마시멜로 반죽을 완전히 망친 것 같은데.」
「아까 그 최연소 참가자 중의 한 명이지? 나이가 어려서 그런가?」
「실수를 하는 데 나이가 많고 적고가 어디 있겠어.」
「이름이 뭐였지? 메리?」
「아니, 마리오일걸.」
「게임 주인공 같은 이름이네.」
◈ ◈ ◈
강마리오는 한숨을 쉬었다. 슈 페이스트리 반죽은 그럭저럭 됐는데, 색깔이 이상했다.
‘성조기가 아니라 태극기를 만드는 연습을 해야 했는데.’
성조기(星條旗).
미국의 국기다.
좌측 위에 위치한 남색 사각형 안에는 50개의 흰 별이 있으며, 흰 바탕에 붉은 줄이 13개 그어져 있다.
그는 원뿔형 기둥 모양의 스티로폼 조형물을 세우고, 거기에 남색으로 조색한 캐러멜 시럽을 접착제로 써서 흰색 슈를 50개 붙였다. 하단에는 붉은색과 흰색 초콜릿을 가늘고 얇게 열세 개 뽑아내, 케이크의 가장자리에 링처럼 둘렀다.
그 케이크는 분명히 방송 때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난 여기에 미국 대표로 출전한 것이 아니잖아!’
어디까지나 한국 국적을 가지고서 한국의 대표 자격으로 나왔다.
그러니 미국의 국기를 만들어 본 경험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작 한국 국기를 해 볼걸.’
솔직히 말해서 한국 국기도 하려고 하긴 했었다. 마침 하얀 바탕이니 화이트 바닐라 케이크 위에 깔끔하게 붉고 푸르고 검은 가루들을 뿌려내면 된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은 고민해 보지를 않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방송용 콘텐츠니까 가능한 것이고, 이러한 대회에서 그런 케이크를 내놓을 수는 없다.
더군다나 높이도 맞출 수가 없다.
마리오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전에 대학교 대회 이후, 처음으로 하는 임진혁과의 정면 대결이다.
‘내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려줘야 하는데.’
그는 진혁의 곁에서 자신이 배워왔던 테크닉들을 떠올려보았다.
웨이퍼 페이퍼를 얇게 썰어내서 위로 길게 뽑을까?
야자수도 아니고, 국기와 관련도 없다.
그는 케이크부터 준비했다. 보조에게 부탁하지 않고 스스로 체를 쳐서 밀가루를 걸러내며 잠시 시간을 벌었다.
‘뭐부터 만들지. 음… 모양이 어떻게 되건 간에 대충 쌓다 보면 높이가 나오지 않을까?’
자신 있는 무화과 리코타 치즈 케이크.
이건 비교적 가벼운 편이니 위에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아래에는 단단한 케이크를 놓아야 한다.
‘파운드 케이크. 아냐, 그건 너무 단순해. 그러면 상큼하게 레몬을 좀 넣어서….’
마리오는 머리를 쥐어짰다.
예선에서 진혁과 마리오 둘 다 탈락할 수도 있고, 둘 중 한 명만 본선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
거의 80, 90% 이상의 확률로 임진혁이 본선에 진출할 것이다.
누구나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실력.
거기에 뒷받침하는 노력.
쿠프 드 몽드 파티쉐리의 우승은 거의 임진혁 덕분이었다.
너무나도 원하던 대회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지만, 다른 이들이 수군거렸다.
“혼자서는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운 좋게 버스 탔네, 버스 탔어. 남이 다 해줬잖아.”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서도 악플이 달렸다.
그래서 오명을 벗고 싶었다.
‘진혁이 없는 동안에 내 실력을 증명하고 싶었는데.’
처음에 대회 준비를 시작할 때에는 임진혁이 출전할 줄 몰랐다. 진혁과 함께 보조를 맞춰 나온 브라이언이 부러웠다. 그는 지금 바로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진혁의 옆에서 속도에 맞추어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고 있겠지.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이 바쁠 것이다.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대회에 혼자 나오려고 했을까?’
마리오도 진혁의 보조로 같이 참여하고 싶었다. 그는 진혁이 어떤 타이밍에 무엇을 부탁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제대로 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월드 페이스트리 챔피언십에 참석하기로 해서 신청서까지 냈는데 그 시점에서 취소하고 싶지 않았다.
가볍게 말했지만 정말로 가벼운 마음으로 대회에 나가기로 한 것은 아니다.
마리오는 그동안 놀지 않았다. 진혁을 떠올리며 잠까지 줄여가며 열심히 했다. 방송은 조금이라도 더 집중하기 위한 수단이었지 목적이 아니었다.
켜져 있는 카메라를 보면 임진혁 생각이 났다.
지금 어디선가 그 녀석이 나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가 보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잠도 거의 안 자고 연습하던 녀석.
마리오는 진혁과 달랐다. 평범한 사람이다. 누가 보고 있으면 열심히 하지만 아무도 보고 있지 않으면 빈둥거리고 싶고, 누워 있고 싶다.
그래서 하루에 열 몇 시간씩 라이브 방송을 하면서 연습을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케이크도 내놓지 못하고, 엉망진창으로 탈락하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그냥 싸가지없는 성격하고 재능만 타고난 줄 알았지. 그렇지만 걔 진짜 재능은 따로 있어.’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할 수 있다는 것도 재능이다.
마리오는 머리를 흔들고 싶었다.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팔짝팔짝 뛰고서 조리대에 머리를 쿵쿵 박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지금도 카메라가 보고 있어.’
임진혁 역시 이 무대 위 어딘가에 있다.
정확히는 바로 한 부스 건너에 있지만, 마리오는 긴장해서 그 위치를 듣지 못했다.
마리오는 앳된 얼굴에 미소를 띠며 아무렇지 않은 척, 카메라를 의식했다. 무대를 촬영하던 카메라가 쓱 지나간 다음에야 마음껏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옆에 서 있던 보조, 앨리슨이 물었다.
「마리, 괜찮아? 뭘 도와줄까?」
그는 아까 부탁한 체 치기를 끝낸 지 오래였다. 벌써 다음 지시를 해야 하는데 마리오는 손을 멈추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앨리슨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마리오를 보았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대한민국의 국기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더 막막했다. 대충 붉고 푸르며 검은 줄이 있다는 것만 안다. 지금 와서 국기를 찾아볼 수도 없고, 막막하기만 하다.
손을 놓고 있는 그의 머릿속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오.>
「진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