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6화
두 사람이 잡담을 나누는 동안 심사위원은 더 설명했다.
「그리고 ‘높이’입니다.」
「높이요?」
「제일 높으면 된다는 이야기입니까?」
참가자 중 누군가 질문하자 사회자가 설명했다.
「최소한 60cm는 되어야 합니다. 물론 높으면 높을수록 좋습니다.」
60cm.
일반적인 3층 웨딩 케이크로 구워내려면 특별한 구조가 있어야만 하는 높이다.
「크로캉부쉬를 만드는 사람이 많을까?」
「글쎄. 국기와 크로캉부쉬가 어울릴만한 나라가 있나? 미국?」
「음, 각 주를 크로캉부쉬로 형상화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브라이언이 물었다.
「진혁 너 한국의 국기를 케이크로 만들어 본 적이 있나?」
「내가 만들어본 적은 없지만 본 적은 있지. 디저트 서바이벌에서도 태극기를 케이크로 만들려고 한 사람이 있었잖아. 전에 쿠프 드 몽드 파티쉐리에서 일본 팀이 음양(陰陽) 앙트르메를 만들었잖아.」
브라이언이 바로 대답했다.
「티무르 페퍼와 바바리안 크림 케이크였지? 할라피뇨보다 더 매운 후추를 바바리안 크림으로 중화시키려고 했다던 거.」
「제대로 기억하고 있네.」
「응, 한국의 국기는 그 태극 모양이 들어가 있거든.」
브라이언이 양손으로 머리를 헝클었다.
「역시 미국 국기 쪽이 훨씬 만들기 쉬워 보이는데. 이건 마리오한테 너무 유리한 주제야.」
「걔가 크로캉부쉬로 미국 국기를 만들 거라고 생각해?」
「아니, 그게 아니야. 마리오 방송 못 봤어? 지난번에 애청자 리퀘스트 받아서 미국 국기 모양의 케이크를 만들기도 했다고. 이미 한 번이라도 만들어 본 것과 여기서 처음 만들어보는 것의 차이는 커.」
진혁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브라이언을 다시 보았다.
「너 마리오 방송을 일일이 챙겨보고 있었냐?」
「모니터링하는 거지! 너하고 같은 대회를 준비하는 라이벌이잖아.」
「하루에 열 시간 넘게 방송한다는 애 라이브를 계속 보고 있었다니, 대단하네. 그러잖아도 연습하느라 잠이 모자란다고 하더니만. 마리오 방송 체크할 시간도 있었어? 어지간히 신경 쓰나 보네.」
「그런 건 절대로 아니라니깐?!」
진혁은 브라이언을 놀리면서도 스케치북에 선을 그었다. 그 선은 둥글지 않았다. 평범한 원형 3단 케이크일 리가 없는 거친 선이 휙 휙 지나갔다.
진혁은 낯선 바윗덩어리가 여러 개 붙어있는 무언가를 그려냈다.
「뭘 하려는 거야?」
브라이언은 몰랐지만, 이것은 진혁이 앞서 실비안 웨인스톡을 도우면서 제안했던 첫 번째 디자인을 조금 변형시킨 것이었다.
울퉁불퉁한 바위산.
웨딩 케이크에서는 그 위에 검이 올라갔지만, 여기서는 위가 좀 더 넓었다. 산봉우리는 뾰족하지 않았으며 모퉁이가 잘려나간 듯 넓디넓은 원형 공간이 자리했다.
「보면 알게 될 거야. 그보다 몇 가지 물건을 좀 준비해 줘. 저기 있는 88번 밀가루하고 달걀흰자, 그리고….」
브라이언이 환하게 웃었다.
「오케이!」
임진혁은 벌써 무엇을 만들지 구상을 마친 것이다. 그러니 브라이언이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 ◈ ◈
심사위원들은 예선 후보를 보면서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었다.
뉴욕 제과제빵 협회의 회장인 제프리 디버가 말했다.
「핏덩어리가 둘 섞여 있네.」
여태까지 대회에 참가한 자들 중 나이가 어려봤자 기껏해야 30대 후반이었다.
참가자 평균 연령이 43세인 이 대회에서 20대 후반인 두 명의 동양인은 매우 눈에 띄었다.
영국 슈가 크래프트 협회의 대표이자 슈가 크래프트 아카데미의 석좌교수인 아서 J. 클라크는 한 부스만을 보지 않았다. 그는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전체적인 부스를 둘러 보았다.
「예상대로야. 크로캉부쉬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이 많이 보이는데.」
60cm.
일반적인 케이크로는 도달할 수 없는 높이다.
케이크 안에 대나무 꼬챙이나 심을 박는 것은 괜찮으나, 기존에 판매되는 층 받이를 따로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크로캉부쉬는 차곡차곡 쌓기만 하면 60cm는 가볍게 올릴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케이크로 60cm 이상의 높이를 만들려면 종류가 지나치게 한정되어 버리고 만다.
「정답이 있다면 리치 후르츠 믹스 케이크 정도 되려나?」
「뭐, 일반 파운드 케이크라도 가능하긴 할 텐데. 제대로 만들면 말이야.」
「아니면 과자를 구워서 올려도 되지.」
「웨딩 케이크나 쇼케이스용 케이크 전문 페이스트리 쉐프라면 모를까, 장식용 후르츠 믹스 케이크를 높이높이 세우는 데 치중해서 구워본 쉐프들은 많지 않으니 말일세.」
예선을 치르는 페이스트리 쉐프들은 당장 케이크의 종류부터 고민해야 한다.
「제정신이 아니군, 저놈은 치즈 케이크를 구워서 뭘 할 셈이지?」
제프리 디버가 혀를 찼다. 그는 카일 맥클레인이 구우려는 종류의 케이크를 보고서 혹평을 했다.
「크림치즈 케이크 위에 크로캉부쉬를 쌓으려나 본데. 심사위원 앞에서 바로 탑을 무너뜨릴 셈인가 봐.」
「지금 이 수준에서 타워 스타일의 케이크라고는 크로캉부쉬밖에 만들어보지 못한 사람이라. 예선을 통과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다행히 영국에서는 2명이 출전했군.」
「마술사 캘러한은 어때?」
한 번 우승한 이는 대회에 다시 출전할 수 없다.
그러니 지금 제일 유력한 우승 후보자는 지난 대회에서 아깝게 탈락했던 영국의 모카 F. 캘러한이다. 트럼프 카드나 수정구 등 마술을 이미지한 케이크로 유명하기에 ‘마술사’라고 불린다. 그는 그 호칭이 퍽 마음에 드는 듯, 평소 자신이 직접 경영하는 윈도우 베이커리의 오픈 키친에서 흰 모자와 망토를 입고서 케이크를 굽기도 했다.
「이번 대회에 출전한 참가자들은 개성적인 사람이 많아.」
마술사 캘러한만이 아니다. 건축가 출신의 주느비에브는 시몬 리옹의 제자다. 지난 쿠프 드 몽드 파티쉐리에서 탈락한 후 다른 대회를 준비했다. 독일의 초콜릿 케이크 챔피언십에 출전하여 6단 고딕 교회 케이크를 내놓아 당당하게 우승한 것이다.
「건축가 출신이라며? 어쩌면 이번 승부에서 제일 유리할지도 모르겠군.」
그녀는 페이스트리 쉐프들 사이에서만 유명한 것이 아니었다.
페이스트리 쉐프가 되기 전의 일이다. 에펠탑 앞에서 직접 구운 초콜릿 과자를 쌓아 올려 에펠 탑과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그 영상을 유튜브에 업로드했다.
그리고 그 영상을 포트폴리오로 제출해, 르꼬르동 블루에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시몬 쉐프가 제자 운은 진짜 좋아!」
제프리가 투덜거렸다. 아서 클라크가 말했다.
「하하. 아무리 좋은 제자가 들어와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하면 땡이지. 시몬 리옹 쉐프는 그래도 교육은 잘 해.」
「자기 케이크는 못 만드는 놈이니 교육이라도 잘해야지.」
「정말 유치하군.」
「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시몬이 재수 없기는 한데 제프리 당신이 이런 식으로 뒷말하는 게 좋아 보이지는 않네.」
안토니오 바트가 한마디 했다. 제일 나이가 많고 권위 있는 만큼, 그의 말을 다들 존중해 주었다.
「뒷말은 아니지. 눈앞에 있어도 얼굴에 대고 말해줄 수 있다고, 알잖아?」
「자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나. 나는 누가 뭘 만드는지 궁금하다고.」
「스물여섯 명 중에 열네 명은 슈 반죽을 하고 있구만. 게으른 것들!」
제프리가 혀를 찼다.
「슈가 아니라 에클레어를 굽는 녀석도 있는데?」
덴마크의 쉐프, 토마스 닐슨이었다. 그는 아름다울 정도로 완벽한 에클레어를 백여 개, 하나씩 구워내서 붉은 초콜릿을 바르고 있었다.
그 역시 케이크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유명한 페이스트리 쉐프였다.
「아, 그 레고 그룹의 토마스?」
세계의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블록 장난감, 레고(Rego).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목수 크리스티얀센은 아이들이 갖고 놀 수 있는 평화적인 장난감을 만들고자 한다. 그는 나무를 깎아 블록을 만들었다. 이 블록은 여러 개를 쌓아 만들어 다양한 모양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아들은 그 블록을 플라스틱으로 만든다는 결단을 내렸고, 레고는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아버지와 장남 둘이서 함께 일하던 조그마한 목공소는 점차 규모가 커졌다.
덴마크의 작은 마을, 노델스르덴.
직원이 2명뿐이던 그 회사에서 현재는 총 삼백여 명의 직원이 일한다. 이 플라스틱 장난감의 고객은 추산 2억여 명에 달한다. 어린 시절부터 레고를 갖고 놀았던 열성적인 고객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한정판 레고를 구입하며, 블록으로 무엇이든지 만들어낸다.
모든 손자와 손녀들이 전부 레고를 갖고 놀다가 레고 그룹에 취업할 때, 창업자 O. 키르크 크리스티얀센의 맏손자 토마스 N. 크리스티얀센은 홀로 다른 길을 걸었다.
가족 회사의 성공적인 길을 걷지 않고 제과제빵을 전공하여, 페이스트리 쉐프가 되는 길을 택했다.
제프리 디버가 말했다.
「내가 그런 부잣집에 태어났으면 그냥 아버지가 하는 길을 따라갈 텐데 말이지.」
「제프리 자네는 제과제빵사 집안에 태어났잖나.」
「그러니까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거 아닌가.」
제프리 디버는 대대로 부친이 페이스트리 쉐프를 했다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내 조부는 백악관에서도 페이스트리 쉐프로 봉사했다지.」
「요즘 시대에는 한 우물만 파는 건 촌스럽다고 하지 않나? 다양한 경력을 가진 페이스트리 쉐프들이 그 지식을 접목해서 제과제빵학을 더 발전시키고 있지.」
◈ ◈ ◈
토마스 닐슨 크리스티얀센은 심사위원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단 하나만을 생각하며 움직였다.
‘두 종류의 반죽을 레고 모양 틀에 넣어서 구울 거야.’
그에게는 다른 참가자들과 다른 유리한 점이 있었다.
바로 레고 모양의 케이크를 구워낼 수 있는, 빵틀의 존재였다.
‘이 블록 모양으로 빵을 구워내서 차곡차곡 쌓으면 60cm는 가볍게 넘길 수 있지!’
그는 두 종류의 반죽을 만들었다.
호두와 크랜베리가 들어간 적갈색 브라우니, 그리고 헤이즐넛이 들어간 바닐라 파운드 케이크.
‘이 주제는 나한테 유리해.’
적갈색 브라우니에는 식용 색소를 추가해, 선명한 붉은색이 되도록 했다.
반면에 바닐라 파운드 케이크 위에는 흰 생크림을 올려 하얗게 만들 계획이다.
덴마크의 국기는 붉은색 바탕에 하얀 십자가가 치우쳐 있는 모양이다.
그는 차곡차곡 레고 탑을 쌓아 올려, 맨 위에 국기 모양을 만들 생각이었다.
‘이번 대회에서 우승해야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수 있어.’
레고 그룹의 내부 상황은 외부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철저한 가족 회사로, 오직 혈족들만이 내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단 한 번, 창업자 키르크 크리스티얀센이 외부 CEO를 고용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CEO는 2차 세계대전의 무기인 탱크나 비행기 따위를 레고로 만들어 팔도록 승인했다. 키르크는 큰 충격을 받았다.
“레고는 평화로운 장난감이어야 해, 전쟁과는 관련이 없어야 한다고!”
그는 CEO를 해고했지만 이미 생산되어 판매된 장난감들을 다시 수거할 수는 없었다.
당시 열 살이던 토마스는 할아버지를 위로하고 싶었다. 가정부의 도움을 받아서 그는 레고 블록 모양의 커다란 케이크를 구웠다. 할아버지의 90번째 생신날이었다.
어린아이가 구운 빨간색 레고 블록 케이크를 본 할아버지는 크게 기뻐하셨다.
“이걸 우리 귀여운 토미가 만들었다고? 이게 바로 레고가 나아가야 할 길이야! 평화, 그 자체가 아니냐.”
체구가 작고 배우는 것이 느리던 토마스는 처음으로 할아버지에게 칭찬을 받았다.
키르크는 그 후 지병이 악화되어 금방 죽고 말았다.
키르크의 아들이자 토마스의 아버지인 얀센은 아들이 재료공학을 전공해 자신의 뒤를 잇기를 원했다.
하지만 토마스가 원하는 것은 아버지의 뒤를 따라서 장난감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나는 빵집에서 일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