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2화
「허허허.」
실비안 웨인스톡이 웃었다.
「배우는 거야 어렵지 않지. 그 망할 노인네나 그놈 제자들한테 고개 숙이는 게 싫어서 안 하고 있어서 그렇지.」
「아하하.」
「앞으로 또 계속 케이크를 만들 거니까, 배우는 게 남는 거지! 진 베이비, 네 말이 맞아. 이번에 크게 배웠네. 어린데도 통찰력이 있어.」
임진혁은 ‘어리다’라는 말에 움찔했다. 그는 실비안보다 나이가 많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두 사람도 고생했어.」
실비안을 보조하는 유진 쉐프와 타릴 쉐프, 두 사람은 자러 가고 없었다. 케이크가 완성되는 마지막 밤은 본래 실비안 웨인스톡이 혼자 작업한다고 했다.
‘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구나.’
깊은 밤, 아무도 없는 달 아래 작업실에서 홀로 오롯이 보내는 마지막 밤.
저 멀리 동양에서 온 두 청년에게 그 시간을 할애해 주었다.
진혁은 물끄러미 실비안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
◈ ◈ ◈
창밖으로 동이 터 눈 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올 무렵.
실비안은 마침내 웨딩 케이크 두 개를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훌륭하게 완성된 중세의 기사들은 케이크를 둘러싸고서 미소지었다.
케이크 위의 검을 뽑으려는 듯 두 사람이 함께 손을 겹치고 있는 케이크가 하나.
그리고 서로 등을 맞대고 각자의 검을 들고 있는 케이크가 하나.
얼굴 생김새는 신랑 신부를 완벽하게 닮았다. 정교하고 섬세하여 어느 쪽이 더 멋진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예술 작품이었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실비안 웨인스톡 쉐프.」
최종적인 마무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브라이언 역시 배운 것이 많았다.
진혁도 자존심을 포기하고 배움을 계속하겠다는 실비안의 결단을 보면서 느낀 것이 있었다.
‘그래, 이번에 대회를 준비하기로 한 건 아주 잘한 일이야. 세계의 대가들을 만나서 그들의 스킬을 배우는 것도 필요한 일이었고.’
이번에는 놀라운 기술을 배웠다.
굳이 표현하자면 슈가 레더 크래프트(Sugar Leather craft).
그리고 슈가 메탈 크래프트(Sugar Metal craft).
즉 설탕 가죽 세공과 설탕 금속 세공이라고나 할까?
슈가 크래프트 반죽을 이용해 금속과 가죽의 모양과 질감, 색깔, 심지어 반사광과 그림자를 넣는 방법까지 제대로 배웠다.
‘확실히 대가의 비법은 차이가 있어.’
처음에 반죽 단계에서부터 넣는 재료가 달랐다.
슈가 페이스트를 다듬고 갈고 긁은 후에 가루를 뿌린다.
실비안은 그 기술을 진혁과 브라이언, 두 사람에게 가르쳐주었다.
아직은 실비안처럼 완벽한 가죽으로 착각할 만큼 높은 완성도로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연습을 계속하면 어떤 방식으로 나아갈지 실마리가 잡혔다.
실비안은 슈가 크래프트를 이용해 인간의 피부를 어떤 식으로 조형해내는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 슈가 레더 크래프트 기술을 제대로 단련하면 분명히 인간의 피부를 리얼하게 재현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한시가 바쁘다.
돌아가서 연습하고 싶은 기술이 많다.
그래서 진혁과 브라이언, 두 사람은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다음날 비행기로 바로 한국으로 귀국했다.
브라이언은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도 죽은 듯이 깊은 잠을 잤다.
「직접 보고 가지 그랬어! 평이 아주 좋았다구.」
그는 유진 쉐프가 보낸 페이스북 메시지에 답장하지도 못했다.
한국에 돌아와 두 달여 간의 시간, 두 사람은 잠을 아껴가며 연습에 몰두했다.
진혁은 일주일간 가죽과 금속을 어떤 식으로 만드는지 온갖 재료를 실험해 가며 연습했다.
인간의 피부에 돋아있는 섬세한 솜털이나 눈썹, 머리카락까지 전부 만들어 박아넣을 기세였다.
그 모습을 보며 브라이언 역시 놀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집요하게 하나만 파고드는 그 집중력을 보면, 이 녀석은 뭘 해도 성공할 놈이라니까. 진짜 대단해.’
페이스트리 쉐프로서 어느 정도 만족할만한 위치에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더 정상을 향해 기술을 갈구한다.
‘나도 보고 배워야지.’
브라이언은 성실하게 진혁을 보조했다.
어떤 컨셉이 나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다양한 케이크를 연습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조언을 받았다. 진혁은 ‘중력을 거스르는 연회상’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디어 또한 현실로 재현하였다.
그중에서는 슈가 아트가 아닌, 슈가 크래프트 기법을 사용해 재현한 자수정 광맥 케이크도 있었다.
◈ ◈ ◈
두 달이 지나, 마침내 대회 시간이 되었다. 대회 장소는 뉴욕이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십여 시간의 비행을 거쳐 무사히 존 F. 케네디 공항에 도착했다.
스마트폰이 작동하는 시점부터 뉴욕에 자리한 익숙한 기운을 느끼고서 진혁은 이곳저곳에 텍스트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진혁은 점점 더 눈썹을 추켜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한 비서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한 비서, 나한테 할 말이 없나?”
“없습니다.”
“정말로?”
“예.”
진혁은 점점 더 의미심장하게 한 비서를 바라보았다.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한 살기가 점점 짙어져 가자 한 비서는 헐떡거리며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그, 그….”
막 스마트폰 메시지를 본 브라이언이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제시가 공항에 마중을 나왔다네! 세상에!」
그는 행복한 듯이 팔짝팔짝 뛰면서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진혁은 한 비서를 보며 웃었다.
「내 가족들과 관련해서 할 말은 없나?」
「그, 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알았어.」
진혁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느낀 기운들이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상태인 것을 확인했다.
「입국 심사는 이쪽입니다.」
임진혁은 외국인이 입국하는 쪽으로 향했다. 반면에 브라이언은 미국인이 입국하는 쪽으로 가, 훨씬 빨리 심사를 통과했다.
「오케이! 먼저 나가 있을게.」
브라이언의 메시지를 확인한 진혁은 더 이상 살기를 풍기지 않고 한 비서를 돌아보았다.
「한 비서?」
「진혁 쉐프님, 캐리어는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한 비서는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진혁을 따라나섰다.
방금 전에 느꼈던 감정은 그가 처음 겪는 것이 아니었다.
‘이분은 정말로 지배자의 기질을 타고나신 분이야.’
과거 황태명 역시 유사한 기질을 보였다.
평소 진혁을 ‘유능한 페이스트리 쉐프’로만 평가했던 한 비서는 이번 기회에 진혁의 진정한 모습을 엿보았다.
그는 머릿속으로 수많은 추측을 했다.
‘역시 황태명 회장님께서 손녀사위를 아무나 택한 것이 아니었어.’
임진혁은 외부적으로는 야망 없는 제과제빵사인 척 가장하고 있다. 부유하며 아름다운, 그룹을 소유한 거부인 황미미에 비해 과소평가되기 일쑤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하는 일들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알콩달콩한 신혼 생활을 포기하고 바로 대회 준비를 한다고 하여 측근들을 놀라게 하더니, 그 대회 준비를 통해서 사람을 얻었다. 브라이언 신처럼 능력 있고 뛰어난 쉐프가 직접 기술을 배우겠다고 회사에 투신하는 건 흔한 일은 아니다. 브라이언 신이라는 인재를 얻음으로써 미국에 병원에 딸린 카페 모델이 아닌, 아예 독립적인 빵집을 오픈할 수 있는 디딤돌을 얻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유서 깊고 역사 있는 호텔을 매입하여 이탈리아 지점 개점 준비를 하고 있다.
언뜻 보면 통일성 없고 무작위적인, 충동적인 프랜차이즈 확장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결단 너머에는 명민한 계산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한 비서는 알고 있었다.
‘황태명 어르신과 똑같아. 당장 눈앞의 돈이 아니라 사람에게 투자를 하는 방식이지. 잘못을 저지른 이에게는 적절한 벌을 주되, 상을 받아야 할 자에게는 훌륭한 상을 줘. 천부적으로 사람을 다룰 줄 아는 분이셔.’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어르신의 손녀사위 곁에 머무르게 되었을 때 한 비서는 처음에는 자신이 좌천되었다고 믿었다. 20대 한국인 제과제빵사에게 보좌 비서가 필요할 이유가 없다고 믿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결론은 틀렸다.
임진혁은 그룹의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으나, 자신만의 제국을 점차 건설해나가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주가총액 등이나 규모가 황미미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해와 달>은 중국과 한국, 그리고 미국의 카페까지 전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한국의 제과제빵 매출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을 무렵에 중국에 지점을 오픈했고, 지금은 중국 전역에 확장하여 운영하고 있다.
중국에서 공격적인 마케팅을 하며 운영하다가 매출이 주춤하자 미국의 환자들을 상대로 빵을 팔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대회를 준비한다더니 유럽 시장과 미국의 일반 손님들을 휘어잡을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고 계셔. 정말로 대단한 분이시다. 따를 만한 가치가 있어.’
한 비서는 식은땀을 닦으며 진혁을 따라나섰다.
‘그런데 임진혁 쉐프님이 아까 왜 그렇게 화가 나셨던 거지?’
◈ ◈ ◈
제시카 린든은 공항 출구에서 플랜카드를 들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브라이언을 보자마자 외쳤다.
「브리!」
「제시!!」
브라이언은 몇 달 만에 보는 아내가 보이자마자, 멧돼지처럼 돌진해서 바로 껴안았다. 허리를 감싸 안으며 들어 올리는데 생각보다 가벼웠다. 브라이언이 비명처럼 외쳤다.
「당신, 살이 빠졌어?」
「옆에서 매일 빵을 구워주는 남자가 없어지니까 자연스럽게 빠지지 뭐야.」
「이제 그런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뭐야, 여보! 내 다이어트 방해하지 마.」
「지금이 예쁜데 뭘.」
두 사람이 한 쌍의 원앙처럼 조잘거리는 사이에 한 비서는 열심히 어딘가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진혁이 브라이언과 제시카에게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는 먼저 베이킹 스튜디오에 가 있을게.」
「잠깐, 기다려. 같이 가!」
「데이트라도 하고 와.」
제시카 린든이 고마워하며 허리를 숙였다.
「진혁 쉐프! 브라이언이 그동안 신세를 졌죠.」
「이제 한 식구인데요, 뭘.」
「<해와 달> 뉴욕 지점 오픈도 준비할 거라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제시카와 브라이언을 남겨두고, 진혁과 한 비서는 바로 베이킹 스튜디오로 향했다.
뉴욕에서는 새로운 운전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리무진에 먼저 타고 있던 사람을 보고서 진혁은 놀라지 않았다.
“서프라이즈!”
“미미 씨.”
“어마, 놀라지도 않네요?”
한 비서가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진혁은 애써 모른 척했다.
“반갑습니다.”
“우리도 이제 말을 놓을 때가 됐지요?”
“….”
진혁은 잠시 주저했다. 그는 반말을 하면서 명령조로 이야기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가 머뭇거리는 것을 본 미미가 부드럽게 웃었다.
“부부가 서로 존댓말을 하는 것도 좋지요.”
“고마워요.”
베이킹 스튜디오까지 가는 짧은 시간 동안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저번에 보내준 치즈 케이크는 속 깊은 맛이 특이하던데요.”
“과일 치즈케이크 말이죠. 바나나하고 패션프루트가 들어간 것 중에 어떤 게 더 나았습니까?”
“사실 치즈 케이크는 치즈만 들어있는 게 제일 맛있는 것 같은데. 그중에서 제일 잘 어울리는 건 치즈와 초콜릿이나 치즈하고 커피?”
“알겠습니다.”
진혁은 머릿속으로 소소한 정보를 집어넣었다. 그녀는 중국에서 한창 드라마 촬영을 하고 있던 와중에, 진혁의 대회 준비를 응원하러 잠시 들른 것이다.
“베이킹 스튜디오 맞은편에는 숙소가 있어요. 어머님과 아버님이 와 계시니까 조금 더 반가워해 주세요.”
“아.”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미 씨가 초청한 거구나.’
그렇지 않아도 근처에서 느껴지는 낯익은 기운 때문에 부모님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두 분 모두 응답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 때문에 순간적으로 한 비서에게 미약한 살기를 쏘아 보내고 말았다.
‘한순간 납치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버렸어.’
월드 페이스트리 챔피언십 대회는 무림대회가 아니다. 그러니 라이벌의 가족을 납치해서 대회에서 지는 척을 하라든가 하는 협박이 들어 올 리는 없다.
그러나 가족들 모두 평안한 상태였기 때문에 곧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진희 씨는 가게 때문에 도저히 올 수가 없었대요.”
“위임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텐데 말입니다. 미미 씨는 여기에 얼마나 머무를 수 있지요?”
“두 시간 후면 다시 중국으로 출발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