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1화
슈가 크래프트에서 사용하는 식용 접착제는 그때그때 다르다. 가벼운 꽃잎 같은 경우에는 물을 붓에 아주 살짝 묻혀 붙여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을 너무 많이 묻히면 슈가 크래프트 반죽이 녹을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양만 써야 한다.
케이크 시트와 슈가 페이스트 반죽 사이에는 맛을 좋게 하고 접착이 잘 되게 하기 위해 과일 잼을 사용하기도 한다.
진혁이 진한 물엿을 꺼냈기에 이미 만들어진 초콜릿 갑옷 조각을 붙이기만 하면 됐다. 본래대로라면 밸런스를 잡기 위해 조심스럽게 만지며 한참이나 걸릴 작업이다. 예상치 못하게 빠르게 완성된 갑옷 모양을 보고 브라이언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진짜 멋있다.」
「누구 솜씬데.」
유진도 흐뭇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실비안이 미소지었다.
「이 정도면 그 보기 싫은 노인네도 인정하겠는걸?」
「예?」
진혁은 실비안이 누구 이야기를 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브라이언이 속삭여주었다.
「아마 쉐프 레이몽드를 말하는 걸 거야.」
진혁은 그 사람의 이름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브라이언이 실비안의 개인사-즉 싫어하는 사람-까지 알 줄은 몰랐다.
「뭔데?」
그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이다. 브라이언이 바로 대답했다.
「슈가 아트의 권위자.」
「아.」
진혁은 더 이상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보통 ‘설탕 공예’라고 단순하게 표현하지만, 사실은 두 갈래가 있다.
영국식 설탕 공예인 슈가 크래프트(Sugar craft).
그리고 프랑스식 설탕 공예인 슈가 아트(Sugar Art, Pastillage).
슈가 크래프트는 말랑말랑한 설탕과 젤라틴, 달걀흰자의 반죽 즉 슈가 페이스트를 반죽해 모양을 만들어 장식한다.
반면에 슈가 아트는 설탕을 녹여 만든 단단한 사탕을 재료로 쓴다. 적절한 온도에서 녹인 사탕을 엿가락처럼 얇게 늘여 장식하고 세공한다.
지점토 같은 반죽을 이용해 케이크를 만드는 슈가 크래프터와, 단단한 사탕을 쪼개고 가르고 녹여 장식하는 슈가 아티스트. 사이가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다.
「뭐, 어쨌건. 이제 케이크 장식만 하면 되겠는데.」
「생각보다 조금 더 빨리 끝나겠어요, 쉐프.」
하지만 실비안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진 베이비. 이 혁신적인 한국식 물엿이 있다면 케이크 아래쪽의 디자인을 바꿀 수 있어. 혹시 도와줄 수 있어?」
그녀는 스케치북에 새로운 디자인을 휘갈겨 보였다.
케이크의 아래쪽을 일부 파내고, 그 아래에 자수정과 수정 광맥 같은 설탕 장식을 올린다.
진혁은 그것을 보고 예전 자신이 내놓았던 아이디어를 상기했다.
「… 내 바위.」
「그렇지! 회색 울퉁불퉁한 바위를 케이크라고 내놓을 순 없지만 말이야, 흰색 3층 케이크의 맨 아랫단 내부가 아름다운 자수정 광맥이라면 신부도 이해할 거야.」
「하객들도 이 케이크가 바위라고 생각할 겁니다.」
브라이언은 경이로운 눈으로 실비안을 응시했다.
그는 이 쉐프의 능력에도 감탄했지만, 케이크를 만들어놓은 상황에서 끊임없이 설계를 바꿔나가는 이 도전정신이 더 놀라웠다.
‘아드레아노 존부 쉐프는 한번 설정한 틀은 절대로 안 바꾸는데. 함부로 건드리다가 어디가 무너질지 모르는데 말이야. 이걸 어떻게 버텨온담. 유진 쉐프도, 타릴 쉐프도 대단해.’
「아니, 안 바꿔도 되는데….」
옆에서 타릴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유진 역시 시퍼레진 얼굴로 보고 입술을 벙긋거렸다. 실비안과 브라이언은 듣지 못했지만, 진혁은 들었다.
그는 피식 웃었다.
「깎아내서 다시 얹으면 되긴 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응, 맛이 좀 더 다양해지지.」
「그건 그렇긴 한데. 이미 커버까지 전부 올린 케이크를 깎아내려니 조금」
「하하하하! 그런 사소한 일을 신경 쓴단 말이야?」
「그래요, 웨인스톡 쉐프. 우리 그건 다음 디자인에 적용하죠.」
「여기 이 케이크는 아직 커버링을 하지 않았잖습니까. 이건 지금 깎아내면 될 것 같은데.」
「괜히 이미 커버링한 케이크 깎아내다가 커버까지 우그러들면 아예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구요.」
「아, 뭐. 너희들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실비안은 조금 실망한 표정이었다. 진혁이 말했다.
「우그러지지 않게 할 수….」
브라이언은 진혁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가 애절하게 속삭였다.
「대, 회, 준, 비.」
필사적으로 소곤거리는 브라이언을 보고서 진혁은 눈을 깜빡거렸다.
‘오래 안 걸리는데.’
우그러지지 않게 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분명히 케이크는 조금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은빛 스프레이를 뿌려 코팅한 초콜릿 갑옷 아래, 자수정 광맥을 속에 품은 희디흰 케이크는 분명 휘황찬란하게 빛나리라.
결혼에 어울릴 수밖에 없는 케이크다.
진혁은 다른 사람들을 힐긋 보았다.
브라이언과 유진, 타릴 모두 진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담긴 시선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질투와 시샘만이 아니다. 부러움과 열등감, 그리고 다른 감정들.
진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다른 두 쉐프의 애절함 따위는 그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브라이언이 발을 동동거리는 건 신경 쓰였다. 특히 그가 <해와 달>에 입사하겠다고 선언한 이상 더 그렇다.
‘음, 원래 일주일 예정으로 오긴 했지만. 결혼식까지 보고 갈 필요는 없지.’
그는 자신이 하던 말을 대강 얼버무렸다.
「있을지도 모르지만 없을지도 모르겠군요.」
「뭐야, 그게.」
실비안은 흥미를 잃고 고개를 저으며 뒤로 돌아섰다.
「자, 그럼 두 번째 케이크 작업부터 하자고. 유진은 여기 스프레이를 해 줘, 관절부는 내가 맡을 테니까 남겨 두고.」
「장갑! 장갑 찢어졌다.」
「거기 조심해.」
다 같이 장식 업무에 매진하면서, 진혁과 브라이언도 힘껏 도왔다. 진혁은 이곳저곳에서 실력을 발휘했다.
「거참 손재주가 좋네, 한 번 가르쳐 주면 바로 배우다니.」
「그렇지? 빨리 배우는 것도 능력이야.」
「브라이언도 괜찮고.」
「애가 성실해.」
5일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5일째 밤에는 결국 밤을 새우다시피 했으나, 두 개의 케이크는 무사히 완성되었다.
진혁과 브라이언은 호텔에 돌아가지 않고 실비안이 밤새 케이크를 손보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혹여 먼지 하나라도 가라앉았을까 우려하여 조심스럽게 작은 붓으로 이음새와 연결부를 털어낸다.
마디 굵고 뭉툭한 손은 보기와는 다르게 섬세한 손짓으로 미세한 먼지까지 전부 털어내었다. 브라이언이 중얼거렸다.
「이미 다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먼지까지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던 진혁은 매의 눈으로 과정을 지켜보았다.
‘내가 아무리 오행진을 사용해 주방 안의 먼지를 줄인다고 해도, 더 줄이는 게 좋긴 좋지. 페이스트리 쉐프가 가지고 오는 먼지들이 있으니까. 먹는 것에 이물질은 안 들어가는 게 좋아.’
실비안이 중얼거렸다.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다 만들어야 하는 거야. 만든 사람 눈에는 안 보여도 먹는 사람 눈에는 보이는 게 있거든.」
「그게 뭔데요?」
「정성.」
진혁이 웃었다.
「우리 아버지가 매번 하시던 이야긴데요.」
「하하하! 나도 내 아들한테 맨날 했던 얘기야.」
「아드님은 지금은 제과제빵을 그만두었습니까?」
실비안 웨인스톡의 아들 이야기는 이 바닥에서는 금기(禁忌)다. 생각 없는 질문을 들은 브라이언이 놀라서 진혁의 발뒤꿈치를 툭 건드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어디선가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흐음.」
「천국에도 빵집이 있다면 말이야.」
「아.」
「주방은 아주 위험한 곳이야. 뜨거운 것, 날카로운 것들이 가득하지. 열 살 소년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는 물건들 말이야.」
브라이언은 입을 다물었다. 실비안 쉐프가 홀몸으로 키우던 아들을 불행한 사고로 잃었다는 이야기는 제과제빵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내가 미리 말해줄걸. 진혁이 이 녀석은 아는 게 하나도 없네. 도대체 한 비서님은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알려주지 않고 뭘 한 거야?’
브라이언은 모처럼 쌓은 좋은 관계가 진혁의 말실수로 인해 망가질까 걱정하였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그래도 계속 살아야지.」
「예.」
진혁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는 가족을 잃었고, 부하를 잃었고, 친우를 잃었다.
지금 와서 다시 그 가족을 되찾았다고 해도, 그 가족은 진혁이 예전에 알던 그들이 아니었다.
팔을 다쳐본 적이 없는 아버지는 더 이상 트럭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암 투병을 겪지 않은 어머니는 평소처럼 풍성한 파마머리를 하고 돌아다닌다. 예전에는 박박 깎다시피 한 머리에 어색한 싸구려 가발을 쓰고 계셨다.
그리고 진혁의 병원비에 돈을 보태기 위해 전세금을 빼서 쏟아부었던 구두쇠 임진희. 그녀는 레쓰비 한 캔도 사 먹지 않고 커피 믹스 하나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일주일에 딱 한 번, 견디기 힘든 날에만 아껴 마셨다.
하지만 진희는 더 이상 믹스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간호사에서 제과제빵사이자 지점장이 되면서, 머리를 질끈 졸라매고 밤마다 새로운 웰빙 메뉴 개발에 힘쓴다. 커피는 반드시 직접 볶은 원두커피여야 하고, 그것도 마시기 직전에 바로 볶아 내린 신선한 것만 즐긴다.
지금 달라진 가족들 역시 사랑한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은혜를 갚고 싶은, 함께 고통을 겪어 서로를 아끼며 단단해졌던 가족들은 과거의 굴레 어딘가로 사라진 지 오래다.
이미 없다.
아무리 외쳐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다.
그 막막함과 공허함, 그리고 쓸쓸함.
진혁 역시 알고 있는 감정들이다.
실비안 웨인스톡이 혼잣말하듯 말했다.
「마크는 엄마가 케이크 만드는 걸 아주 좋아했어.」
「그렇습니까.」
「요즘 애들은 알록달록하고 장난감 같은 케이크를 원하잖아? 그 애는 다른 애들하고 달랐어. 자기는 이렇게 어린애 같은 케이크는 필요 없고, 진짜 같은 케이크를 만들어 달라고 졸랐지. 잘 때마다 아주 낡을 대로 낡은 갈색 담요를 돌돌 말고 잤는데, 그 담요가 없으면 자려고 하지 않았어. 보풀도 심하고 아주 보잘것없이 생긴 담요였단 말이야. 태어나고 반년쯤 됐을 때 처음으로 직접 바느질해서 완성한 담요였는데, 그 누더기 같은 실패작을 십 년 동안 꼭 껴안고 놓질 않았어.」
브라이언은 벌써 눈물을 그렁그렁 담은 채 실비안을 보고 있었다. 그는 이 이야기가 어디로 향할지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걸 갖다버릴 수 있나 고민하고 있다가, 그 담요 모양 케이크를 만들었지. 전혀 그 담요를 닮지 않았는데도, 아들이 아주 기뻐하면서 먹어 주었어. 내가 보기에는 그 특유의 질감을 살리지 못했거든. 조금 더, 조금만 이쑤시개로 긁으면 담요 모양이 될 것 같은데. 조금만 더, 긁개로 흠집을 내면 담요같이 보일 텐데. 그렇게 시작했던 건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나보고 케이크를 잘 만든다고 하더라고. 내 아들은 벌써 가고 없는데 말이야.」
중간층에 있는 먼지를 털면서 실비안은 살짝 허리를 굽혔다. 애써 꼿꼿이 세우고 있던 척추를 구부리며 조심스럽게 시럽을 바른다. 이 시럽은 케이크가 좀 더 반들반들하고 윤기 나게 해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있지만, 그녀는 아이싱을 비롯하여 이 마지막 작업도, 절대로 다른 이에게 넘기지 않았다.
불상 앞에서 절하는 불교 신도처럼.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올리는 가톨릭 신자처럼.
일월에게 불꽃을 피워내 바치는 헌화처럼.
그녀는 케이크를 만들며 자신의 아들을 기려왔다. 아들에게 주는 것이기에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었다. 전심전력을 기울여 케이크를 만들어왔기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외부의 평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들이 만족할만한 케이크.
만일 아들이 살아있었다면 기뻐했을 만한, 그런 케이크.
「이 노인네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네 그랴.」
한밤중, 센티멘탈해졌던 순간이 머쓱한지 실비안이 웃었다.
「아닙니다.」
진혁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브라이언은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실비안이 노구를 이끌고 포기하는 일 없이 밤늦게까지 케이크를 손질하는 이유.
그 이유를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다.
「이거 광산 모양으로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야, 그 신랑 될 애가 보석 같은걸 좋아하거든.」
실비안이 아쉬워하며 말했다.
「광맥처럼 빼곡히 설탕 보석이 박혀있는 그 디자인은 프랑스식 슈가 아트가 아니면 할 수 없는데, 나는 슈가 아트를 할 줄 모르니까.」
진혁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배우시면 되잖습니까?」
「내 나이에?」
「백이십 살까지는 삼십 년도 더 넘게 남았는데. 30년간 이걸 배웠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를 계속하며 미련에 사로잡혀 있을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