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8화
그는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계단을 한 층 내려가, 진혁은 러브 스위트 룸의 문을 노크했다.
안쪽에서 짜증스럽게 반응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은 면담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충분히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해링턴 박사님! 저는 경찰이 아닙니다.」
문이 열렸다.
파자마를 입고서 슬리퍼를 신고 있던 에드워드 해링턴이 미소를 지으며 진혁을 반겼다.
「오! 임진혁 쉐프.」
「해링턴 박사님.」
에드워드는 따뜻하게 진혁을 환영했다. 정말로 반가운 기색이었다.
「한국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기에는 웬일인가! 정말로 놀라운 일일세. 여기에도 <해와 달> 지점을 만들려고 방문했나?」
심지어 바로 거실에 들여놓고 직접 차를 가져오기까지 했다. 이미 거실에 있었던 아내가 온화하게 웃었다.
「당신이 그 말로만 듣던 임 쉐프로군요?」
「안녕하십니까.」
「당신 덕분에 아들이 생명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남편이 은퇴했지 뭐예요, 정말로 고마운 일이에요. 이런 데서 또 만나게 되다니 너무나 반가워요.」
그녀는 안쪽 방으로 들어가더니 쿠키를 꺼내왔다. 유산지로 둘러싸여 있는 쿠키는 직접 구워온 것처럼 보였다.
「가정부 마리아가 구운 쿠키예요, 이래 봬도 정말로 맛있답니다. 남편이 극찬하던 쑥 베이글만큼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차와 아주 잘 어울려요.」
「감사합니다.」
따끈따끈한 홍차가 담긴 도자기 잔은 호텔에서 사용하는 것과 달랐다. 선명한 붉은색 찻물을 내려다보며 진혁이 물었다.
「쓰던 찻잔을 갖고 오셨나 보군요.」
「예, 까다롭게 굴고 싶은 건 아니지만 말이에요, 여행용 찻잔 세트를 따로 써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잔이거든요.」
「그렇군요.」
세 사람은 이탈리아의 날씨와 휴양 계획 등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혁은 사교적인 대화를 금방 그만두고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도난 사건 때문에 이 호텔에서 나가지 못하더군요. 일 때문에 해외 출장을 왔는데 말이죠.」
「어머!」
에드워드 해링턴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는데. 임 쉐프가 그 일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니 유감이군! 우리는 여기에 여행 오면 아예 바깥에 나가지 않고 호텔을 즐기기 때문에 몰랐네.」
「여보, 우리도 외출이 금지되어 있을까?」
「그럴 수도 있지.」
「맙소사! 정말 불쾌한 일이에요. 이탈리아에 도둑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몇 번이나 여행을 와도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어요. 이렇게 치안이 좋지 않다면, 굳이 호텔을 사서 리모델링할 필요도 없지 않나 싶어요.」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린 호텔에 손님이 오지 않을 수도 있고 말이지.」
「리모델링이라면 어떤 걸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미시즈 해링턴이 웃으며 말했다.
「아름다운 바다가 있고 기후가 좋은 이탈리아의 해변가에서 요양하고 싶은 환자분들은 많으니까요. 남편이 마침 임진혁 쉐프님도 같이 보셨던 병원 카페의 식사 시스템을 이곳에도 적용하려고 했지요.」
「아.」
「최신 전자식 오븐과 동결건조 기계처럼, 최신식 주방으로 리모델링을 해서 환자분들의 질병에 가장 적절한 요리를 제공한다면, 이 호텔은 훌륭한 요양 시설이 될 수 있을 거예요.」
「그 리모델링 계획에 대해서 여기 직원들도 알고 있었습니까?」
「지난주에 주방 기구 업체가 와서 견적을 냈으니 그때쯤 알았겠죠?」
에드워드 해링턴이 거들었다.
「주방 설비들이 보기보다 꽤 고가더군. 돈을 좀 투자하더라도 미국에서 올 환자들을 위해서 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 병원에서 퇴원해도 집에는 갈만한 상황이 못 되는 환자들에게 있어 식생활이란 아주 중요한 요소라네. 지중해식 파스타니, 피자니 하는 음식들이 건강에 좋다, 좋다 하지만 질환에 맞추어 처방하는 처방식처럼 좋을 순 없지.」
「이이도 참, 은퇴했다고는 해도 항상 환자분들을 생각하는 의사예요.」
「…두 분이 아직 사이가 좋으시군요.」
「그래, 자네가 만들었던 빵을 꼭 한 번 부인한테 맛보여주고 싶은데. 혹시 가능할까?」
「음, 기회가 닿는다면요. 여기 주방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내가 말은 해보겠네만, 여기 사람들도 워낙 완고해서 말이지.」
「호텔을 구매할 생각은 사라지신 겁니까?」
에드워드가 힐긋 진혁을 바라보더니 의중을 알았다는 듯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왜, 자네도 구매 생각이 있나? 추천하고 싶지는 않은데.」
에드워드 해링턴이 신중하게 대답했다.
「확실히 결정 내린 것은 아니지만 안 살 가능성이 높아. 몸이 약한 사람들은 문제가 생길만한 여지가 있는 곳에는 오고 싶어 하지 않거든. 도둑이 있다는 곳에 오고 싶어 하는 환자는 없다네.」
해링턴 부부와 함께 대화를 나눈 후 진혁은 방을 나섰다.
‘거울이 소중해서라기보다는 그냥 이 위치와 가격, 공항에서 가깝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던 거야. 그리고 거울이 없어졌다는 게 문제라기보다는 치안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서 구매를 원치 않는 거군.’
한 비서의 조사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그는 다시 아래층 로비로 향했다.
1층 로비에 서 있던 한 비서가 진혁에게 말했다.
「다른 손님들은 특별히 의심할만한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 직원들도 다들 몇십 년 이상 여기서 일한 사람들뿐입니다. 호텔에 대한 충성심도 강하고요.」
「흐음.」
「제가 도어맨으로 일하고 있는 안토니오 주세페가 여기 주인인 걸 말씀드렸습니까?」
「아, 역시 그랬지?」
「알고 계셨습니까?」
「안토니오가 와서 빵을 나눠주는데 다들 불평 없이 먹으면서 좋아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가족처럼 허물없이 굴 정도로 가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건 안토니오라는 게 티가 나던데.」
「대대로 호텔을 관리하면서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일하는 게 집안의 전통이라고 합니다.」
진혁은 이제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은 엘리베이터 측을 힐긋 바라보았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엘리베이터를 들여다보았다.
거울이 떼어진 부분에는 손질되지 않은 목재가 거칠게 드러나 있었다.
그는 그 자리를 슬쩍 들여다보고서 바로 뒤로 물러났다.
멀리 서 있던 경찰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범죄자는 반드시 현장에 돌아온다고 하는데.」
그가 속담 같은 말을 꺼내자 진혁이 웃으며 맞받아쳤다.
「구경꾼 사이에서 말이죠.」
진혁은 한 비서와 함께 다시 스위트룸으로 올라왔다. 경찰관은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비서가 말했다.
「황 회장님께서 지금 하시던 촬영을 중단하고 이쪽으로 출발하시려고 합니다.」
「아, 오지 말라고 내가 직접 연락해야겠군.」
「예?」
「범인을 찾았거든.」
한 비서는 정말로 놀랐다.
「예에에에?!」
「모르겠어?」
「도대체 뭘요…?」
「여기 화덕은 부엌문 너머로 언뜻 봐서도 정말로 훌륭했거든. 최신 장비가 좋다, 좋다 하지만 역시 옛것만은 못해. 술 부대나 사람이나 모두 옛것이 제일 좋은 법이지.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무조건 새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갑자기 여든 살 노인이나 할만한 말씀을 하시네요.」
「그러니 호텔 직원들이 다 같이 억울해할 법도 하지.」
한 비서가 눈을 크게 떴다.
「호텔 직원들이 다 같이 작당해서 거울을 숨긴 겁니까?」
「그런 것 같은데.」
「아니, 이런 몹쓸 놈들 때문에 저희가 다 같이 시간을 낭비한 겁니까?」
진혁이 티타임을 위한 테이블에 앉아 턱을 괴었다.
「특별히 악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아. 그냥 멍청했던 거지. 새로운 구매자가 와서 투자도 하고, 리모델링도 하고. 오랜 손님이기도 하니 아껴줄 거라 예상하고 거래를 하기로 했는데, 예상외로 이 구매자는 이 호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뜯어고치려고 했지.」
한 비서는 무슨 일인지 이해한 눈치였다.
「아, 그 주방 공사 말이군요.」
「그래. 일단 예정된 거래를 미루려고 가짜 도난 소동을 일으킨 거야. 도둑이 들었다고 이야기하는 안토니오의 태도도 너무 태연했고, 다른 직원들 모두 분위기가 느긋했어. 오히려 안심한 모양에 가까웠지.」
「그런 것까지 눈여겨보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미미 씨하고 의논해서 살까 싶어, 시장에 얼마로 나와 있지?」
「이 호텔을 구입하실 예정이십니까?」
「그래. 거울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저 화덕이 마음에 들어.」
「그렇다면?」
「애초부터 날 끌어들이지 말았어야지.」
진혁이 짧게 말했다.
「가능한 만큼 깎아. 대신 사기 사건을 은폐해 준다고 해.」
「하지만 증거가 없습니다.」
「카페테리아의 주방 내에 거울이 있을 거야.」
「예? 투시력이라도 있으십니까?!」
「안토니오가 바리스타에게 꾸러미 주면서 내 빵 줬잖아. 바리스타 녀석은 그 꾸러미를 싱크대 아래에 넣었고.」
평소 소매가 깨끗하던 안토니오의 옷자락.
그곳에는 나뭇가루가 붙어있었다. 엘리베이터 안, 거울이 부착되어 있던 나무가 뜯겨나간 부분에 묻어있었던 것과 동일한 나뭇가루였다.
고수의 날카로운 시력과 기억력이 아니면 발견할 수 없을 만한 사소한 단서였다.
「그게 거울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아니, 잠깐만. 그럼 거의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거 아니에요? 그런데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귀찮잖아.」
「….」
「내 일도 아니고.」
「….」
한 비서가 눈알을 굴렸다. 황미미에게 문자를 보내서 답장을 받은 진혁이 활짝 웃었다.
「아, 허락받았다.」
「뭘요?」
「이 호텔 사서 <해와 달> 이탈리아 지점으로 개조해도 된다고 하네. 한 비서가 맡아서 처리해.」
「예에에에?!?!」
「인수한 다음에 호텔 인력은 그대로 유지하되, 3개월 이내에 <해와 달>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들은 해고하고.」
한 비서가 영혼이 탈출한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해외 건물 구매하고 새로운 지점 개발은 제 업무가 아닙니다만….」
「민병철 이사 불렀어. 다음 주부터 와서 도와줄 거야.」
「민 이사님은 이탈리아말은 한마디도 못 하잖아요?!」
「그러니까 한 비서가 많이 도와줘야지.」
진혁이 싱긋 웃었다.
「잘 부탁해.」
한 비서가 입을 쩍 벌렸다.
「아니, 잠깐만요, 임 쉐프님! 대표님!」
진혁은 침실 문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 너머에서 한 비서는 무언가 말하려고 하다가 한숨을 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 ◈
다음 날 아침.
브라이언이 머쓱해 하며 진혁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는 어제 방을 탐색하다가 없어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실망하며 그대로 잤다. 브라이언이 문 너머로 소리쳤다.
「일어났어?」
진혁이 문을 열고 나왔다.
「너야말로 늦게 일어났잖아.」
잠옷을 입고 있던 채인 브라이언 신은 외출복을 완전히 갖춰 입고 있는 진혁을 보고 놀랐다.
「어제 피곤했나 봐, 내가 또 일찍 잠들어버렸어. 미안.」
「괜찮아.」
「우리 외출 금지 풀렸어? 지금 나가도 되는 거야?」
「응, 훔쳐간 사람이 자수했다고 하더라.」
「우와! 오늘 스튜디오에 무사히 갈 수 있다고?!」
브라이언이 바로 자기 방으로 뛰쳐들어갔다. 그는 황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양말을 짝짝이로 신은 채 구두를 꿰어신고 다시 돌아온 브라이언이 신나서 말했다.
「역시 세상에 정의가 살아있구나. 그 사람이 마음을 고쳐먹어서 다행이다.」
진혁이 싱긋 웃었다.
「뭐, 그렇지.」
호텔 앞에는 어제와 같은 운전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즐거워 보이는 표정으로 세 사람을 맞이했다. 그리고 유난히 피곤해 보이는 한 사람을 보고 물었다.
“두 분은 잘 주무신 것 같은데, 한 비서님은 잠자리가 편치 않았습니까? 피곤해 보이네요.”
“갑자기 일이 많아져서요. 누구 때문에 말이죠.”
한 비서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오데스칼키 성에 있는 컨테이너 키친? 거기로 가는 게 맞지요?”
운전사가 재차 확인하자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지금 시간이면 가면서 바다 위로 해가 뜨는 광경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아주 풍경이 이쁜 곳을 보여드리죠.”
진혁이 손을 내저었다.
“그보다 스튜디오에 빨리.”
“아,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