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443화 (441/656)

제 443화

「그것 참 큰일이로군요!」

한 비서가 맞장구를 쳐주었다. 크고 무거운 치즈를 통째 들고 있는 운전수는 헉헉거리느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죠, 아주 큰일입니다. 그러잖아도 이 호텔을 사겠다고 하는 분이 계셨는데, 또 거울이 빠져 버리면 이게 크게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그는 한 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진혁은 두 사람의 대화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모차렐라 치즈에 생토마토, 바질에 후추. 거기에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까지 갈아 올리면 정말로 사치스러운 파니니가 되겠어.‘

진혁은 파니니 만드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

‘빵 종류가 한둘이 아닌데.’

그는 이탈리아의 빵에 대해서는 그리 잘 알지 못했다. 기껏해야 치아바타와 그리시니, 파니니가 이탈리아 빵이라는 정도다.

그래서 몇 가지 정보를 더 얻고자 이탈리아의 빵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치아바타(Ciabatta)는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방의 빵이다. ‘치아바타’라는 단어는 이탈리아어로 ‘슬리퍼’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이름이 납작한 모양에서 유래했다고 추정한다. 북서부에는 그리시니(Grissini)라는 빵 또한 있는데, 손가락 정도 굵기로 바삭바삭하고 길게 구워낸다. 네모나고 납작한 치아바타와 그리시니는 뚱뚱이와 홀쭉이처럼 모양도 질감도 달랐다.

하지만 진혁의 시선을 정말로 빼앗은 것은 다른 빵이었다.

포카치아(Focaccia)는 발효시킨 반죽을 납작하게 만들어 구워내는 빵이다. 모차렐라 치즈나 버섯, 햄 따위를 올리기도 한다. 지방에 따라서는 반죽을 발효시키지 않아 인도의 난처럼 굽기도 한다. 이왕 이탈리아에 온 것, 진혁은 파니니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닥치는 대로 다 굽자.’

하나의 오븐에 다양한 종류의 반죽을 한꺼번에 구울 수는 없다. 빵 종류마다 필요한 온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망 베이커리>에도, <해와 달>에도 여러 개의 오븐이 상비되어 있다.

하지만 이 호텔의 스위트룸에 준비된 객실주방용 오븐은 단지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굉장히 오래된 전기 오븐이다. 진혁은 이탈리아어와 영어로 된 설명서를 대강 뒤적여 보다가 집어 던졌다.

얇은 종이가 팔랑팔랑 날아갔다.

‘적당히 양강지공을 써서 구우면 되겠군.’

일단 방 내에 오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임진혁은 연결된 방문을 열고 일행의 상태가 어떤가 확인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한 비서가 나와서 진혁의 옆에서 함께 브라이언을 들여다보았다.

“너무 오래 자는데요. 대기하고 있는 의료진을 부를까요?”

“일주일 동안 밤을 새우고 나서 자고 있는 거라.”

“그동안 못 주무시기는 했죠. 임진혁 쉐프님은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나야 괜찮지.”

“….”

‘수혈까지 짚었으면 며칠 잤겠군.’

잠깐 자고 일어나라고 극히 약한 충격을 주었을 뿐인데 얼마나 피곤했는지 일어날 기색이 전혀 없었다.

수혈을 짚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오래 잘 정도로 상태가 나쁜 줄은 몰랐다. 육체가 피곤한 것만이 아니라, 심력이 약해져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전쟁터에 처음 나갔다 온 신입 교도들이 이런 행태를 보이곤 했다. 육체적으로는 다친 데가 없으나 정신적으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아 사소한 충격에도 쉬이 쓰러지는 것이다.

진혁은 침대 옆에 서서 브라이언 신의 상태를 살폈다. 아직도 많이 피로해 보였다. 지금 상태로 보아서는 서너 시간 후면 일어날 것이다.

한 비서가 진지하게 말했다.

“병원에 입원시킬까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두어 시간 후에는 일어날 거야.”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빵을 굽고 난 후에는 누군가에게 먹여봐야 한다. 그는 그때 맞추어 브라이언을 깨울 생각이었다.

“자, 그럼 한 비서도 가서 쉬고.”

“예.”

한 비서는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결혼 전에는 서로 공대를 하였으나 결혼한 후에는 말투가 바뀌었다. 미미의 부탁도 있어, 진혁 역시 반은 내 사람인가 하고 편하게 대했다.

일거수일투족을 문자로 보고할 필요 없이, 한 비서가 알아서 보고서를 쓰는 것 같으니 편하기도 했다.

임진희가 조언한 대로 하루 한 번은 미미에게 연락하려고 노력했으나, 무엇을 어떻게 왜 어디서 하는지를 전부 다 적는 것은 귀찮았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은 전부 한 비서의 눈과 귀를 통해 미미에게 흘러가고 있다. 그러니 미미에게 짧게 이야기해도 된다.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미미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부터 빵 만들 예정]

‘내가 생각해도 참 잘 썼어.’

미미 역시 문자를 본다면 만족할 것이다. 그는 요점이 간결하게 담긴 문자 메시지를 전송했다.

그리고 브라이언의 곁을 떠나 패션 스위트룸의 부엌으로 향했다.

“지금부터 빵을 만드실 겁니까? 저는 비즈니스 룸에 다녀오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십시오.”

한 비서는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황태명과 미미가 확실히 부하들 교육은 제대로 한다.

‘유일봉이나 마리오, 브라이언 같은 녀석들은 빵 만들 때마다 꼭 얼굴을 들이밀고 모든 것을 가르쳐달라며 병아리처럼 삐약삐약 울어대니 말이지.’

진혁은 그런 녀석들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끼는 편이다.

하지만 이렇게 재미있는 재료를 얻어 이것저것 시험해 보면서 즐기고 싶은데,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싫다. 온몸이 근질근질하다.

그는 주방에 서서 손을 씻었다. 차가운 물방울이 튀어서 손에 닿았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상상하니 전신이 희열에 가득 찬다.

최상의 영약을 얻은 무인처럼 신이 난 진혁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비닐봉지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열어젖혔고, 안쪽에 들어 있던 식재료들이 원기 왕성하게 뛰쳐나왔다. 수도꼭지가 저절로 돌아가 물이 튀어나왔다. 물은 싱크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비상하는 수룡처럼 뛰쳐나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토마토를 한껏 포옹했다. 자잘한 물방울들이 토마토를 갖가지 각도로 스쳐 지나가며 겉에 묻어있던 먼지와 흙을 털어냈다. 반들반들하니 깨끗해진 토마토의 꼭지는 톡 떨어져 나와 쓰레기통을 향해 달려갔다.

묵직한 나무통 뚜껑은 슬며시 일어나 아래쪽으로 비켰고, 안쪽에 소담히 담겨 있던 치즈가 춤추듯 떠올라 갈라졌다. 지반이 움직여 땅이 갈라지는 것처럼 금이 간 경질 치즈는 마침내 또옥 떨어져 나와 허공에 둥실둥실 떠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아침에 암탉이 낳았다던 신선한 달걀은 껍질을 가르고 뛰쳐나왔다. 봉긋이 솟은 주홍빛 노른자가 밀가루가 소용돌이치고 있는 회오리 안에 뛰어들었다.

“포카치아는 발효한 반죽과 발효하지 않은 반죽, 두 종류로 해볼까.”

조그마한 소용돌이들은 주변의 재료를 쉼 없이 빨아들였다. 보들보들하고 노란 질 좋은 버터는 순식간에 휘말려 들어가 금실처럼 가느다랗게 섞여들었다. 알알이 고운 소금과 설탕 역시 빠지지 않고 광란의 왈츠에 합류했다.

재료들이 적당히 섞여가자 진혁은 협주곡을 지휘하는 지휘자처럼 손을 살짝 내렸다가 올렸다.

빠른 템포의 왈츠 곡이 느릿느릿한 발라드로 바뀐 것처럼, 점차 덩어리져 형태를 형성하기 시작한 반죽들은 저마다 꿈틀거리며 늘어났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허공에 동그마니 떠 있는 채 울룩불룩하게 부풀어 올랐다가 다시 꺼져 들고 또다시 부푼다. 쉴 새 없이 모양을 바꿔 가는 반죽들은 언뜻 보면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실험체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후후.”

진혁은 이 순간이 좋았다. 밀가루가 반죽이 되어간다.

저마다 흩어져 언젠가 불릴 순간을 기다리며 묵묵히 기다리고 있던 재료들. 달걀과 소금, 설탕과 버터, 밀가루가 다 함께 모여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전체는 부분들의 단순한 합이 아니다. 부분은 모여 새로운 총체가 된다.

밀기울이 조금 섞여 거친 밀가루도, 파스타용으로 주로 쓴다던 고운 밀가루도 전부 동글동글하니 보기 좋은 반죽이 되었다.

발효해야 하는 반죽들은 저마다 총총 자기 자리를 찾아가 틀로 향했다.

발효가 필요 없는 치아바타와 포카치아 반죽은 진혁의 앞에서 몸을 자랑하기라도 하는 듯이 폴짝폴짝 날뛰었다. 설탕조차 없이 소금과 버터, 밀가루라는 최소한의 재료로 만들어진 반죽이다.

진혁은 매와 같은 시선으로 반죽을 평가했다.

말랑하니 찰기 있는 반죽은 딱 좋은 상태로 보였다. 몰랑한 반죽을 칼로 썩둑 썩둑 썰어버리자 우표처럼 납작한 치아바타 반죽들이 저마다 팔랑거리며 제 자리를 찾아갔다.

포카치아 반죽 역시 제 모양이 맘에 드는지 들썩들썩 이며 허공에 차곡차곡 쌓였다.

진혁은 오른손에 그대로 양강지기를 불러일으켰다.

‘굽자.’

둥둥 떠 있던 반죽들이 손 근처로 모여들었다. 열기를 받은 반죽은 뒤로 물러나 아직 말랑한 반죽과 자리를 교대했다. 양강지기의 세례를 받은 반죽은 안쪽부터 점차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태울 리도 없고, 덜 익히지도 않는다.

꼭 필요한 만큼의 양기를 받아들인 반죽들이 노릇노릇 바삭바삭하게 구워져 그윽한 빵 향기를 풍길 무렵,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으으윽….」

두 시간이 지나 브라이언 신이 일어난 것이다. 비틀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기 5초 전, 진혁은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서랍장이 열리고 빵 트레이가 뛰어올라 식탁 위에 안착했다. 유산지가 팔랑이며 찢겨 나와 트레이 위에 조심조심 내려앉았고, 그 위에 완벽하게 구워진 포카치아와 치아바타들이 조르륵 늘어섰다.

모차렐라 치즈가 뭉텅뭉텅 떨어져 나와 포카치아를 포근하게 감쌌다. 이불처럼 치즈가 덮은 그 위에 선드라이 토마토와 향긋한 바질, 페퍼로니 햄과 페퍼론치노가 뛰어올랐다. 희고 몽글몽글한 모차렐라 치즈는 봉긋이 솟아 토마토와 바질, 햄과 고추를 감싸 안았다.

부드러운 모차렐라 치즈와 달리 단단한 경질 치즈 덩어리는 손가락만 한 덩어리로 잘려 허공에 잠시 부유했다. 그리고 바로 산산 조각났다.

박살 난 치즈 가루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조각이 되었다. 그 조각들은 포카치아와 치아바타 위에 산산이 뿌려졌다.

치아바타와 포카치아가 완성되는 동안 다른 반죽들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허공에서 발효되고 있던 반죽들은 저마다 비닐 옷을 한 겹씩 걸치고 발효기 안으로 풍덩 풍덩 뛰어들었다.

발효기는 뚜껑을 닫고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히 머물렀다.

그리고 5초가 지나 문이 열렸다.

-딸깍

「임진혁, 여기까지 와서 빵 만들고 있었어? 진짜 너답다.」

브라이언이 잠이 확 깼는지,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진혁이 대답했다.

「잘 잤어?」

「그러게, 지금 몇 시지… 헉?!」

이탈리아에 도착한 것은 어제다. 24시간 이상을 잠들어 있었던 브라이언이 깜짝 놀라서 말했다.

「맙소사! 내가 이렇게 오래 잤다고?!」

「아주 잘 자더라.」

「미안해! 와서 자려고 이렇게 따라온 건 아니었는데. 여기는 내가 정리할게」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거 시식부터 해야지. 배고플 거 아니야?」

「오, 내가 먹어도 돼?」

브라이언은 코를 벌렁거리며 눈앞에 있는 포카치아 앞으로 다가갔다.

「치즈 향이 아주 좋은데!」

하루 이상 열지 않은 입에서는 구취가 강하게 났다. 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일단 씻고 와서 먹어라, 너 냄새 나.」

「으앗, 잠깐만!」

브라이언은 황급히 화장실을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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