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442화 (440/656)

제 442화

「제 삼층 바위가 하얀 3단 케이크로 바뀌었네요?」

「그래, 이미 갑옷이 등장하는 판국에 바위 모양 케이크는 필요 없어. 차라리 이 성을 만든다면 모를까.」

「이 정도 성을 케이크로 만들려면 최소한 몇 달 이상 걸리잖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바위는 기각.」

「뭐, 알겠습니다.」

진혁은 약간 실망했다.

「쉐프님은 바위나 돌 같은 걸 아주 잘 만드시잖아요. 그걸 배우고 싶었는데.」

실비안 웨인스톡이 눈썹을 정중앙으로 모으며 물었다.

「그래서 웨딩 케이크를 주문한 사람에게 검 꽂힌 바위를 갖다 주겠다고?」

「음, 뭐, 하하하하.」

「아니지, 아니야! 웨딩 케이크의 스피릿은 어디까지나 축제야! 누가 남의 결혼식에 거대한 바윗덩어리를 갖다 놓고 싶겠어?」

「바위처럼 생겼지만, 그 안에는 달콤함이 숨어있다! 진짜 바위 장식품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니다~라는 컨셉이면 다들 좋아할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안 좋아해. 실리콘 형틀 주문한 내역서 좀 보여 줘.」

「여기 있어요, 쉐프.」

한참 동안 서류를 넘겨 보던 실비안 웨인스톡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군.」

진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케이크의 형태와 크기만을 알려준 채로, 러프 스케치 한 장을 바탕으로 어떤 형틀을 주문해야 할지 시켰다.

일반적인 초보 페이스트리 쉐프라면 모형을 만들 수 있는 재료라도 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진혁은 불평불만 없이 바로 디자이너를 찾아갔고, 막힘없이 숫자를 불러주었다.

실비안 웨인스톡은 새삼스럽게 다른 눈으로 임진혁을 내려다보았다.

수십 년 동안 케이크를 만들어온 자신이나 되어야 이렇게 틀을 짜낼만한 수치를 술술 알려줄 수 있다.

「솔직히 이 정도까지 해줄 줄은 몰랐는데.」

웨인스톡이 중얼거렸다. 그녀가 예상한 진혁의 행동은 이런 게 아니었다.

이런 일을 시키면 반응은 셋 중에 하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런 건 할 수 없습니다.’

속 빈 쭉정이들은 못 하겠다고 도망쳐 버린다. 개중에 시킨 일은 못 하겠지만 실비안 웨인스톡의 이름값은 빌리고 싶은 겁쟁이들은 변명을 한다.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되죠?’

하지만 새싹부터 푸른 놈들은 다르게 행동한다. 자신의 실력을 인정하고 도움을 구한다.

‘솔직히 그냥 수치를 뽑지는 못하겠습니다. 직접 틀을 만들어 보고 수치를 재서 알려드리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아드레아노 존부도, 시몬 리옹도 괜찮은 녀석들이었다. 존부는 주방을 빌려달라고 해서 모형을 만들었고 시몬 리옹은 스케치를 해서 자로 쟀다.

한 인간이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만한 과제를 부여받았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

회피하는가, 아니면 맞서는가.

진혁은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그냥 해결해버린 것이다.

「공간적인 감각이 아주 뛰어나, 임진혁 베이비. 특별히 수치를 계산하거나 모형을 만들어서 얹어 보지도 않고 지금 바로 그냥 숫자를 뽑아낸 건가?」

「딱 보면 알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아니, 평생 봐도 모르는 사람이 많아.」

실비안 웨인스톡은 어렸을 적에 블록 놀이를 아주 좋아했다. 지금도 다양한 한정판 블록을 수집해서 종종 조립한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공간지각력이 아주 우수했다. 무언가를 보면 비율과 크기를 맞추어낼 수 있다.

미술가들이나 건축학도 중에는 종종 자신과 비슷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페이스트리 쉐프 중에서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제과제빵사를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임진혁 베이비, 정말로 놓치기 싫어지는데.」

거대한 구렁이가 혀를 날름거리며 다가오는 것 같은 시선에 진혁이 즉시 대답했다.

「저는 이미 결혼했습니다.」

뜬금없는 소리에 실비안 웨인스톡이 까르르 웃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누가 손자보다 한참 어린 아기랑 결혼하고 싶대?!」

「제 회사도 있고요.」

「알아, 알아.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걸.」

그녀는 불가능한 일에 집착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쉬웠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으면.’

「그럼 새로 바꾼 도안대로 가는 겁니까? 그럼 실리콘 형틀도 몇 개 바꿔야 해요.」

「오케이.」

「오늘은 슈가 크래프트용 반죽을 미리 만들어 놓으실 거죠?」

「케이크도 구울 거다.」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엥?」

「오늘은 스튜디오만 보러 온 거니까요. 돌아가서 해야 할 일도 있고요.」

「아니, 해야 할 일이라니? 여기에 날 도우러 온 거잖아. 옆에서 바싹 붙어서 안 가르쳐 줄 것도 배워가야지.」

「이탈리아의 시장에 가 보려구요. 신선한 해산물 질이 좋고 밀가루도 종류가 다르다고 하길래, 가족들 선물도 좀 사고 새로운 빵도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알았어, 그럼 어서 들어가 봐. 장거리 비행기 타고 갓 도착한 사람을 내가 너무 부려먹었네.」

「그러면 내일 뵙겠습니다.」

컨테이너에서 나오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한 비서가 보였다. 반면에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조이 랜디도 있었다.

「그럼 우리는 돌아가자고.」

「호텔로 돌아가십니까?」

「아니, 여기에서 제일 큰 시장으로 가볼까 해.」

「알겠습니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운전수는 진혁을 태우고 바로 시장으로 출발했다.

「하시려던 일은 전부 끝마치셨습니까?」

「음, 뭐. 성 구경도 나쁘지 않았어. 무기나 갑옷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고.」

한 비서는 스마트폰에 키보드를 연결하더니 바쁘게 타이핑을 하기 시작했다. 업무용 이메일이라도 쓰는 것이리라. 방금 조이 랜디와 체결한 계약에 대해서 보고할 수도 있고, 임진혁의 동향에 대해서 황미미에게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진혁은 어느 쪽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변 사람들이 기록하여 광안마에게 넘겨 주는 데에 아주 익숙해져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무래도 부하보다 부인이 낫지, 암.’

그는 태연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금발 벽안의 색목인부터 시작해서 피부색이 짙은 이들까지 다양한 인종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신혼여행을 온 것으로 보이는 동양인 부부도 꽤 많았다.

웨인스톡 스튜디오에서 골목골목을 지나 시장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해가 져가고 있었다. 그는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종류의 밀가루를 구경했다.

「이건 00이라고 쓰여 있는데?」

「그건 제분율을 말하는 겁니다. 총 다섯 종류로 나뉘는데 00, 0, 1, 2, 인테그랄레 이렇게 표기하죠. 00이 완전한 가루 상태의 백밀가루입니다.」

운전수가 따라다니면서 통역해 주었다.

「그럼 인테그랄레가 통밀가루겠군, 아직 밀기울이 섞여 있는데.」

「맞습니다. 이쪽 이 듀럼밀은 무르자에서 주로 생산되는 밀가루입니다. 글루텐이 적고 소화가 잘 되는데 보통 파스타를 만드는 데 쓰인다고 하죠.」

「좋아, 여기부터 저기까지 다 주세요.」

「이거랑 이건 피자용 밀가루인데요. 파스타용도 삽니까?」

「괜찮아, 다 달라고 해줘.」

진혁은 밀가루 말고 다른 것들도 샀다. 잘 말린 이탈리아산 토마토는 물론이며 다양한 종류의 치즈도 구입했다. 동글동글한 모차렐라 치즈는 딱 보기에도 탱글탱글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그는 통에 담겨있는 단단한 치즈도 발견했다.

「이것도 주세요.」

「이걸 다요?! 가게에서 쓰시려구요?」

「음, 비슷합니다.」

치즈 가게 주인은 흔쾌히 거대한 통째로 치즈를 넘겨 주었다. 거의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만 한 무게의 치즈를 넘겨받은 운전수가 질린 표정을 했다.

「임진혁 쉐프님은 정말로 요리사시구만요.」

「이런 재료를 봤는데 안 사갈 수는 없죠.」

각종 향료와 허브, 향신료 역시 빠뜨리지 않았다.

「이 페퍼론치노는 한 봉지 가득 주세요, 부탁합니다.」

신선한 바질과 사프란을 비롯하여 계피와 마늘, 양파, 그리고 이탈리아산 작은 고추까지 빠짐없이 구매했다.

「여기 이건 1kg 부탁드립니다.」

얇게 썰어 파는 이탈리아산 햄까지 샀다.

‘오랜만에 제대로 이탈리아식 파니니를 만들어 볼까.’

변형된 피자 빵을 만들어 본 적은 있지만, 본격적으로 이탈리아산 재료를 사용해서 이것저것 만들어 본 적은 없다.

다행히 지금 머무는 호텔의 스위트룸에는 손님이 이용할 수 있는 주방이 설치되어 있다. 물론 오븐 역시 있다.

자동차 뒷좌석에 앉은 임진혁은 투명한 유산지에 감싸여 있는 통통하고 흰 치즈 덩어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한국에서 받아 쓰던 모차렐라 치즈 역시 직접 짠 우유로 만들어 신선한 유기농 치즈다. 하지만 역시 본토의 치즈는 다른지, 살짝 상앗빛이 감도는 치즈는 정말로 쫄깃쫄깃하고 탄력이 있었다.

‘이 치즈를 잘라서 파니니 위에 올려도 좋고, 아니면 바게트 위에 올려서 피자 바게트를 만들어도 되겠다. 아니면 갓 딴 토마토와 함께 큼직큼직하게 썰어서 카프레제 샐러드를 만들어도 좋겠군.’

갓 구운 치아바타와 함께 먹기에도 어울리는 음식이다.

방금 사 온 재료들이 마음에 들어 저도 모르게 콧노래가 흥얼흥얼 흘러나온다.

임진혁은 유산지에 포장되어 있는 모차렐라 치즈를 내려놓고, 거대한 크기의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치즈를 통통 두드려 보았다.

동그란 나무통에 들어있는 이 치즈는 통을 포함한 무게가 무려 35kg이나 되었다. 목제 통에는 치즈를 직접 생산한 농장 주인의 이름과 유통 기한이 달군 인두로 찍혀 있다.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라는 치즈 이름은 수없이 도장이 찍혀 있어 언뜻 보면 글자가 아니라 통에 새겨진 무늬처럼 보였다.

6개월에서 수년간 숙성해 점점 더 굳게 만든 이 치즈는 단맛과 짠맛, 신맛과 짠맛, 그리고 매운맛까지 모두 강렬하고 풍미가 강해 함부로 많이 쓰기는 어려운 재료다.

진혁은 나무통의 뚜껑을 살짝 열어보았다.

수년간의 숙성을 거쳐 단단한 갈색 겉껍질이 형성되어 있어, 안쪽의 치즈는 보이지 않았다. 강렬한 치즈 향이 훅 끼쳐 나왔다.

한 비서는 이맛살은 찌푸리지 않았으나 코를 벌렁거렸다. 앞쪽 운전석에 앉아 있던 운전수가 갑자기 휘파람을 불었다.

「아까 구입하신 치즈로군요?」

「음.」

「그걸로 뭘 만드실지 몰라도 엄청 기대되네요. 저희들도 먹을 수 있을까요?」

「뭐, 봐서요.」

이렇게 단단한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치즈는 그대로 먹지 않는다. 보통 갈아서 요리에 약간 뿌리는 정도로 사용한다. 진혁은 이 치즈와 모차렐라 치즈를 이용해 파니니를 구울 생각이었다.

숙소에 도착한 후 운전수는 깍듯이 인사를 했다. 그는 자리를 떠나려다가 한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나랑 같이 이거 옮기고 가시죠.」

「아, 네네! 물론이죠!」

운전수와 한 비서는 진혁이 구매한 식재료들을 들고서 호텔 로비를 지났다. 하지만 그들은 엘리베이터에 탈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글쎄요, 무슨 사건이라도 생겼나.」

엘리베이터 앞에는 노란 테이프가 둘러쳐져 있었고, 경찰이 두 명 서 있었다. 사람들은 빠른 이탈리아어로 이야기하느라 바빴다.

한 비서는 두리번거리다가 구석에 서 있던 낯익은 도어맨을 발견했다. 그는 양손에 식료품이 가득 든 봉지를 든 채 도어맨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손님들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신경 쓸 일이 아니라니요, 지금 저희가 숙소로 올라가야 하는데 엘리베이터를 쓸 수가 없지 않습니까.」

「죄송합니다, 저희가 운반해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이건 제가 해야 할 일이라서요. 올라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해 주세요.」

도어맨은 쩔쩔매며 말했다.

「저한테 주세요.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들고 계신 짐은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긴 직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지금 저희가 여기에 지불한 숙박비만 해도 얼만데.」

한 비서가 따지고 들기 시작했다.

35kg에 달하는 치즈 통을 가슴께에 안고 있던 운전수 역시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한 비서를 거들었다.

진혁은 맨 뒤에서 모차렐라 치즈를 들고서 느릿느릿 걸어왔다.

「그냥 내가 들고 올라가지.」

한 비서가 진지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그냥 저희가 들고 계단으로 올라가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거나.」

도어맨은 일행을 계단으로 안내했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그는 고장 난 라디오처럼 떠들어 댔다.

「아까 나가실 때만 해도 분명히 거울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게 사라져 버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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