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1화
실비안 웨인스톡이 경쾌하게 대답했다.
「나? 나는 둘 다 마음에 드는데.」
「예?」
「어차피 장식용 케이크와 먹을 케이크, 다 만들어야 하잖아? 두 가지의 디테일이 바뀌어도 좋지.」
「세상에, 실비안 쉐프! 우리 지금 일주일밖에 없다구요! 처음부터 갑옷 모양의 케이크를 자세하게 일주일 만에 만드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커다랗고 정교한 갑옷을 두 개씩 만든다고요?! 그러니까 총 네 개! 시간이 없어요! 그러다가 쓰러지신다구요.」
「난 아주 건강해. 야근 좀 하면 되지.」
보조가 제안했다.
「이 갑옷 모양을 파츠 전체를 만들 필요는 없잖아요? 요령 있게 하면 돼요. 보이는 부분에는 자세히 장식하고, 관절이 겹쳐지는 부분이나 케이크에 가려져서 생략되는 부분은 만들지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리고 허리 아래나 발아래 정도는 케이크 속으로 묻어 버리면 조금 나을 것 같은데. 시간 여유는 좀더 생길 거예요.」
실비안은 턱을 괴었다. 그녀는 보조가 말한 이야기를 듣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츠를 만들어서 붙이지 말고 아예 통짜로 깎아서 만들자고? 그러면 지나치게 무거워질 텐데. 맛도 없어질 것 같아.」
「설탕 공예를 하는 이상 미친 듯이 달콤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거기에 맞춰서 속에 아주 짠 맛을 넣으면 어떨까요? 미국산 포테이토 칩들은 굉장히 짜던데.」
「시판하는 포테이토 칩은 첨가물이 너무 많이 들어있어.」
「직접 잘라서 튀기면 되죠. 외주 주면 돼요.」
「흐음.」
실비안의 고개가 점점 더 기울었다. 그녀는 반쯤 턱을 괴고서 한쪽 뺨을 테이블에 거의 갖다 대다시피 한 자세로 생각에 잠겼다. 진혁이 입을 열었다.
「그건 안 됩니다. 통짜로 초콜릿을 깎건 설탕을 깎건 생크림 케이크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요.」
「아!」
「후르츠 파운드 케이크가 아니잖습니까.」
보조가 말했다.
「오히려 그래서 더 나을 수도 있어. 통짜 초콜릿 조각을 가운데에 세우고 케이크를 그 모양에 맞춰 깎아서 겉에 크림을 바르는 거야. 케이크가 초콜릿을 지탱하면….」
「그만, 그건 안 되는 소리인 거 알지? 초콜릿은 온도가 높아지면 녹아. 맛만 봐도 균형이 안 맞고. 안에 포테이토 칩을 넣든 말든 퐁당이랑 합쳐지면 너-무 달아. 오래 보관할 수도 없고.」
「초콜릿에 유화제를 조금 많이 넣으면 괜찮지 않겠어요?」
실비안 웨인스톡이 쩌렁쩌렁하게 호통을 쳤다.
「내 케이크는 패스트푸드점의 햄버거가 아니야! 그리고 내 손님들이 원하는 것도 거대한 초콜릿 갑옷이 아니라고.」
「그거야 그렇죠. 무게를 감당하려면 속은 비어 있어야 합니다. 얼굴 정도는 만들어 주겠지만.」
「초콜릿 쇼 피스를 다루어 본 적이 있지, 임진혁 쉐프?」
「예. 실리콘 형틀 제작을 부탁할만한 곳이 근처에 있을까요? 하루 이틀 내에는 나와줘야 하는데. 세세한 부분이 필요한 데가 한두 개가 아닙니다.」
「그건 여기 있는 조이가 알아서 해줄 거야.」
조이라고 불린 보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와 항상 다니고 있는 형틀 성형 팀이 따로 있어요. 제2 컨테이너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쪽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그리고 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컨테이너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제 비서가 현장 내의 보험, 야간 근로자 보호 조항? 뭐 그런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던데요.」
「계약 조건이 조율이 안 됐어? 그것도 조이하고 가서 이야기해! 조이, 진혁이 말하는 대로 해 줘.」
「알겠습니다, 쉐프!」
임진혁과 조이 랜디, 두 사람은 컨테이너에서 나왔다. 조이는 먼저 건너편 컨테이너에서 대기하고 있던 실리콘 전문가 프랜시스를 진혁에게 소개해 주었다.
「프랜시스는 우리가 주문하는 어떤 것이라도 정확하게 만들어 줘요. 하지만 사이즈와 각도는 제대로 알려 줘야 해요.」
「아, 문제없죠. 그리고 여기는 한 비서입니다. 내 근로 조건에 대해서는 비서와 상의하면 돼요.」
한 비서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씩 웃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조이 랜디.」
「절 아십니까?」
「실비안 웨인스톡 쉐프님의 유능한 보조 쉐프 겸 비서로 활동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바닥에 있는데 모를 수가 없지요.」
진혁은 미묘한 눈빛으로 한 비서를 바라보았다.
‘한 비서, 자네는 내 결혼식 이후에 제과제빵 업계에서 일하기 시작했잖아.’
즉 한 비서의 이쪽 분야 경력은 한두 달이 채 안 된다. 미국과 한국의 변호사 자격도 갖고 있으며 북경어, 영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유능한 인재다.
지금은 진혁을 따라다니면서 일정 관리와 온갖 사무를 처리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게 쓰이기에는 아까운 사람이다.
‘딱 그놈이 키운 사람이네.’
그는 황태명이 직접 골라서 미미에게 붙여 놓은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그리고 태명의 지시를 받아 임진혁의 비서로 활동하고 있다. 분명히 어렸을 때 큰 은혜를 입었다거나 해서 진심으로 감복해 황씨 일가를 위해서 일하고 있을 것이다.
「실비안 웨인스톡 쉐프의 스튜디오에서 야근은 존재하질 않아요. 하지만 웨인스톡 쉐프님 스스로가 열정을 못 이겨서 일을 더 하시는 경우는 종종 있어요. 그런 경우에 신입 쉐프들이 신나서 같이 하다가 체력이 달려 쓰러지기도 하고요. 아무도 야근을 강요하지 않습니다만 스스로 원하신다면 하셔도 좋아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야근 수당은…?」
「기본적으로 없지요, 야근을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한 비서는 이 시점에서는 아직 말을 아꼈다. 그리고 미미가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를 꺼냈다.
「사고에 대비해서는 어떤 예방 대책을 하고 계십니까?」
「사고도 한 번도 없었고요, 저희가 세계의 각 나라에 출장을 하는 만큼 그 나라의 현황에 맞게 대비를 하고 있어요」
「천재지변이란 어디도 피해가지 않습니다. 특히 주방은 불과 칼을 다루는 만큼 더 위험하죠. 임진혁 쉐프님이 여태까지 아무 사고가 없으셨다고 해서 앞으로도 문제가 없으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특히 지난 제과제빵 대회 때에는 국제대회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옆 팀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등의 불행한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곳에 만약에 화재가 발생한다면 어떤 조치가 취해지게 되어있나요? 인근 소방서의 평균 출동 시간을 보니 악명 높은 로마의 교통 체증 때문에 최소한 30분 이상이 소요된다고 하던데요」
「앗, 그건 저희 스튜디오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황미미 회장님께서는 임진혁 쉐프님과 화촉을 밝혀 서로 평생을 함께하기로 맹세하신 지 이제 겨우 두 달째가 됩니다. 그래서 부군을 위해 최선의 조치를 취하시고자 합니다. 저희 측에서 비용을 부담해 최신 화재 진압 장비를 설치하고자 하는데….」
「그게 저희도 그러려고 했는데 여기는 문화재라서 최상급 스프링클러를 설치할 수가 없어요, 물과 전기를 연결해야 하는데 벽돌 하나도 구멍을 뚫을 수가 없어서요. 그래서 제과 주방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서 저희가 컨테이너 채로 와 있잖아요?」
「아니죠, 아니죠. 실비안 웨인스톡의 이동하는 페이스트리 키친 스튜디오는 원래 컨테이너잖습니까? 그러니까 제과주방이 갖춰지지 않은 이 고성(古城)에서의 셀러브리티 웨딩 케이크 주문도 받을 수 있었던 거고요.」
이미 모든 것을 파악했다는 듯한 재수 없는 말투다.
실리콘 디자이너에게 형태 주문을 하면서 진혁은 한 비서와 조이 랜디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어떻게 잘 아시네요.」
「하하! 제과제빵계에서는 소문이 빠르니까요.」
진혁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한 비서… 제과제빵계 소문은 무슨, 그냥 조사한 것 같은데.’
사업상 관계있는 이들에게 이 정도라면 진혁 자신에 대해서는 얼마나 조사를 했을까. 진혁은 이미 죽은 황태명을 생각하며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저희는 할 만큼 하고 있어요」
「물론입니다. 가능한 내에서 최선의 대책을 취하고 계시지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새신부는 걱정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희 측에서 비용을 지불하고, 외상과 화상을 비롯한 모든 처치에 능숙한 응급 의료진이 비상시를 위해 3교대로 대기하도록….」
「맙소사! 진혁 쉐프님이 여기에 계신 것만으로도 이곳이 백배는 더 안전해지겠는데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저희가 가입한 보험 조건상 임진혁 쉐프가 아닌 다른 분들이 부상을 입거나 사고를 당할 경우에는 혜택을 받으실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현황에 안타까움을 금치 않을 수 없습니다. 당장 저희가 일주일간의 체류 동안 지불하는 비용만 해도 이 정도인데….」
「…저희가 진혁 쉐프님과 브라이언 쉐프님을 초대하면서 든 비용은 새 발의 피밖에 안 되네요.」
「예, 하지만 모두의 안전이 중요하니까요. 현재 이곳의 보험 프로그램은 에이머 사에 가입되어 있으신 거로 알고 있는데 제가 이런 말씀까지는 드리기 뭐하지만, 에이머 사의 경우에는 최근에 런던에서 발생한 화재에서 대응이 늦어서….」
‘이봐, 이봐. 어느 보험 회사에 가입했는지까지 상대방이 알고 있다는 점에서 이상하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아? 왜 경계하지 않냐고.’
조이는 누군가 다단계에 끌어들이기라도 하면 바로 팔랑팔랑 넘어갈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한 비서는 이 또한 조사했을 것이 분명했다.
조이 랜디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래요?! 하지만 이미 가입해서 바꿀 수도 없고 위약금도….」
「임진혁 쉐프님은 황미미 회장님께서 새로 런칭하신 보험 프로그램에 가입되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진혁 쉐프와 함께 일하시는 분들이 가입하고자 할 경우에 저렴한 비용으로….」
「우와, 엄청나게 좋은 조건인데요?!」
「그렇습니다. 저희 모두 다 이 케이크가 성공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같은 실무자들이야 예술하시는 분들을 뒤받쳐주기 위해서 열심히 일할 따름이죠, 그분들은 모르시더라도요.」
「맞아요, 웨인스톡 쉐프님은 아주 좋으신 분이지만 서류 업무는 잘 못 하세요. 그래서 제가 다 책임져야 하는데….」
「쉽지 않죠.」
「맞아요, 맞아요!」
조이 랜디는 이미 완벽하게 설득당했다. 진혁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협박이 아니라 협상을 하지. 이쪽에서 원하는 것이 쌍방이 공통으로 원하는 가치라고 생각하게 만든 다음에 이익을 취해. 사파건 정파건 가리지 않고 누구나 설득할 수 있었던 녀석이었어. 똑같네, 똑같아.’
한 비서는 임진혁이나 황태명, 황미미의 앞에서는 항상 말을 아끼고 철저하게 지시대로 행동해 왔다. 하지만 지금 조이 랜디를 대하는 걸 보면 천년 묵은 구렁이 같았다.
죽은 친우를 생각하며 진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중에 무덤에 술이라도 뿌려 줘야겠다.’
혼자서 고개를 젓고 있는 그를 보며 실리콘 형틀 디자이너가 물었다.
「내일 오후 8시까지 만들어 드리겠다고 했는데요, 혹시 이 시간이 너무 늦나요? 조금 더 빨리 필요하실까요?」
「아, 네, 그 정도면 괜찮습니다. 제가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잠깐 듣다 보니.」
그녀가 생글생글 웃었다.
「여기 새소리가 참 아름답죠? 저도 처음에 왔을 때 놀랐어요. 이곳에서만 서식하는 특별한 보호종 새라고 하더라구요.」
진혁이 마주 웃었다.
「예, 새소리가 재미있네요.」
「하하, 표현도 독특하세요.」
실리콘 형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벌컥 열었다. 실비안 웨인스톡이었다.
「자, 자. 우리 진혁 베이비가 실리콘 형틀을 뭐뭐 주문했는지 볼까?」
「그럴 바에야 직접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에이, 멀리 한국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 정도 일은 해야 보람이 있지 않겠어?」
그녀는 새로운 종이를 팔랑거렸다. 다른 이들이 떠난 사이 실비안은 두 번째 제안의 스케치를 좀더 다듬어둔 모양이었다.
진혁이 이전에 그려놓은 스케치는 두 사람이 함께 케이크 위에 꽂힌 검을 잡고 있는 모양이다. 연인이라기보다 전우에 가까운 모양이다.
반면에 실비안이 새로 고쳐 그린 스케치는 조금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