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438화 (436/656)

제 438화

「그래?」

「잎이라도 다시 만들어야겠어.」

화사한 봄꽃들 사이에 연초록 잎새가 하나, 둘씩 꽂혔다. 두드러지지 않고 꽃을 더 예쁘게 꾸며주는 모양새에 브라이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비안 웨인스톡 쉐프가 만들어낸 모양을 그대로 모방한다며?」

의아해하는 브라이언에게 진혁이 대답했다.

「어제 나만의 무언가를 추가하라고 했잖아.」

「아.」

진혁은 시몬 리옹의 조언을 충실히 따랐다. 브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안 듣는 줄 알았는데 다 듣고 있구나.」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건 들어야지.」

「음.」

‘이런 제자가 있는 건 어떤 느낌일까?’

브라이언은 진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르치지 않아도 알아서 빨아들이듯이 흡수하는 제자.

자신이 진혁처럼 능력이 뛰어났다면 아드레아노 존부에게 인정받기도 쉬웠을까?

그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미 버린 길에 미련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다. 브라이언은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갈지 이미 다 생각해두었다.

「진주 핀은 어디 어디에 꽂을 거야?」

「케이크에 원래 꽂혀 있는 대로.」

「어떤 게 핀이고 어떤 게 짜놓은 크림인지 구별이 안 되는데.」

조그맣고 동글동글한 하얀 크림은 전부 다 비슷비슷하게 보였다. 식용 진주 핀 위에도 둥글게 크림을 짜서 입혀, 옆에 있는 크림 덩어리와 완전히 똑같아 보인다. 브라이언은 유심히 살펴보며 스케치에서 어떤 것이 핀일지 그림을 통해 구분해 보려고 했다. 진혁이 대답했다.

「한 줄로 죽 늘어선 구슬은 전부 진주 핀이야. 그렇지 않고서는 지탱할 수가 없어.」

「아, 그렇겠네.」

브라이언이 수긍했다. 진혁은 빠르게 진주 핀을 하나씩 꽂았다. 그리고 하얀 크림을 짜내어 종횡무진으로 크림을 얹기 시작했다. 마술처럼 빨라 신기할 정도였다.

그 광경은 정말로 놀라운 것이어서 아무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세상에.」

「맙소사!」

구경하고 있던 주영모와 시몬 리옹이 감탄사를 흘렸다.

「수십 년 동안 익스텐션 워크만 해온 것 같군.」

「진혁 쉐프가 슈가 크래프트 익스텐션 워크를 해온 적이 있나? 저건 한두 번 한 솜씨가 아닌데. 그냥 예술이야.」

「이건 사람들 앞에서 쿠킹 쇼를 해야 하는 레벨이야. 이대로 두기엔 아깝다고.」

두 사람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미 브라이언은 스마트폰을 들어 진혁을 촬영하고 있었다.

‘마리오 녀석, 방송하려면 이런 걸 방송해야지.’

실비안 웨인스톡 역시 진혁을 똑바로 보았다. 그녀 역시 진주 핀을 꽂고 있었다. 망설임 없이 핀을 꽂는 손길은 진혁을 보는 순간에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진혁은 이미 진주 핀을 전부 꽂고 그 위에 하얀색 장식용 설탕 반죽을 길게 늘어뜨려 장식하고 있었다. 끊어지는 일 없이 실처럼 주욱 늘어난 반죽은 베틀에 걸린 날실처럼 세로로 가지런히 놓였다. 씨실이 베틀 위를 종횡하며 새로운 옷감을 지어내듯 진혁의 손길이 오가면 바로 한 줄이 쌓인다.

「…대단하네.」

실비안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손을 멈추었다.

위아래 고정되어 팽팽하게 걸려있는 날실 반죽을 고정하는 것도 어렵지만, 위아래를 오가며 새로이 씨실 반죽을 더하는 것은 더 난이도가 높다.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끊어질 수도 있고, 끊어지면 다시 새로 그 실을 똑같은 굵기로 만들어서 이어 붙여야 하니 말이다. 실비안은 물 흐르듯 유려하게 움직이는 진혁의 움직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욕심난다.’

당장 저 청년을 아뜰리에로 초빙할 수 있다면 아뜰리에에서 케이크를 만드는 시간은 압도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실비안 웨인스톡이 손을 멈추고 진혁을 바라보자 아드레아노 존부 역시 그쪽을 보았다.

「…저건 이전에 봤던 영상과 비슷하군요. 솜씨가 더 늘었는데.」

「이전에 봤던 영상?」

「임진혁 쉐프가 동네 노인정에서 결혼하는 노인에게 웨딩 케이크를 선물한 적이 있습니다. 크로캉 부쉬 위에 시럽을 뿌렸는데, 그 시럽을 저런 식으로 한 번에 아주 예쁘게 뿌려서 아침 뉴스에서 나왔어요.」

「아하하.」

실비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진혁 베이비! 거기까지. 더 이상 보지 않아도 좋아.」

「이미 시작한 거 얼마 안 남았는데 완성할까 합니다.」

「그래,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야지.」

실비안 웨인스톡도 분주히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케이크에도 화사한 레이스 면사포가 씌워졌다. 스케치에는 보이지 않았던 정교한 꽃 모양이 나타났다.

「끝-!」

「완성입니다.」

실비안 쉐프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진혁 쉐프는?」

「아까 끝마쳤습니다.」

「세상에.」

임진혁이 만든 케이크 익스텐션 워크는 완벽했다. 실 한 번 끊어진 곳이 없었으며 성긴 곳 없이 촘촘하다. 꽃 모양은 아니지만 기묘한 기하학적 무늬가 엉켜 있는 사이사이 빈 부분이 있어 그 사이로 그림이 비추어 보인다. 멀리서 보면 치밀하게 짜였나 싶은 베일은 가까이에 다가서 보면 의외로 성기다. 덕분에 올그작작한 베일 사이로 단정하고 고운 케이크의 하얀 표면이 드러나고, 그 위에 그려진 꽃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나비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이 생동감이 있고 벌새는 폴짝 뛰어올라 케이크 위의 꽃에 덤벼들 것만 같다.

살아 숨 쉬는 것만 같은 그림, 그 그림을 강조하는 배치, 정교한 베일.

반면에 실비안 웨인스톡이 만든 케이크는 하나의 예술작품이었다. 애초부터 케이크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디자인된 익스텐션 워크는 드문드문 세로로 주욱 뻗어있을 뿐이었다. 진주 핀이 조밀하게 박힌 가장자리에서만 두 줄로 쭈욱 뻗어있어 면사포라기보다 새장처럼 보인다. 커다란 새장 안에 갇혀 있는 케이크와 아름다운 레이스로 장식되어 있는 케이크. 두 가지는 분명 같은 디자인에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달랐다.

실비안 웨인스톡이 말했다.

「진혁 베이비.」

「네?」

「긴말하지 않겠네. 연봉 20만 달러면 어떤가? 보조 자리는 아니야. 조금만 배우면 되겠어. 그러다가 내가 세미나를 물려 주지.」

브라이언이 흡하고 숨을 들이켰다. 아드레아노 존부와 시몬 리옹, 주영모 역시 크게 놀랐다.

‘조금만 배우면 되겠어, 라는 이야기는 가르쳐 주겠다는 이야기잖아!’

아드레아노 존부가 끼어들었다.

「세상에, 옆에서 헌신적으로 보조한 제가 아니라 임진혁 쉐프에게 제안하시는군요.」

「나도 나이가 있어. 당장은 아니지만 20년 후를 내다봐야지. 자네도 20년 후에는 늙었겠지만, 저 녀석은 이십 년이 지나도 아직 사십대잖아? 앞날이 창창하다고.」

‘지금 90대라고 들었는데 110살이 넘어서까지 살겠다는 이야기를 아주 당당하게 하시는군.’

진혁은 바로 거절했다.

「저도 회사를 책임지고 있어서요.」

「베이비, 고민하지도 않네! 지금 하고 있는 회사랑 같이 하면 되지. 내 세미나는 일 년 내내 하는 게 아니야, 일 년에 단 한 번 한다고.」

「단 한 번 하는 세미나를 위해 1년 동안 준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지금도 하는 일이 많아서 시간이 모자라니까요, 더 늘릴 수는 없네요.」

그녀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그렇게까지 확실하게 말하니까 더 어떻게 할 수가 없네. 좋아, 내가 여기 머무르는 일주일 동안 슈가 크래프트와 웨딩 케이크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가르쳐 주지. 대신 1년에 한 번, 내가 주최하는 세미나에는 도우미로 참가해.」

「가족 행사가 없다면 참가하겠습니다.」

「가족 행사아~?」

「아내의 부모님 기일이라거나, 부모님 생신이라거나, 결혼기념일 등등….」

「아, 그래? 그래. 그 정도 일은 내가 이해하지. 한창 나이 때 청년이 가족이 우선이라는데, 어떻게 이해하지 않을 수 있겠어?」

「감사합니다.」

실비안 웨인스톡이 흡족해했다. 아드레아노 존부가 앞으로 나섰다.

「나는 초콜릿과 치즈 케이크를 굽는 방법을 알려주지. 대신 성 밸런타인데이 때에 본사에서 개최하는 이벤트에 참석을….」

「<해와 달>도 밸런타인데이 때는 바빠서 안 되겠는데요.」

시몬 리옹이 팔짱을 끼었다.

「우리는 매년 9월 신학기에 신입생을 받지. 그때 한 번 정도 와서 후배들을 만나 보는 건 어떻겠나? 최근에는 동양인 학생들이 많이 들어왔어. 걔들이 성공한 선배를 보면 자극을 받을 거야.」

은근슬쩍 임진혁을 ‘성공한 선배’로 끌어당기는 듯한 그 말에 주영모가 발끈했다.

「쯔쯔, 상도덕이 있어야지! 진혁이는 르 꼬르동 블루를 졸업하지도 않았잖아. 어딜 거기 선배인 척 데려가.」

「페이스트리 쉐프라는 신성한 직업 앞에서는 성별도, 인종도, 출신 국가나 학교 따위는 상관없이 모두가 선후배 관계라고 주장하던 건 바로 너잖아, 주! 네 말대로 하는 데 뭐가 불만이냐.」

「윽.」

시몬 리옹이 의기양양하게 선언했다.

「어젯밤에 내가 내 모든 것을 가르쳐 줬고 훌륭한 요리도 대접 받았으니 사제 관계라고 할 수 있지.」

「….」

「….」

아드레아노 존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침을 발라두고 싶어도 저렇게 노골적이라니, 브라이언. 너는 나중에 저런 식으로 행동하지 말아라. 내 제자가 시몬 리옹한테 이상한 영향을 받을까 봐 무섭네.」

「!」

브라이언은 놀란 눈으로 아드레아노를 바라보았다. 가게를 오픈한다고 하면서 존부의 인턴십 프로그램을 수료하고 떠나면서 아드레아노 존부와는 완전히 결별했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다시 만났어도 그저 그뿐이고, 자신에 대해서는 그냥 스쳐 지나간 제과제빵사 1명이라고 생각하는 줄 알았다.

아드레아노가 따뜻한 시선으로 브라이언을 바라보며 말했다.

「브라이언같이 착실하고 성실한 제자가 한 명 있으면 됐지.」

브라이언이 감격하는 사이에 시몬 리옹이 톡 쏘았다.

「제자는 무슨 제자! 인턴십 마치고 나갔잖아. 제자였으면 같이 남아서 회사에 있었겠지.」

「미스터 리옹. 리옹의 제자들은 학교 졸업했으면 끝인가? 송년회 때 모이고 송년회 때 모이고 스승의 날에도 찾아오잖아. 배운 거로 끝이 아니고 이후에도 계속 연을 이어나가는 거지. 내가 또 브라이언 쉐프한테 배울 수도 있고.」

「존부 선생님… 감사합니다.」

「아니, 브라이언이 감사할 게 뭐가 있어?」

「맞아, 당연한 소린데.」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는데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 제가 만든 다른 케이크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뭐?」

「아니, 밤새고 나서 두시간 잤잖아. 뭘 또 만들었다는 거야.」

브라이언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전에 내가 만들어 준 커드 크림…! 그 크림을 써서 뭔가를 만든다고 하고 그때는 안 썼지.」

「응, 내가 이번 주제로 추정되는 ‘각 나라의 고유한 연회상’을 보여준다고 했잖아.」

일행은 저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옆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아크릴 박스에 들어 있는 케이크가 보였다. 아니, 케이크라기보다 거꾸로 뒤집어 놓은 거대한 침대처럼 보였다.

「오!」

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달랐다. 엎어져 있는 상 위에 갈비찜과 떡국, 김치찌개와 문어 숙회, 더덕과 전어구이, 물김치와 백김치, 그리고 배추김치에 파김치. 한정식 식당에서 볼 법한 한국 요리가 가지런하게 차려져 있다. 거꾸로 되어 있는 탓에 차려져 있다기보다는 천장에 붙어 있는 것처럼 보여, 음식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브라이언은 구석에서 잔치 국수처럼 보이는 음식을 올려다보며 신기해했다.

「이 면발은 버터크림으로 일일이 짠 거지? 달걀 고명은 뭐야?」

「그것도 크림으로 짠 거야.」

「어떻게 안 떨어져? 밑에 받침으로 둔 게 없는데.」

「받침이 없기는 왜 없어. 낚싯줄이 있잖아.」

「오…!」

사실 진혁은 낚싯줄이 없이도 이 케이크를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낚싯줄의 도움을 받아, 다른 사람들이 납득할만한 받침대를 보여 주기로 했다.

「이 조명과 아크릴판의 각도 때문에 낚싯줄이 안 보이는군.」

「예.」

그곳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 혹시 손이라도 뻗어 만지면 날카로운 낚싯줄에 베일까 봐 일부러 아크릴판으로 둘러놓았다.

시식해야 하는 케이크라면 이렇게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장식용-대회용 케이크라서 가능하다.

시몬 리옹이 신음소리를 흘리듯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니, 연회상을 차리면 차렸지 이걸 왜 뒤집은 거야?」

진혁이 대답했다.

「저만의 다른 점을 보여주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굳이 거꾸로 할 필요는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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