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7화
◈ ◈ ◈
설탕 가루에 레몬즙과 흰자를 섞는다.
반죽이 매끈매끈하니 희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섞어야 한다. 아드레아노 존부는 로열 아이싱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스푼으로 한술 떠보았다.
끝이 뾰족하게 휘어지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 그는 안심하고서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프랜차이즈 체인을 감독하고 앞으로 나아갈 디저트의 방향을 보는 일. 이번 분기에 새로 유행하는 과일을 사용하여 타 카페와 차별화되는 디저트를 개발하는 일.
이렇게 사소한 일을 직접 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에게도 제자들이 있다. 머랭을 치거나 장식용 이소말트를 틀에 붓거나 이렇게 데코레이션 슈가 크래프트용 밑 재료를 만드는 일은 보조 쉐프들이 처리해왔다. 자신의 호흡에 누군가 맞춰 주는 일만 해 왔지, 다른 사람의 호흡에 맞춰서 일하는 것도 몇 년 만인지 모른다.
‘16년만인가?’
「이렇게 하면 됩니까?」
「그래, 잘 부탁해.」
실비안 웨인스톡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오븐 뚜껑을 열어 보아 후르츠 파운드 반죽이 부풀어 올라 케이크가 되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곳의 오븐은 그녀가 사용하던 것과 종류도 다르고, 온도도 달랐다. 중간 점검을 하면서 그녀가 투덜거렸다.
「이래서 내가 요리 프로그램에 안 나가는 거라고, 베이비.」
「오븐 화력이 다르죠.」
흔히 있는 일이다. 예산이 남아도는 방송 프로그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방송용으로 급하게 만든 쿠킹 스튜디오 시설의 오븐은 화력이 좋지 않다. 아예 제대로 지은 제과제빵 전문 스튜디오라고 해도, 실비안이나 아드레아노같이 최고급 오븐을 사용하던 이들이 보기에는 마음에 안 찬다.
「여기 오븐이 생각보다 세.」
「예.」
「온도가 빨리 올라가. 나쁘지는 않네. 처음 보는 브랜드인데 말이야.」
실비안은 오븐 앞에 등받이 없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고서 오븐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나중에 여기 오븐이나 알아볼까 봐.」
갓 구워진 후르츠 케이크는 따끈따끈했다.
무사히 구워져 나온 케이크를 냉각기에 넣으며 그녀는 조금 놀랐다.
「진혁 쉐프는 이미 케이크를 식히고 있군?」
실비안은 손이 느린 편은 아니다. 수천 번, 수만 번을 구워냈을 일이다. 낯선 제과주방이라고는 해도 그녀가 빵을 굽는 동안 임진혁이 더 빠르게 구웠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 오븐에 익숙해서 그런가 보군.’
그녀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정말로 시간이 많이 걸리는 부분은 ‘장식’이다. 임진혁 쉐프가 아무리 손이 빠르다고 해도 실비안만큼 케이크 장식에 익숙할 수는 없다.
실비안 웨인스톡은 식용 색소를 쓰지 않고 유기농 재료들을 갈아 색을 조합했다. 미술 전공인 경력을 살려 다양하고 자세하게 살려내는 유려한 색감은 웨인스톡만의 장기다.
유기농 재료를 잘게 갈아 섞을 때마다 시기에 따라 다른 색이 난다.
그녀는 다진 크랜베리를 섞으며 물었다.
「진혁 팀은 잘 되어가고 있나.」
「웨이퍼 페이퍼를 자르고 있네요.」
「응? 이 설탕 공예 어디에 웨이퍼 페이퍼가 들어갈 일이 있지.」
「글쎄요.」
◈ ◈ ◈
임진혁 팀은 냉각기에서 케이크를 꺼냈다. 틀에서 꺼낸 케이크 시트는 여느 케이크처럼 울퉁불퉁했다. 진혁은 칼질 한 번으로 윗부분을 잘라 버렸다.
「이 가장자리 내가 먹어도 돼?」
‘브라이언이 나날이 마리오를 닮아가는 것 같군.’
진혁은 속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너 나날이 마리오를 닮아 간다.」
「차라리 욕을 해!」
「응? 왜?」
「걔 이번에 시험 준비하는 거 유튜브로 찍어서 올리고 있는 거 알아?」
「그래?」
「팬 여러분들에게 진정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하루 종일 방송하고 있다고. 진정한 페이스트리 쉐프라면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쓰지 말고 혼자서 주방에서 묵묵히 일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심지어 중간마다 팬들하고 대화도 해.」
진혁이 호오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네가 마리오를 잘 챙기는구나. 영상도 봐 주고, 어떻게 지내는지도 확인하고.」
「뭐?! 그런 거 전혀 아니야!”
진혁이 진지하게 말했다.
「친구를 소중하게 여기는 건 좋은 일이야. 나이 들어서 남는 건 친구밖에 없다고.」
정확히는 무공을 익힌 친구밖에 없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 시대에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네.’
몇십 년만 지나도 무공을 익히지 못한 친지는 전부 죽어 사라지고 함께 무공을 수련하여 깨달음을 얻은 이들만 남아 버린다.
경험에서 나온 소중한 조언이었으나 지금은 쓸데없는 소리이기도 하다.
진혁의 진심을 느끼지 못한 브라이언은 어이없어하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나이에 무슨 소리야. 됐어, 이거 맛이나 볼 거야.」
브라이언은 가장자리를 떼어서 입에 넣어 보았다. 쫄깃한 건포도의 향은 여름의 농익은 포도 향과는 달리 메마른 사막 같았다. 포슬하니 부서지는 파운드 케이크는 맛이 좋았지만, 설탕의 존재감이 강했다.
「진짜 달다. 이거 아까 쉐프님 레시피에서 설탕 좀 덜 뺀 거지?」
「그렇지. 보존용으로 만든 게 아니니까.」
가루 설탕의 양을 줄였는데도 혀끝을 녹일 만큼 달았다.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아이싱은 다 했고.」
삼단 케이크가 흐트러지거나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 가운데에 기둥 역할을 할 받침대를 세웠다. 보통 플라스틱이나 실리콘을 쓰는데, 진혁은 유리 막대를 꽂았다.
그리고 케이크를 차곡차곡 쌓았다. 큰 것, 작은 것, 더 작은 것. 세 층의 케이크를 쌓은 그는 미리 브라이언이 만들어둔 크림을 스패츌러에 발라 아이싱을 하기 시작했다.
「볼 때마다 놀랍다.」
단지 한 번의 손길로 크림을 바른다. 유명한 화가가 붓에 물감을 묻혀 그림을 그리듯, 머뭇거림이라곤 없는 손짓. 아스팔트 위에 흰색 가루를 뿌리는 롤러는 걸리는 것 없이 그저 지나갈 뿐이다. 그 롤러가 지나가고 나면 매끄러운 흰색 선만이 남는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할 수 있지.’
보통 아이싱을 할 때는 치덕치덕 크림을 바른 다음 빙글빙글 돌리면서 스패츌러로 다듬는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숙련된 페이스트리 쉐프라도 몇 분 이상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스패츌러에 묻어있는 크림의 양을 조절해서 케이크에 바른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뭐가?」
「아니, 아무것도.」
브라이언 역시 진혁이 하는 모습을 보고서 저렇게 해 보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잘 안 되었다. 그는 실비안 웨인스톡의 모습을 힐긋 보았다.
‘봐, 진혁이 이상한 거지. 다 이렇게 한다고.’
실비안 웨인스톡 쉐프도 이쪽을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그녀 또한 자신의 케이크에 아이싱을 올리는 중이었다. 여러 번 바르고 나서 다듬는 모습이 과연 케이크의 장인이라 불릴 만했다. 속도가 확실히 빨랐지만, 진혁의 묘기 같은 1번 아이싱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진혁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먹을 수 있는 재료들을 갈아 만든 물감을 조그마한 붓에 콕콕 찍어, 하얀 배경에 그려나간다.
「연한 색깔부터 해야 하지 않아?」
「실수를 안 하면 돼.」
「….」
‘그걸 장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진혁은 케이크를 장식하는 것이 좋았다. 스패츌러에 밀착된 크림을 밀어내어 케이크에 평평하게 바르는 것도 즐겼다.
‘검술과 다르지 않아.’
검을 휘두를 때마다 같은 사람이 동일한 조건 하에서 같은 초식을 펼치더라도 매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디에서 하는지,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불어가고 있는지, 검사의 근육은 얼마나 피로한지- 수많은 사실들이 겹겹이 쌓여 변화를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진정 ‘같은 초식’이 되려면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고 변화를 주어야 하는 것이다.
빵에 크림을 바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후르츠 케이크와 시폰 케이크, 제누와즈에 크림을 바를 때가 다르다. 제과주방의 습도, 온도, 주변에 사람이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이 크림은 얼마나 뻑뻑한가, 아니면 부드러운가.
‘좋아, 또 한 번에 다 했다.’
여러 번 움직이는 것보다 한 번에 하는 편이 좋다.
세 단짜리 케이크를 전부 칠해버리고 난 후 그리는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그림실력이 부족한 페이스트리 쉐프라면 여기서 애를 먹었을 것이다. 진혁 역시 그림을 그려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눈이 좋았고, 손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우측 아래에 붉은색을 조금, 그리고 그 아래에는 녹색. 녹색의 크기는 이 정도.’
그는 굳이 그림을 그리려 하지 않았다. 진혁은 자신이 무엇을 잘 하고 무엇을 못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대신 스케치에 있는 그림의 형태와 색깔을 완벽하게 ‘복사’했다. 복사기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을 그대로 옮길 뿐이다.
「진혁이 너 그림도 잘 그리네?」
「이건 잘 그리는 게 아니지. 그냥 모사하는 거야.」
「허어.」
직접 무언가를 생각해내어야 하는 창작이 아니기에 편안했다. 진혁이 자신을 잊고 케이크 장식에 잠겨 있는 가운데 브라이언은 입을 닫는 것도 잊고 그저 구경할 뿐이었다.
「진짜 대단하다.」
프린터가 컬러 인쇄를 해서 찍어내듯 특정한 색깔 점을 콕콕콕 찍어대는데, 그 점이 찍히는 위치가 신기했다. 꽃 밑받침의 중간에 노란색이 아니라 녹색이 있어야 하는 부분인데 노란색 점을 찍는다. 잘못 찍은 건가 했는데 그 다음에 옆에 연두색과 짙은 녹색이 발리자 알 수 있었다. 그 노란색은 녹색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찍힌 것이다.
「다 했다.」
진혁은 이미 케이크의 그림을 다 그렸다.
「벌써?!」
세 단에 있는 그림을 전부 그리는 데에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진혁은 브라이언이 만들어 놓은 반죽을 사용해 꽃을 빚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노란 반죽을 조금씩 떼어내 개나리 모양을 만들었다.
「개나리는 잎을 하나씩 만든 다음에 네 개를 붙여서… 어, 이거 만들어 봤어?」
「만들어 본 건 아닌데. 이렇게 만드는 게 편할 것 같아서.」
「…」
「왜? 이렇게 만드는 거 아니야?」
가장자리에 올릴 개나리 꽃잎을 한 장 한 장 만들어, 네 장을 모아 붙인다. 꽃술을 빙 둘러 붙인 꽃을 케이크 위에 올려놓으면 된다. 순식간에 노란 개나리가 케이크 위에 활짝 피었다.
「이 옆에는 라일락이지?」
쉼 없이 움직이며 꽃잎의 형태를 잡아가는 솜씨를 보며 브라이언이 물었다.
「라일락은 만들어 봤어?」
커다란 꽃송이가 있는 다른 꽃과는 달리 라일락은 자그마한 꽃이 쪼르륵 주렁주렁 달려있는 모양새다. 그래서 라일락은 따로 꽃을 만들어 붙이지 않는다. 둔덕처럼 덩어리 형태를 먼저 잡은 후에 그 위에 꽃을 붙여, 커다란 꽃 덩어리처럼 보이게 한다.
「모양 보면 대충 어떻게 만들지 감이 오잖아.」
진혁이 가볍게 말하며 손을 움직였다. 브라이언이 중얼거렸다.
「그러면 선생은 왜 있고, 제과제빵 교육 프로그램은 왜 있어…?」
개나리에 진달래, 라일락까지 봄꽃들이 화사하게 피어오른다. 진혁은 미리 꺼내놓았던 웨이퍼 페이퍼를 자르기 시작했다.
「그건 왜?」
「꽃이 너무 수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