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4화
◈ ◈ ◈
「진혁! 실비안 쉐프의 케이크는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만큼 만들기 어렵기로 유명하다고. 지금 그걸 모방해서 만들겠다고 선언하면 어떡해. 우리가 여태까지 만들어왔던 케이크가 레고 중급자용, 아니 고급자용이라면 실비안 쉐프의 케이크는 초 고급자용-.」
브라이언이 임진혁의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병아리처럼 삐약삐약거렸다. 진혁은 성가셔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아.」
그 뒤에는 새끼오리처럼 주영모와 아드레아노 존부, 시몬 리옹이 졸졸 따라왔다.
주영모가 말했다.
「그래, 웨딩 케이크 세미나도 어려웠어. 자세하게 설명해 주어야 간신히 그 기술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아드레아노 존부가 거들었다.
「실비안 웨인스톡 쉐프는 말가죽을 똑같이 만들어내는 방식이나 조개껍데기와 똑같은 모양을 만드는 케이크 관련 특허도 여섯 개나 갖고 있지.」
진혁이 두 사람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브라이언을 향해 말했다.
「브라이언.」
「으, 응?」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지 오늘 아예 제대로 알려 준다며?」
브라이언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렇지!」
시몬 리옹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나는 실비안 웨인스톡 쉐프의 웨딩 케이크 카탈로그를 따로 갖고 있지.」
「그럼 시몬 리옹 쉐프도 이쪽으로 오세요.」
주영모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제과제빵 백서를 집필하느라 십여 년간 국내에서 유행했던 케이크의 역사를 전부 자료화해서 갖고 있는데-.」
「당장 오늘 밤에 보기엔 너무 많겠네요, 다음에 부탁드리겠습니다.」
주영모는 허무해진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아드레아노 존부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당당하게 말했다.
「내 케이크 프랜차이즈의 케이크 카탈로그도 보여줄 수 있는데. 레시피는 공개하고 있지 않지만 보면 생김새에 대해 어느 정도 힌트는 될 거야.」
「아, 그건 저번에 다 가서 먹어 봤습니다.」
아드레아노 존부가 멋쩍어하며 뒤로 물러났다.
「….」
시몬 리옹이 비웃듯이 말했다.
「너희들은 자료 조사가 부족하군.」
두 사람은 돌아가고 시몬 리옹과 브라이언 신, 그리고 임진혁만이 남았다.
넓은 회의실에서 진혁이 물었다.
「자.」
브라이언이 어정쩡하게 물었다.
「응?」
「일반적이고 호감 가는 케이크에 대한 교육.」
진혁은 맡겨 놓은 케이크를 달라고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교육을 요구했다. 브라이언이 뻘쭘하게 대답했다.
「…아, 응. 내가 한다고 했지.」
‘하지만 시몬 리옹 쉐프 앞에서 한다고 하지는 않았다고!’
브라이언 신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독설가로 유명한 시몬 리옹이 눈앞에서 코브라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으니 긴장되었다. 마치 신입 꼬미 쉐프로 호텔 면접을 보러 왔을 때처럼 뻣뻣하게 굳어진다.
그래도 옛날에 주방에서 후배들을 교육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브라이언이 더듬더듬 말했다.
「꽃하고 동물은 항상 무난한 과제야. 실비안 쉐프도 많이 만들고.」
머뭇거리고 있자 시몬이 말을 가로챘다.
「실비안 웨인스톡 쉐프는 1970년대 초기에는 백합과 글라디올러스 같은 우아한 꽃을 많이 썼지. 남들이 틀에 찍어낸 장미를 만들어 올리는 동안, 꽃잎 짜기 기법으로 백여 종 이상의 꽃을 개발하신 분이야. 여기 이걸 보면 꽃이 케이크를 타고 올라가는 방향으로 장식된 게 보이지? 처음에는 희고 깔끔한 계열로 시작했다가 파스텔 톤으로, 점차 강렬하고 선명한 원색을 거침없이 사용하기 시작했지.」
「와.」
「실비안 쉐프의 과거 케이크를 이렇게 정리하신 건 처음 봐요.」
시몬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르 꼬르동 블루에서 사용하던 교재야. 웨딩 케이크를 하고자 하는 애들이라면 다 필수적으로 분석하는 거지, 이 정도는 기본이야.」
하지만 코끝이 약간 붉어진 것이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브라이언은 처음부터 시몬 리옹을 좋아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전통적인 빵이 최고라고 우기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에게는 독설을 쏟아내는 자다. 최고의 교육자라고 유명하면 뭐하나. 자기 학생이 아닌 자들은 물론이며 심지어 자기 학생들도 칼로 푹푹 찌른다.
브라이언 역시 주방에서 후배들을 교육할 때 부드럽게 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몬 리옹처럼 쓸데없이 여기저기에 가시를 삐죽삐죽 세우며 괴롭혀대지는 않았다.
「이 교재는 내가 30여 년간 꾸준히 실비안 쉐프의 동향을 파악하면서 모아온 거지. 실비안 쉐프 본인도 잃어버린 것도 섞여 있을걸.」
그가 내놓는 자료들은 놀라울 정도로 자세했다. 단순히 몇십 년간의 경력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흔히 보는 케이크 레시피 북처럼 한두 장 사진이 있는 것만도 아니었다. 위, 옆, 양쪽에서 자세하게 찍어두어 따로 출력해둔 스크랩북은 이미 이 자체로 훌륭한 교재였다. 실비안 웨인스톡만이 아닌, 뉴욕시 맨해튼 최신 유행 케이크의 역사 그 자체였다.
뉴욕이 아닌 라스베이거스에서 케이크를 만들어 온 브라이언은 후반부의 유행을 알아보았다.
‘아, 이건 우리 호텔에서도 한창 만들던 거지.’
브라이언이 따로 챙겨둔 시판 아기곰과 토끼, 아름다운 꽃 판매 카탈로그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허탈해졌다.
‘페이스트리 쉐프로서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스승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나한테서 배우고 싶어 하겠냐고.’
「우와.」
진혁이 감탄하는 사이 브라이언은 자신이 가져온 카탈로그를 슬그머니 뒤로 뺐다. 시몬 리옹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서 카탈로그를 낚아채듯 빼앗았다.
「어디 보자.」
「리옹 쉐프가 보실만한 건 아닌데요.」
「우리 학교에도 들어오는 카탈로그로군.」
「하하하.」
브라이언이 머쓱하게 웃었다.
「이 카탈로그를 보면서 가르쳐 주려고 했나? 나쁜 생각은 아니야. 좋은 교사는 적절한 교재를 사용하는 법이지. 급조한 아이디어치고는 제법이야.」
‘칭찬… 받았다?’
창칼로 무장한 장군처럼 독설로 사람들을 공격하고 다니는 이에게 호평을 받으니 어색하다. 브라이언이 쭈뼛쭈뼛 대답했다.
「진혁에게 제일 부족한 게 뭔지 생각하면서 준비한 교재입니다.」
「저놈, 상식이 없지.」
「그 저놈이 눈앞에서 듣고 있는데.」
진혁이 즉시 대답했다.
시몬 리옹이 임진혁의 성질을 슬슬 긁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진혁은 그에 대해서 전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때 그대 느끼는 대로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시몬 리옹이 얼마나 지위가 높은지, 인맥이 넓은지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시몬 리옹은 본인 자체보다 그가 양성해낸 수많은 제자들이 다양한 호텔과 교육계에서 끈끈하다. 그렇기에 꿈이 큰 페이스트리 쉐프라면 누구라도 그를 대할 때는 조심스럽다.
「아하하하.」
브라이언은 그만 웃어버렸다.
임진혁은 자신이 원한다면 어디에라도 취업할 수 있다. 굳이 누군가의 추천장이 필요 없다. 능력이 있고 그렇기에 당당하다.
생각해보면 브라이언 역시 그랬다. 그에게도 벨라지오의 선배 헤드 쉐프가 준 추천장이 있다. 어디라도 갈 수 있지만 스스로 도전해서 가게를 여는 것을 선택했다.
시몬 리옹이 일갈했다.
「눈앞에서 듣고 있으니까 이야기하는 거야! 뒤에서 이야기하면 험담이지. 앞에서 이야기하는 건 괜찮아. 베이커리 계에서 꾸준히 몸담고 있었으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을 상식이 없어, 전혀 없다고. 넌 네가 상식이 있다고 생각하냐?」
「있으니까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겁니다.」
상식이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모를, 동문서답에 가까운 대답을 무시하며 시몬 리옹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 점을 오히려 강점으로 밀고 나갈 수 있을 거야. 브라이언 쉐프처럼 특정한 호텔에서 처음부터 일을 시작해서 마치는 경우에는 아예 스타일이 확고하게 고정되어 버려. 그걸 느끼고 일부러 호텔을 그만뒀던 거지? 한국의 대회에도 참가하고.」
브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너. 임진혁.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넌 네 멋대로,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살아왔어. 네가 만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어. 여태까지 봐온 견본이 적은 만큼 알기 쉽다고.」
「에?」
‘시몬 리옹은 진혁만이 아니라 나에 대해서도 조사를 해온 건가?’
브라이언은 시몬이 어째서 유능한 교육자로 유명한지 그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시몬은 이론만으로는 알 수 없다며 진혁에게 이것저것 시켰다. 이미 구워져 있는 시판하는 케이크 시트를 가져오도록 하고, 브라이언에게 버터크림 아이싱을 만들도록 했다.
두 사람은 일정상 본래 카탈로그를 보면서 무엇을 만들면 될지 보기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시몬은 진혁이 직접 만들어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너, 대회에서도 내놓은 계획표랑 전혀 다른 걸 만들었지? 지금 케이크 스케치 같은 거로 얼렁뚱땅 얼버무리려고 하지 마. 케이크에 손 닿으면 폭주해서 이것저것 괴상한 걸 만들어 낼 거잖아!」
브라이언이 걱정스레 물었다.
「버터크림 믹싱은 이만큼 더하면 될까요? 일단 색깔별로 다 만들어 놓긴 했는데.」
진혁이 붉은색을 보고서 말했다.
「내가 주로 쓰는 붉은색보다 톤이 좀 밝은데?」
시몬 리옹이 손뼉을 짝하고 쳤다.
「어허! 이 케이크를 꾸민다고 생각해 봐. 무슨 색을 쓰고 싶어?」
「제 붉은색이요.」
「그 선명한 피 색깔 말하는 거지? 그 색깔은 많이 못 써. 다른 색깔을 쓰는 동안 강조하는 용도로 한두 방울 쓰는 건 허용하지.」
「쳇.」
케이크에 장식을 금지당했을 뿐만 아니라 붉은색을 사용하는 것도 거부당해져서 진혁은 조금 시무룩해졌다. 브라이언은 중얼거리며 새로운 색깔을 만들었다.
「아니, 시뻘겋게 바르려고 했단 말이야?」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지금 와서 하룻밤 만에 테크닉을 전수받을 수는 없어. 그러니 사람들이 좋아하는 편안하고 부드러운 색깔 톤을 보자고. 카페 진열장에 나와 있는 케이크의 70% 이상이 새하얀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거야.」
「음.」
‘그럼 이런 색 배합 수업에 의미가 있나?’
「지금 그럼 이런 색 배합에 의미가 있나? 라고 생각했지?」
진혁은 입을 다물었다. 시몬 리옹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면과 입체를 다루기 전에 색부터 보자고.」
「예에에에.」
「선명한 붉은색은 포인트로 쓸 때, 꽃에 쓸 좋은 거야. 피 생각 좀 접어!」
「피 생각 하지 않았는데요.」
「뭐 내놓을만한 건덕지가 있으면 피, 살인사건, 이런 걸 내놓고 싶어 하잖냐. 사람들은 100% 새로운 것을 원하지 않아. 그러니 살인사건은 아웃. 가게에서 잘 팔린다고 대회에서도 잘될 거라는 생각을 버려. 가게에서 잘 팔리는 건 SNS에 소문이 났기 때문이고, 사람들이 신기한 걸 찾기 때문이야.」
「완전히 똑같은 것을 내놓으면 진부하다고 불평해. 그러니까 아주 조금, 2% 정도만 바뀐 것을 줘야 해. 그렇게 너무나 튀고 신기한 걸 내놓으면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가 없어.」
브라이언이 혼잣말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 2%는 대체 어디서 나온 숫자냐고요.」
임진혁이 물었다.
「그러니까 사건 현장을 재현하는 건 별로지만, 손톱 한 조각이나 머리카락 한 줌 정도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다?」
「아니지, 아니지. 개념을 바꾸라고. 인간은 다른 인간을 먹고 싶어 하지 않아!」
시몬 리옹은 이마를 짚었다.
「흠.」
흉년이 아니어도 흑점에서 인간 고기를 판매하는 일은 상시 이루어진다. 하지만 굳이 그곳을 찾아 먹으려고 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세상의 모든 쾌락을 다 경험해본 이들이 타락해서 가는 마지막 길이지, 모든 이들이 그리로 향하는 것은 아니다.
진혁은 저 나름대로 납득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붉은색을 버렸다. 새까만 색깔을 치덕치덕 바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야, 이 자식아! 케이크는 도로가 아니야! 이렇게 아스팔트를 칠하지 말라고.」
「원하는 색깔을 칠하라면서요.」
「초콜릿 케이크가 아닌 이상 먹을 것에 검은색은 쓰는 거 아니다.」
진혁이 항의했다.
「짜장면도 까매요.」
「뭐? 그게 뭔데?」
「중국 면 요리를 한국식으로 개량한 건데, 드실 거면 시켜 드릴게요.」
「중국 요리에 검은 면 요리가 있다고? 내가 중국 식당을 얼마나 자주 가는데. 그런 건 본 적이 없어.」
「한국 요리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