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2화
실비안 웨인스톡이 만들어온 케이크들은 전부 정교하면서도 세밀하고 거대한 것으로 유명했다.
당장 그녀의 포트폴리오만 보더라도 궁전과 왕관, 전통의상과 가방, 구두나 실제 인물, 실제 사이즈의 말 등 케이크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케이크를 많이 만들었다.
그러한 실비안 웨인스톡이 말하니 무게감이 있었다.
「내 성 케이크, 알지?」
「예.」
그녀는 3개월의 시간에 걸쳐 버킹엄 궁전을 슈가 크래프트 아트로 재현한 적이 있다. 임진혁을 제외한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에피소드를 알고 있었다. 진혁이 어리둥절해 하자 브라이언이 진혁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전에 그 영국 여왕의 생일 선물 말입니다.」
「음.」
진혁이 모르는 듯 하자 실비안 웨인스톡이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왕자가 어머니의 생일을 위해서 부탁하고 싶다면서 영국 왕실의 위엄을 보여줄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줬으면 좋겠다는 거야. 여왕이 아끼는 말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말 한 마리를 만드는 건 재미 없잖아? 그래서 마구간을 만들까~? 하고 고민하다가 아예 성을 만들기로 했지.」
아드레아노 존부가 씩 웃었다.
「그 후르츠 케이크는 지금도 성의 장식장에 보관되어 있잖습니까.」
1840년 빅토리아 여왕의 결혼식을 기점으로 영국 왕실의 웨딩 케이크는 점점 더 달콤해졌다.
당시에는 설탕과 설탕 장식이 아주 비쌌다. 흰 설탕이 금만큼이나 고가의 물건이던 시기다. 그렇기에 왕실의 페이스트리 쉐프들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백설탕을 쓰기 시작했다.
그 결과 앞으로 백 년을 넘게 유행할 케이크의 스타일이 결정되었다.
최대한 많은 설탕 장식이 올라갔고, 그 무게를 감당하기 위하여 내부에 들어갈 케이크는 점점 더 단단하고 두꺼워져야 했다. 페이스트리 쉐프들은 건축학의 구조적인 원리를 빌려왔다. 중력을 감당하기 위한 설계만이 아니라 스타일 자체에도 영향을 받았다. 르네상스와 고딕 양식 등 다양한 양식을 디자인적으로 재현하며 로열 페이스트리 쉐프들은 점점 더 높고 크고 단 케이크를 만들어냈다.
위생적으로 제대로 만든 슈가 후르츠 케이크를 적절한 온도와 습도에서 관리한다면 100년이 지나도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과거의 슈가 후르츠 케이크를 먹어본 로열패밀리들은 알고 있다.
그 케이크가 얼마나 달콤한지.
달기만 한 케이크는 쉽게 질리며 맛이 없다.
기념적인 의미가 있기에 매년 웨딩 케이크를 한 조각씩 잘라 나누어 먹는 풍습도 있지만, 정말로 맛있어서 먹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실비안 웨인스톡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단맛에 새콤한 맛과 짠맛을 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렇지만 성 케이크는 너무나도 아름다워 예술작품과도 같다는 평을 받고 말았다.
영국 여왕은 케이크를 선물 받은 후 감히 이 케이크에 칼을 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실비안 웨인스톡은 그 사실이 기쁘면서도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랑스러움 반, 아쉬움 반을 섞어 말했다.
「아쉬운 일이야. 내가 얼마나 맛있게 만들었는데, 예쁘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먹어주지 않는다는 거 말이지.」
「아하하.」
「그거 슈가 크래프트 장인들의 꿈 아닙니까?」
「웨인스톡 쉐프님 능력이 너무 좋아서 그렇죠.」
브라이언 쉐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세 사람의 슈퍼 스타 쉐프들을 바라보았다.
‘저분들도 저렇게 싹싹 비빌 수 있네.’
여태까지 브라이언 신이 참석해왔던 그 모든 대회에서 시몬 리옹이나 아드레아노 존부, 주영모는 하늘 같은 심사위원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실실 웃으면서 실비안 웨인스톡의 곁을 빙글빙글 도는 모습을 보면 전혀 위엄있어 보이지 않았다.
웨인스톡 여사는 자신의 옆에서 말을 거는 쉐프들에게 살짝 눈웃음을 지어 주었다. 하지만 그녀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건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진혁이었다.
「그래, 베이비들. 칭찬 고마워. 진혁 베이비, 지금 베이비한테 필요한 게 바로 그거야. 맛보다 먼저 모양으로 눈길을 확! 사로잡아야지. 그래야 먹고 싶어질 거 아니야?」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그런 케이크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어머, 하루 만에?」
「예. 일단 오늘은 이 케이크를 맛보는 것부터 시작하죠.」
「기대감이 아주 커. 우리 베이비들이 입에 침도 마르지 않고 칭찬하더라고.」
실비안 웨인스톡이 미소를 지었다. 기대감이 서린 웃음을 보면서 주영모가 몸을 움츠렸다.
‘실비안 쉐프님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칼로 푹푹 찌를 텐데.’
그녀는 항상 날카로운 칼날처럼 솔직했다. 빙 돌려서 말하는 법이 없었다. 주영모는 어린 다이아몬드 원석인 임진혁이 상처를 입을까 걱정이 되었다.
「실비안 쉐프님부터 한 조각 드리겠습니다.」
「그럼 나부터 줘야지, 누구부터 주려고?」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다른 이들은 저마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임진혁은 긴장하지도 서두르지도 않았다. 매일같이 만나는 손님에게 케이크를 접대하는 것처럼 빵칼을 들어 케이크를 자르고, 접시에 얹어 내놓았다. 진혁은 멀쩡한데 오히려 주영모가 긴장해서 숨을 멈추고 있다.
「다른 분들도 드실 겁니까?」
「당연하지.」
주영모가 신나서 말했다. 아드레아노 존부가 웃었다.
「그러려고 여기 왔으니 말이야.」
시몬 리옹이 헛기침했다.
「내가 굳이 임진혁 쉐프의 케이크를 맛볼 이유는 없지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특별히 시식해 주기는 하겠네.」
「맙소사, 시몬 베이비! 조금 솔직해질 수는 없니? 요즘 시대에 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빙 돌려서 하는 아기는 없어요.」
시몬 리옹은 실비아 웨인스톡이 한 이야기를 못 들은 척 외면했다.
진혁은 피식 웃으며 케이크를 더 잘랐다. 하얀 접시 위에 노란 케이크가 하나씩 하나씩 놓였다.
예상보다 식탁에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임진혁이 물었다.
「브라이언 너도?」
브라이언은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아 케이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응, 스퀘어 모양과 원형 모양의 맛 차이가 어떤지 내가 시식해보고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브라이언이 조금 마리오를 닮아가는데?’
진혁은 브라이언의 앞에도 케이크를 한 조각 놓아주었다. 그동안 이미 실비안 웨인스톡은 케이크를 맛보고 있었다.
「오, 황홀해! 입안에서 살살 녹아내리는 이 맛! 정말 방금 전에 본 그 수수한 모양의 케이크라곤 생각할 수 없는 환상적인 맛이네. 마치 캠퍼스에서 공붓벌레처럼 차려입고 돌아다니던 신입생이 안경을 벗자 번데기가 나비로 환골탈태한 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평범한 모습 속에 숨겨진 정교하고도 놀라운 맛!」
실비안은 아예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고 있었다. 주영모는 순식간에 케이크를 다 먹어치워 버렸고,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단순하고 깔끔한 맛이었다.
재료를 적게 썼으며 만들기 쉽고, 그리고 맛있다.
“이건 대회용이라기보다 홈메이드 레시피네. 가정용 레시피로 해서 레시피 백과에 올려도 좋겠는데? 내가 책에 올려 줄까?”
누구나 주영모 쉐프의 레시피 백과에 자신의 이름을 넣은 레시피를 올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제가 브라이언한테 선물로 레시피를 준 케이크라서요. 다른 데 또 드리기는 좀 그렇네요.”
“이야, 두 사람 정말로 친하구만! 친구를 위해서 케이크 레시피까지 개발하다니. 라이벌 관계이자 우정이라, 정말 보기 좋구만.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친하게 지내라고.”
‘….’
주영모는 큰 목소리로 다른 쉐프들에게도 알렸다.
「이건 진혁이 브라이언 쉐프한테 우정의 증거로 만들어 준 케이크라는 구만. 아예 레시피에 대한 권리도 넘겼대」
「어쩐지 평소 복잡하고 여러 가지 맛이 조화를 이루는 케이크를 선호하던 진혁이 갑자기 단순하고 만들기 쉬운 레시피를 만들었나 했다.」
시몬 리옹이 짧게 말했다.
「일부러 농익은 망고를 골라 썼군. 다루기가 힘들었을 텐데.」
「여름 망고가 더 당도가 높으니까요.」
「이 서걱서걱한 식감은 얼린 건가?」
「표면만 살짝 얼리면 됩니다.」
시몬 리옹이 재료에 대해서 캐묻는 동안 아드레아노 존부는 다른 방향의 감상을 내놓았다.
「레어 치즈 케이크는 오븐을 사용해서 구울 필요가 없어. 그래서 어떤 페이스트리 쉐프들은 레어 치즈 케이크는 단순히 접시 위에 음식을 올려놓는 것에 불과하며, 요리가 아니라고들 하지. 하지만 지금 이 망고와 레어 치즈의 조화는…, 누가 이런 케이크를 맛보고 레어 치즈 케이크는 요리가 아니라고 불평할 수 있겠나? 정말로 만족스럽군.」
자타가 공인하는 치즈케이크의 대가답게 뿌듯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레어 치즈와 망고. 망고에서 물이 나와서 레어 치즈를 망쳐 버릴 수도 있는데 그걸 표면을 얼려서 해결하다니. 레어 치즈 역시 차갑고 말캉말캉하니까 말이야.」
브라이언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도 올스타 쉐프들은 하나씩 지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비안 쉐프님의 말이 맞아. 진정한 페이스트리 쉐프라면 미각만이 아니라 시각 역시 충족시켜 줘야지. 이 위에 올라가 있는 초콜릿 달걀의 얇기는 정말 최고지만, 일반인들이 봤을 때도 우와 할 법한 무언가가 필요해.」
「꺄악 말이고 우와 말이야, 우와. 대중들을 비명 지르게 만들지 말라고.」
진혁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비명이라.」
그가 무어라 말을 더 하기 전에 아드레아노 존부가 말을 가로챘다.
「그래, 사건 현장 같은 걸 만드는 것보다야 아주 잘 만들 달걀을 올려놓는 게 낫겠지.」
주영모도 공감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단순한 거로 가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진혁은 억울했다.
「실제 사건 현장도 아니고 사건 현장을 재현한 케이크 같은 걸 보고 놀라는 쪽이 이상한 거 아닙니까.」
「아니, 네 감각이 이상해.」
「너무 잘 재현하니까 그렇지.」
시몬 리옹과 아드레아노 존부가 칭찬인지 욕인지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자 주영모가 덧붙였다.
「할로윈에 진혁을 데려가고 싶어 하는 케이크 체인이 한둘이 아니던데? 나한테 연락 온 곳도 꽤 많아.」
실비안 웨인스톡이 방긋 웃었다.
「특색있는 자기만의 개성을 갖고 있다는 건 좋은 점이니까! 나만 해도 웨딩드레스 케이크로 시작해서 웨딩 케이크 전문이 되었잖아. 진혁 쉐프가 아예 할로윈 전문으로 갈 수도 있지.」
「할로윈 전문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실비안 웨인스톡이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 시체니 살인 사건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무엇을 위해서 만들고 있는 건데? 크리스마스? 새해?」
진혁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일상입니다.」
「일상?」
정확히는 자신이 예전에 겪었던 일상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잠시 침묵하는 사이 브라이언이 대신 대답했다.
「케이크 가게에 오는 사람들은 특별한 것을 찾아서 오잖습니까. 임진혁 쉐프의 케이크를 보면 평범하고 소중한 일상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게 됩니다.」
그는 친구를 위해 애썼으나 실비안 웨인스톡은 코웃음을 쳤다.
「사랑의 매 같은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