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430화 (428/656)

제 430화

진혁은 단호하게 경고했다.

「진혁의 J도 넣을 필요 없어. 차라리 망고 라이언 케이크라고 불러라」

「그럼 이건 리그레이 피치냐?」

서로 누가 더 친한지 우정을 증명하기 위한 이름은 점점 더 길어지고 강해졌다. 쓸데없는 토론이 끝도 없이 계속되자 진혁은 아예 두 사람을 무시하기로 했다.

그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 두 사람을 외면하며 성큼성큼 냉각기로 다가갔다. 다른 케이크를 꺼낼 참이었다.

열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두 사람은 진혁이 움직이자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었다. 둘이 눈빛을 교환하고서 브라이언이 물었다.

「뭐야, 진혁! 만든 게 또 있어?」

그는 혀를 내두르며 진혁이 방금 무엇을 얼마나 만들었는지 세어보았다.

당장 눈앞에서 식어가고 있는 초콜릿 케이크와 얼그레이 케이크. 아까 만들고 있었던 아내를 위한 스페셜 케이크. 그리고 방금 맛본 망고 레어 치즈 케이크.

그것 말고도 또 만든 것이 있다니 믿을 수가 없다.

브라이언 역시 손이 느린 편은 아니었다. 벨라지오 호텔에서 일하던 시절, 연회가 있고 케이크 주문이 들어온다면 새벽부터 케이크를 만들어야 한다. 서른 개의 롤 케이크, 스물여섯 개의 판 케이크, 그리고 또 다른 케이크들. 종류별로 스무 개 이상의 케이크를 다섯 종류씩 만들려면 수쉐프 한 명과 꼬미쉐프 두어 명이 달라붙어 새벽부터 준비해야 한다.

한 종류의 케이크를 많이 만드는 것보다 다른 종류의 케이크를 하나씩 만드는 게 더 손이 간다. 양을 늘리는 것보다 이걸 하면서 저걸 하고 하는 둥 정확히 계량하고 구워지고 크림이 완성되는 시간을 재면서 멀티 태스킹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대회 준비용 작품을 만들면서 동시에 4개의 케이크를 새벽부터 만들었다니 보통 사람이 마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소요 시간만 생각해도 한두 시간으로는 부족하다.

리처드 베이커가 팔짱을 끼고서 말했다. 걱정스러운 눈초리였다.

「이봐, 진혁! 사실대로 말해 봐. 밤새웠지?」

브라이언과 리처드가 놀라는 것을 보며 진혁이 대답했다.

「이게 아내를 위한 복숭아 치즈 케이크야. 얼그레이 복숭아 케이크는 시험작이고, 이게 완성작. 이제 냉장고 속에 있는 복숭아를 넣어서 굳히기만 하면 돼.」

다행히 브라이언이나 리처드 둘 다 단순한 사람들이라 화제를 피하자 바로 따라와 주었다.

「오, 맛있겠다. 내가 도와줄까?」

리처드가 눈을 빛냈다. 진혁은 다 끝난 상황에서 도움이 무어 필요할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리처드가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팁을 주거나 훌륭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물었다.

「뭘 도와주게?」

「내가 기꺼이 시식을 도와주지.」

진혁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고맙지만 됐어.」

브라이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가에 크림을 묻힌 채였으나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

리처드는 그 얼굴을 보고 소리 죽여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 웃는 리처드의 콧잔등에도 조그마한 크림치즈가 얼룩처럼 묻어 있다.

‘바보들인가? 왜 자기 얼굴에 묻어 있는 케이크의 냄새도 못 맡지?’

진혁은 두 사람 모두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브라이언이 냉장고를 열었다.

「복숭아가 이쪽 냉장고에 있지? 내가 갖다 줄게.」

진혁이 냉각기에서 차갑게 굳은 프로마쥬 블랑과 백포도주 무스를 꺼냈다.

‘세 시간보다 훨씬 빨리 됐네.’

「오케이, 고마워.」

진혁은 브라이언이 이 케이크가 지나치게 빨리 굳었다고 의심하지 않을까 잠시 살폈다.

‘보통 6시간 걸릴 텐데 한 시간 만에 다 굳었으니.’

하지만 그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브라이언은 감탄하기에 바빴다.

「그나저나 아까 만든 거 말고 어제 또 만들었단 말이야? 좀 전에 왜 또 만든 거야? 수면 시간이 궁금하다, 궁금해. 그러다 진짜 쓰러지면 어떡하냐.」

리처드 역시 거들었다.

「그래, 진혁 쉐프는 건강을 좀 살필 필요가 있어.」

브라이언은 거대한 냉장고를 열어 둘러보았다. 갖가지 과일들이 유리병 안에서 설탕과 함께 절여져 숙성되고 있다.

그 중에서 복숭아는 단 한 병밖에 없었다. 투명한 유리병 안에 선명하게 노란 복숭아 조각이 꼬마 젤리처럼 새끼손가락 끝 마디만 한 사이즈로 잘려져 있었다.

「이 타임(Thyme)은 어린 걸 찾아서 쓴 거야? 굉장히 작네.」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타임이긴 한데 타임이 아니야.」

「응?」

「우리나라에서만 나는 종류의 타임이야. 지중해에서 나는 보통 타임보다 조금 작지. 백리향이라고 불려.」

「백리향?」

높은 산의 바위 위나 석회암, 안산암이나 사문암 등 바위 지대에서 주로 나는 풀이다. 영양이 풍부한 양지바른 땅보다 다소 건조한 흙에서 더 잘 자라며 유월에 흰색이나 분홍빛 꽃을 피운다.

꽃과 줄기, 뿌리와 잎 전부에서 강렬한 향기가 풍기며, 고대에는 줄기와 뿌리는 따로 말려 약으로 쓰기도 했다.

진혁이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백 리 밖에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황홀한 향을 풍긴다고 해서 백리향.」

타임과 백리향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티몰(Thymol)은 항산화 작용을 하는 페놀류의 일종이다. 포도상구균이나 식중독균 등을 사멸시키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천연 항생제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약용 효과보다는 향기를 위해 복숭아에 향을 더했다.

「호오.」

「농익은 복숭아 향에 백리향의 향기가 더해지면 이전과는 조금 더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지.」

허브 백리향(百里香)을 넣어 설탕에 졸인 복숭아.

아래쪽에 가볍게 깔린 스펀지 시트 위에 레고 블록처럼 균일한 정육면체 모양으로 잘려있는 복숭아를 올리고 그 위에 젤라틴 무스를 끼얹었다.

진혁이 보낸 얼그레이 복숭아 케이크 레시피를 살펴보던 리처드가 말했다.

「여긴 타임 안 들어 있는데?」

「거긴 안 어울려. 얼그레이가 타임보다 훨씬 향이 강해서.」

「그건 그렇네.」

「아내 사랑이 지극하네.」

어제 맥주를 마시면서 내내 멜리사 칭찬만 줄줄이 늘어놓던 리처드가 그렇게 말하자 뭔가 우스웠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가서 기저귀 가는 거나 도와.」

시계를 확인한 리처드는 화들짝 놀랐다. 금방 나가서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공항까지 이동 시간을 고려하면 당장 뛰쳐나가야 한다.

「그래, 그래. 그럼 나는 간다!」

「멜리사와 꼬마 브라이언에게 안부 전해줘. 다음에는 가족들도 같이 보자고.」

브라이언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리처드는 콧잔등에 여전히 크림을 묻힌 채로 작별 인사를 하며 사라졌다.

「굿바이!」

덩치 큰 리처드가 사라지자 주방이 훌쩍 넓어 보였다. 브라이언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후후… 울트라 슈퍼 프렌드 케이크 때문에 장난치지만 않았어도 내가 나가기 전에 얼굴 닦으라고 알려주었을 텐데」

입속으로 중얼거린 조그만 소리였지만 진혁은 전부 들었다. 그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브라이언.」

「응?」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거울이나 봐.」

「헉!」

거울을 보고 놀란 브라이언이 얼굴을 씻고 돌아오자 진혁이 손가락을 튕겼다.

「자, 이제 집중하자고.」

「자?」

「35분 있으면 코치들이 온다고. 이제 이 케이크를 대회 수준으로 꾸며볼 거야.」

「잠깐, 아까 망그러진 이건 안 하고? 라임 커드 크림 만들어 놨는데」

진혁이 시계를 가리켜 보였다.

「그건 시간이 좀 더 걸려. 리처드와 노느라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 30분이면 충분히 장식 끝낼 수 있잖아?」

「흠. 그거야 그렇지. 저 노란 돔 케이크는 하얀 접시에 올려놓고 싶은데.」

진혁이 스케치북 위에 슥슥 몇 가지 장식을 더 그려 보여주었다.

「으-음. 난 당연히 네가 시판하는 장식을 말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 그걸 만든다는 거지? 초콜릿 만들어서 냉각기에 넣어 틀에 굳히는 것만 해도 30분은 더 걸려.」

브라이언이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방금 책장에서 꺼내 온 종이와 플라스틱 장식 카탈로그를 펼쳐 보였다.

「이걸 그냥 올려놓는 건 1초면 되잖아.」

생일 케이크를 위한 케이크 위에 꽂는 화려한 종이 장식, 그냥 올려놓기만 하면 되는 초콜릿 조각들, 그리고 설탕으로 만든 크리스마스 산타와 트리 장식들.

봉우리부터 활짝 핀 꽃까지 장미꽃과 튤립 등 꽃장식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다양한 종류를 다 갖다 놓다니 웬만한 재료상 뺨치겠는데. 대단하다」

브라이언의 감탄을 뒤로하고서 진혁은 종이 장식 페이지를 휘리릭 넘기다가 덮었다.

「장식 역시 맛의 일부니까. 먹지 못할 장식을 올려놓고 싶지는 않단 말이지.」

「그럼 이쪽은?」

「시판하는 슈가 크래프트 장식들은 맛이 너무 강하고 인위적이라서 맛없어.」

「그건 그렇지.」

진혁은 자신의 스케치를 다시 보여주었다.

「그냥 이걸 내가 후딱 만들어서 올리면 된다니까.」

브라이언이 주저하며 물었다.

「음, 임진혁. 사실 내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솔직하게 말해도 돼?」

「당연하지, 그러라고 부른 건데.」

「왜 케이크 위에 붉은색 사탕으로 작은 발바닥을 올려놓고 싶은 거야?」

「리처드가 아기를 낳았다길래 생각했지. 세 개의 케이크가 서로 다르지만 이어지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거든. 사람들은 아기를 좋아하잖아?」

「그렇다면 꼭 붉은색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리고 이렇게 자세할 필요도.」

브라이언은 심호흡했다.

‘임진혁이다, 임진혁. 이 사람은 임진혁이야. 임진혁이 평소답게 행동하고 있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저마다 단점이 있다. 아드레아노 존부는 치즈와 초콜릿 케이크의 달인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저트 체인을 소유하고 있으나 성격이 불같다. 주영모 역시 디저트 책을 출간하였고 자신만의 베이커리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으나 호오가 확실하고 감정 기복이 있다.

시몬 리옹은 제과를 가르치는 데에는 누구보다도 뛰어나다고 하지만 자신이 케이크를 굽는 건 못한다. 인스턴트 라면도 끓일 줄 모른다는 소문이 있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실비안 웨인스톡은 웨딩 케이크 기네스북 기록을 몇 개나 갖고 있다. 엄청난 부자일 뿐만 아니라 해마다 진행하는 웨딩 케이크 세미나에는 누구나 참여하고 싶어 한다. 한 번 세미나에 참여한 사람은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모두 기억하는 놀라운 기억력과 배려심, 뛰어난 공감력과 거액의 자선단체 기부금 등 선량한 인성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녀는 한 번 미운털이 박힌 사람은 극도로 혐오해, 같은 장소에 있으면 얼굴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이 완벽하리라는 법은 없다.

‘즉 모든 사람에게는 결점이 하나둘씩 있는 거지.’

재능이 뛰어나고 성실한 데다가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진혁에게 미적 센스가 조금 부족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대중적인 아름다움이란 패턴과도 같아 보이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만, 모르는 사람은 전혀 모른다.

「그래서 아기가 발 모양 핏자국을 만들며 케이크를 밟고 올라갔다는 거지? 사람들이 핏자국이 남은, 누군가의 발에 짓밟힌 케이크를 상상하면서 떠올리는 게 뭘까? 범죄 현장?」

브라이언은 진혁이 스스로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진혁에게 모든 것을 일일이 지시하고 싶지 않았다. 진혁 자신이 스스로 원하는 디자인을 대중적으로 개발할 수 있게 돕고 싶었다.

진정한 친구라면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진희가 작은 건 귀엽다고 해서 이렇게 해 봤어.」

그래서 성인의 발자국이 아니라 아기의 발 모양을 그렸다.

과거 진혁이 만들었던 테마 ? 바다 위의 재해 현장, 살인 사고 현장 등등, 대회에서 제작한 영웅의 모습 ? 를 생각해본 브라이언은 심호흡했다.

「후-우」

「브라이언?」

「왜 빨간색이야? 그리고 발가락 지문까지… 이렇게 현실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어?」

「아, 세밀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좋다고 하더라. 얇은 설탕 모양으로 찍어내면 지문도 직접 그릴 수 있으니까. 끝이 가느다란 바늘로 콕콕 찍어내면 돼. 시간도 그렇게 오래 안 걸리고.」

브라이언은 결국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족문이 선명한 아기 발바닥은 귀엽지 않아! 좀 더 단순화시켜서 캐릭터같이 보이는 게 사랑스러운 거라고!」

「그런 발가락 모양은 시판하는 틀이 있잖아. 기존에 판매하는 틀을 사용했다고 오해할 수도 있잖아. 내 기술이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음.」

브라이언은 진혁이 어떤 생각의 고리를 통해서 저런 결과물을 내놓았는지 납득했다.

「진혁.」

「엉?」

「3개월은 너무 짧아.」

「갑자기 그 얘기는 왜?」

「내가 너에게 주입식 눈높이 교육을 해 주지. 당장 오늘부터 저녁에 나하고 토론을 하자. 어떤 것이 대중적인 취향인지 머릿속에 확실히 박아넣어 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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