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9화
「하하하하.」
브라이언이 웃었다.
「진혁, 케이크 맛볼 거야?」
「나는 한 스푼만 맛보면 돼.」
「오케이.」
브라이언은 세 사람 몫의 접시 위에 망고 케이크를 옮겨 담았다. 그는 칼로 케이크를 자르며 케이크 밑에 깔린 바닥 재질을 눈여겨보았다.
「바닥에 일반적인 시트를 깐 게 아니네. 비스킷을 부숴서 깔았나?」
「씹는 질감에 차이를 주려고.」
「좋은 생각인걸.」
「이 사이사이에 넣은 건 생망고야?」
브라이언이 케이크의 옆면을 살피는 동안 리처드는 이미 포크로 떠먹고 있었다. 이 모습만 봐도 두 사람의 성격 차이가 눈에 보인다. 브라이언이 무언가를 입에 넣기 전에 어떤 맛을 기대하게 될지 신중하게 생각을 해보고 고심한 후 맛보는 반면에 리처드는 바로 입에 넣어버린다.
「응, 망고는 너무 달아서 굳이 설탕에 졸일 필요가 없더라.」
케이크 위만이 아니라 안쪽에도 얇게 썰린 망고가 듬뿍듬뿍 들어있었다. 브라이언은 얇게 썬 케이크를 흰 접시 위에 올려놓고 옆으로 눕혀 단면을 살폈다. 크림치즈 사이사이에 콕콕 박혀있는 보들보들한 황금빛 망고는 콕 찌르면 과일즙이 줄줄 흘러나올 것처럼 신선했다. 설탕에 절여 놓은 망고와는 무언가 차이가 있어 보였다.
「으음-!」
제일 먼저 혀에 닿은 것은 구름처럼 푹신푹신한 레어 치즈였다. 차갑고 촉촉한 망고가 이 사이로 씹히며 과즙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일부러 서걱거리는 식감으로 만들려고 망고를 얼렸군?’
브라이언은 조금 전에 느낀 차이가 어디에서 왔는지 깨달았다. 단순히 소금에 절인 망고는 물러지기 때문에 보통은 말린 망고를 절인다. 하지만 진혁은 망고를 살짝 얼려 아삭거리는 식감을 더했다. 무슨 짓을 했는지 과즙도 더 풍부해진 것 같았다.
‘설마 과일에 과즙을 주사하지는 않았을 테고. 도대체 뭘 한 거야?!’
고소하고 담백한 레어 치즈와 달콤하면서 사각사각 씹히는 망고. 그리고 두 가지의 맛이 조화를 이루게끔 해주는 레몬과 레몬 껍질의 시고 씁쓸한 맛.
그 어느 맛 하나라도 빠진다면 이 교묘한 맛의 균형은 깨져 버릴 것이다.
복합적인 식감과 맛의 조화에 브라이언은 크게 감탄했다.
‘아주 훌륭해! 당장이라도 호텔에서 판매할 수 있을 법한 케이크야.’
다만 아쉬운 점이 딱 한 가지 있었다.
이 케이크에는 별다른 장식이 되어 있지 않았다.
진혁이 데코레이션을 하려는 것 같지도 않았다. 브라이언은 눈앞의 케이크를 전부 먹어버리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혁이 원형 돔 모양으로 만든 같은 케이크가 있었다.
「이거 내가 옮겨도 될까?」
「엉.」
임진혁이 별생각 없이 허락했다.
브라이언은 달걀노른자처럼 샛노란 원형 돔 모양의 케이크를 부러 크고 넓적한 흰 접시에 올려놓았다. 그가 씩 웃었다.
「이것 봐. 달걀부침 같지?」
희고 넓은 접시 위에 올라가 있는 동그랗고 노란 케이크.
조금 전 먹은 사각형 케이크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작고 깜찍하며 귀여워 보였다.
장식을 올린 것도 아니고 글레이징을 더한 것도 아닌데, 담는 그릇을 바꾼 것만으로 신선하고 새로워 보인다.
「오.」
진혁이 짧게 감탄사를 흘렸다. 저런 재능 때문에 브라이언을 보조로 불렀다.
3개의 케이크를 엇갈려 놓을 때는 저런 장식을 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케이크 하나만 단독으로 내놓는다면 이런 식으로 해도 좋겠다.
「추가적인 장식 세공 없이도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버렸네.」
리처드 베이커도 칭찬했다.
「역시 브라이언 쉐프는 눈이 좋아.」
브라이언이 씩 웃었다.
「서니 사이드 업(Sunny side up) 달걀부침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그러게. 귀엽네.」
「윤기 나는 글레이징하고 딱 어울리네. 진혁, 이것도 먹어도 되나?」
리처드 베이커의 질문에 진혁이 짧게 대답했다.
「그건 안 돼.」
「흐음.」
아직 케이크를 먹는 중이던 리처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전에 잠깐이나마 같이 일할 때는 더 달라고 하면 더 줬다. 하지만 더 주지 않는 걸 보면 이 케이크는 어딘가 쓸데가 있는 거로 보였다. 리처드는 못내 아쉬워하며 중얼거렸다.
「그럼 이걸 좀 더 아껴먹어야겠네.」
그는 눈을 감은 채 한 입 먹을 때마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레몬 껍질을 갈아 넣은 것만이 아니라 레몬도 조금 넣었나 본데.」
리처드 베이커가 맛을 보면서 행복해하는 동안 브라이언은 자신이 옮겨놓은 접시 위의 케이크를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정말 훌륭한 맛이야. 저 케이크를 조금 더 먹어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과연 임진혁! 나날이 그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어. 레어 스테이크 타르트처럼 특이한 퓨전 요리만을 내놓는 게 아니야. 오히려 이런 정통 케이크를 만드는 솜씨는 좀 더 깔끔해졌어.’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 하던가.
다양한 퓨전 요리를 시도하고 마침내 정통 케이크의 길로 돌아온 것 같다.
전에 잠깐 오해한 것이 부끄럽기 그지없어 브라이언은 한숨을 푸욱 쉬었다.
이 케이크의 장점은 기억에 남을 만치 깔끔하고 선명하게 어우러지는 두 가지 맛뿐이 아니었다. 혀끝을 입안에서 굴리던 브라이언이 진혁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진혁, 일부러 젤라틴을 안 썼어?」
진혁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응, 화이트 초콜릿으로 해 봤어.」
「정말 좋은 생각인데.」
「그래서 달았구나.」
진혁은 두 사람의 반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지?」
입안에 남은 케이크의 여운을 즐기고 있던 브라이언이 정색했다.
「나쁘지 않다니 무슨 헛소리야, 진혁! 이건 정말로 최고야! 이 케이크만으로도 대회에 출전할 수 있겠는데. 본선에 내기에는 지나치게 단순한 장식에 맛이지만 예선에서는 충분하다고 봐.」
금방이면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임진혁은 대회에서 우승하더니 점점 더 멀리,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이제는 자신과 같은 레벨의 페이스트리 쉐프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부럽다기보다 정식으로 가르침을 요청하고 싶을 정도다. 브라이언이 말을 마치자 진혁이 대답해 주었다.
「이걸로 대회에 출전할 건 아니야. 어제 술자리에서 보고 생각한 거라니까.」
「응? 그럼 왜 구운 건데? 아내 주려고?」
「그건 아니고, 그냥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대회 준비용도 아니고 아내를 위한 것도 아니라니 별일이네.」
「이건 어제 셋이 술 마시면서 생각한 거야.」
리처드 베이커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닭튀김과 맥주를 마시면서 케이크 생각을 했다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는 진심으로 의아해하며 따져 물었다.
「한국의 프라이드치킨은 아주 훌륭하단 말이지. 껍질을 바삭바삭하게 튀겨서 기름을 쫙 뺀 데다가 살결도 쫄깃쫄깃해. 물론 케이크도 좋지, 좋아. 하지만 그 치킨을 먹으면서 어떻게 케이크 생각을 하냐고. 보드카 마시면서 맥주 생각하는 소리야!」
진혁이 피식 웃었다.
「치킨 맛있지. 맥주와 같이 먹으면 더 맛있고.」
리처드가 치킨 예찬을 하는 동안 브라이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리고 머쓱하게 물었다.
「그 케이크 셋 말인데, 우리 셋인가?」
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임진혁은 무언가 대답을 회피하고 싶을 때는 입을 다문다.
이전 잠시나마 함께했던 동안 백진영이 가르쳐 준 사실이었다.
진혁의 무반응을 본 리처드가 눈을 크게 뜨며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뭐? 정말 우리를 테마로 케이크를 만들었다고?」
「비슷해.」
「그럼 이 망고 케이크가 나겠군? 나야말로 여름 망고처럼 상큼하지 않나.」
「음-굳이 설명하자면 이 망고 케이크는 브라이언에 가깝지?」
진혁이 어깨를 으쓱하자 리처드가 신이 나서 물었다.
「난 뭐야? 저기 보이는 저 초콜릿 케이크겠지. 초콜릿이야말로 진정한 남자의 케이크 아니냐. 시커메 보이지만 혀에 닿으면 사르르 녹는 초콜릿, 그거야말로 사나이 그 자체지.」
「리처드는 얼그레이 복숭아 케이크.」
‘럭비 선수같이 덩치 크고 험악하게 생긴 주제에 오지랖 넓고 여기저기 참견하려 들면서 성격이 좋으니까. 딱 씁쓸한 차 맛을 배경으로 깔고 동글동글하고 달콤하며 무른 과일 넣는 거나 똑같지.’
「뭐야, 뭐야. 얼그레이 복숭아 케이크는 무슨 맛인데? 내가 맛볼 수는 없어?」
리처드 베이커가 물었으나 진혁이 매정하게 대답했다.
「없어. 얼그레이는 딱 한 판밖에 안 구웠거든.」
「아니, 나를 생각하면서 만든 케이크라며?! 무슨 맛인지 난 알 수 있어야지!」
‘괜히 말했나?’
진혁이 대충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레시피 줄 테니까 직접 만들어서 먹어 보든지.」
리처드가 턱을 괴고서 말했다.
「브라이언 쉐프 맛 케이크라. 달콤한 걸 얼려서 차갑게 하면서 과일즙이 흘러나오게 만든 망고에 최상급 크림치즈잖아. 이렇게 달디달면서도 성실함을 놓지 않는 페이스트리 쉐프라는 뜻이야? 엄청난 찬사네.」
리처드 베이커의 호의적인 해석을 들은 임진혁이 킥킥 웃었다.
「아니.」
「그럼?」
「그렇게 복잡한 거 아니야. 브라이언 쉐프가 망고 좋아해.」
망고를 얼리면 더 맛있어진다.
가게 연다고 고생한 만큼, 브라이언은 그 미적인 센스를 더 날카롭게 갈고 닦았다.
세상에는 고생을 하지 않아도 재능을 발휘하는 천재형 인간이 있고, 어느 정도 이상의 노력을 하면서 고생을 좀 더 하면 빛을 발하는 인간이 있다.
굳이 말하자면 브라이언은 돌과 같아 정으로 쪼아 다듬으면 실력이 더 빨리 좋아지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망고를 생각했다.
리처드가 분개했다.
「난 얼그레이 안 좋아하는데?!」
「머리가 빨갛잖아. 거기에 곱슬머리고.」
「아니, 그거랑 얼그레이랑 무슨 상관인데?」
「홍차가 붉은색이니까?」
「라즈베리도 있고 딸기도 있다고!」
「지금 자기 머리가 딸기색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아니야!」
발끈하는 리처드 베이커를 보고서 진혁이 싱글싱글 웃었다.
「레시피는 지금 이메일로 보냈어. 두 사람 이름 적당히 붙여서 가게에서 팔아도 상관없어.」
리처드가 입을 크게 벌렸다.
「요즘 가게 매출이 줄어들었다고 하니까 도와주려고 한 거야?」
「우리 둘 때문에 밤을 새워서 케이크를 개발한 거였군.」
아니다. 그냥 얼굴 보고서 대충 생각해서 만들었다. 얼그레이 복숭아 케이크를 하나만 구웠기 때문에 직접 만들라고 레시피를 주었다.
어차피 준 레시피, 케이크를 만들어 파는지 안 파는지 감시할 수도 없다. 귀찮으니까 대충 허락해 주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멋대로 감격해서 오해해 버렸다.
리처드 베이커는 글썽글썽하며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도대체 어디까지 사람이 좋은 거야. 대회 준비만 하기에도 바쁜 와중에 우리까지 챙길 줄이야.」
나이도 많고 덩치가 큰 남자가 훌쩍거리는 광경은 보고 싶지 않다.
진혁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내가 진혁의 우정 케이크라고 이름 붙여서 판매하도록 하지.」
리처드가 장담했다. 브라이언 역시 붉어진 눈시울을 한 채 말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말이야. 내가 가게를 다시 열게 되면, 베스트 프렌드 진혁 케이크라고 이름을 붙여서 판매할게」
리처드 베이커가 말을 바꾸었다.
「나는 소울 메이트 진의 케이크라고 하겠어.」
「그렇다면 나는 슈퍼 베스트 프렌드 진혁 케이크라고 하지.」
「울트라 슈퍼 베스트 프렌드 진 케이크.」
진혁이 항의했다.
「아니, 잠깐만. 뭘 붙여도 상관없으니까 내 이름 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