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428화 (426/656)

제 428화

진혁은 케이크를 거꾸로 세울 수 있는 대안을 두 가지 더 생각해두었다.

‘기막을 아예 안쪽부터 받쳐서 세워도 되고. 아니면 기둥처럼 세워서 안에 박아놔도 되고.’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진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브라이언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전날 무리하고도 새벽부터 이렇게 노력하는군… 역시 임진혁 쉐프야. …그동안 내가 너무 게을렀어. 자네 보조를 하려면 좀 더 능력을 보여야겠지. 앞으로는 확실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겠네!」

「응? 응.」

애초부터 보조에게 ‘디자인을 평가하는 눈’ 외에 별달리 기대하지 않았던 진혁이 눈을 껌뻑였다.

「여기 있는 식재료들은 쓰려고 준비해둔 거야? 밀가루라도 체를 쳐둘까? 그리고 버터도 꺼내 놓고-.」

그는 보조가 할 수 있는 수많은 잡일들을 열거했다.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할 필요는 없어. 브라이언, 네 장점은 색깔과 디자인, 모양을 잘 안다는 거잖아. 잘 보는 패션 잡지까지 비롯해서 최신 제과제빵 잡지를 구비해놨으니까 그거라도 읽고 있으라고.」

브라이언은 구석에 책장이 놓여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왜 제과제빵 관련 책들만이 아니라 패션 잡지까지 꽂혀 있는지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한 비서가 구입해 꽂아둔 책이다.

배려심에 감동한 브라이언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역시…!! 임진혁!! 자네야말로 진정한 친우야!」

「어엉…?」

브라이언 신이 감격해 하며 진혁의 양손을 덥석 잡으려 했다. 임진혁이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슬그머니 손을 빼냈다.

「너 손은 씻었어?」

브라이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활기차게 말했다.

「지금 씻으러 가면 되지! 잡지는 내가 저녁 시간에 알아서 볼게. 밀가루를 체쳐놓고 샹티이 크림도 만들어놓을 테니까 걱정 말라고.」

「샹티이 크림을 쓸 줄은 어떻게 알고?」

「지금 무너진 케이크, 다시 만들 거 아니야?」

「…브라이언, 눈썰미는 여전하네. 샹티이 크림은 내가 알아서 만들 테니까 라임 커드 크림을 좀 부탁해도 될까?」

「하하하하, 물론이지!」

‘어찌 됐건 브라이언은 어젯밤 술자리 다음에 기운을 되찾은 것 같군. 리처드를 만난 게 효과가 있었나 봐.’

진혁은 나름 이 상황에 만족했다. 그는 짧게 설명도 해 주었다.

「코치들이 오기 전에 미리 만들어서 피드백을 받으려고 하거든.」

「그럼 내가 더 빨리 준비를 해야겠군, 기다려. 금방 손 씻고 올 테니까.」

조수는 의욕적이고 활기찬 모습을 보였다.

◈          ◈          ◈

진혁은 스케치북에 새로운 선을 긋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떠올린 생각을 케이크로 만들고 싶었다.

브라이언이 어깨너머로 들여다보더니 물었다.

「아까 만들던 건 다시 안 만들고?」

「아내에게 보낼 디저트 먼저 만들고 시작하려고.」

「아. 그래서 라임 커드 크림인가?」

「아니. 라임 크림은 다른 데 쓸 거야.」

「아내에게 보낼 사랑의 케이크?」

「아니, 그것도 미미에게 줄 케이크는 전부 나 혼자 만들 거고.」

「…코치들 오기 전에 시간이 모자라지 않겠어?」

「충분해.」

진혁은 금속제 사각 틀 바닥에 깔끔하게 자른 스폰지 케이크 시트를 얇게 깔았다.

「스폰지 시트는 또 언제 만들어 둔 거야?」

「아까.」

진혁은 달걀을 집었다. 표면이 거칠거칠한 이 달걀은 유일봉네 아버지 농장에서 오늘 아침에 닭이 낳은 것을 공수해 온 유기농 유정란이다.

톡 하고 껍질을 깨뜨리자 신선한 주황빛 노른자가 또르르 흘러내렸다. 탱글탱글한 달걀노른자 두 개에 향긋한 포도 향을 풍기는 칠레산 백포도주를 쪼르륵 반 컵 따랐다. 백사장의 고운 모래처럼 곱디고운 비정제 백설탕까지 사르륵 얹으면 모든 재료를 다 넣은 것이다.

진혁은 재료들이 소복하게 담긴 내열 스테인리스 보울을 팔팔 끓는 뜨거운 물 위에 올렸다.

그는 브라이언이 어디에 있는지 면밀하게 체크하며 손목을 한 번 움직였다. 재료들은 순식간에 소용돌이치며 몰랑몰랑하니 꾸덕져서 완벽하고도 황홀한 크림 상태로 찬찬히 변해갔다.

진혁은 찬물에 담근 젤라틴을 따로 녹임과 동시에 프랑스의 수제 치즈 업체에서 공수해 온 프로마쥬 블랑(Fromage Blanc)을 다른 스테리인리스 그릇에 옮겨 담았다. 은빛 보울에 담긴 하얀 액체는 생명의 약수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프로마쥬 블랑은 지방이 거의 없다시피 한, 액체에 가까운 생 치즈다. 진혁은 여기에 지방이 풍부해지도록 크림을 더했다.

데운 아카시아 벌꿀을 아까 녹인 젤라틴과 함께 끓이고, 프로마쥬 블랑과 함께 섞는다. 격렬하게 몇 분 동안이나 맨손으로 섞어야 하는 차례다. 하지만 진혁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브라이언이 무엇을 하는지 다시 힐끔 살폈다. 밀가루를 체 치느라 정신없는 것을 보고서 진혁은 피식 웃었다.

‘좋아.’

그리고 단 한 번 손목을 움직였다. 보울 속의 젤라틴과 벌꿀, 프로마쥬 블랑이 아까처럼 제멋대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휘돌기 시작했다. 진혁은 오른쪽에 깨끗한 보울을 새로 놓았다. 아까 달걀노른자와 백포도주로 만들어 둔 크림을 한 번 저어주었다. 진혁이 진기를 뿌려 발생한 그릇 안의 작은 폭풍은 기계 믹서라도 돌린 것처럼 소리도 없이 휘몰아쳐 돌았다. 그릇 안에서만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은 말랑말랑하던 크림을 케첩처럼 점착성 있고 꾸덕꾸덕하게 만들었다.

두 개의 보울이 알아서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며 진혁은 스케치북에 새로운 선을 그었다.

세 개의 케이크가 엇갈린 형태의 그림이 완성될 즈음 무스 역시 빙글빙글 돌기를 멈추었다. 완성된 무스를 본 진혁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됐군.」

이제 틀에 넣고 식히기만 하면 된다. 통상 여섯 시간 정도 걸리는 과정이다. 하지만 진혁은 한 시간 이내로 완성하고자 했다.

‘진기를 조금 보내서.’

「다 됐다고? 벌써?」

아직도 밀가루를 체치고 있던 브라이언이 제과 주방의 한쪽 구석에서 외쳤다.

「?」

「아니, 이제 식히고 있어.」

「그럼 드디어 대회용 메뉴를 하나?」

「그래, 밀가루는 전부 준비됐어?」

「응.」

진혁은 아까 그려놓은 새로운 케이크 그림을 펼쳤다. 이것은 중력을 거스르지 않는 평범한 3단 케이크였다. 단, 가운데에 기둥 심이 있고 밑단과 바로 윗단, 맨 윗단의 케이크가 서로 엇갈려, 마치 나무에 돋은 가지처럼 다른 방향에 뻗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는 어제 함께 술을 마셨던 세 사람을 떠올리며 이 케이크를 그렸다.

브라이언 신이나 리처드 베이커, 그리고 자신.

세 사람 모두 페이스트리 쉐프지만 추구하는 길이 다르다. 리처드는 윈도우 베이커리에서 동네 주민들이 좋아하는 케이크를 만들어 팔고 있으며 진혁은 베이커리 체인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브라이언은 자신만의 패셔너블한 케이크를 만들려 하며 언젠가 세계 대회에서 우승하고 싶어 한다.

셋 모두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같은 목표를 갖고 있다.

맛있는 케이크를 굽는 것이다.

‘새벽에 시험 삼아 만들어 둔 케이크 시트를 얹어서 대충 만들어 볼까?’

세 케이크는 마침 나란히 먹어도 어울릴만한 맛을 생각해 구워둔 것이었다.

‘순서는 이렇게 하자.’

맨 아랫단의 케이크는 초콜릿 캐러멜 바나나였으며 그 윗단은 얼그레이 복숭아 케이크로 하면 될 것이다. 맨 윗단에는 망고 레어 치즈 케이크를 올릴 예정이다.

브라이언이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세 가지가 맛이 어울려?」

「맨 위에서부터 먹으면 돼.」

「흐으으음. 장식하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리겠는데. 이거 이렇게 세 판만 올릴 건 아니지? 꾸미는 건 어떻게 할 거야?」

「초콜릿으로 꽃을 만들어서 얹을 거야.」

마침 오븐이 삐익 소리를 내며 울렸다. 한쪽 구석에서 오븐이 돌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눈치챈 브라이언이 놀라며 물었다.

「하느님 맙소사! 진혁, 도대체 몇 시에 일어난 거야?!」

아까 했던 질문이다. 진혁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오븐 앞으로 걸어가 케이크들을 꺼냈다.

그는 잘 구워진 촉촉한 초콜릿 케이크, 그리고 연갈색 얼그레이 케이크를 꺼내서 냉각기에 넣었다. 그리고 이미 냉각기에 들어 있던 망고 레어 치즈 케이크를 꺼냈다.

진혁은 장식용 쇼피스를 만드는 동안 브라이언에게 뭘 시킬까 잠시 고민했다.

무공을 사용해 뚝딱뚝딱 만들 때는 다른 사람이 이쪽을 보지 않게 하고 싶다.

‘아 참, 이 망고 케이크는 여분이 있었지?’

「브라이언! 이 망고 레어 치즈 케이크 한 번 먹어보고 평 좀 해볼래?」

동그란 모양과 각진 모양에서 맛이 어떻게 달라지나 보려고 다른 모양으로 두 판을 구웠다.

진혁은 각진 망고 레어 치즈 케이크를 슬쩍 밀어놓았다.

「오!」

브라이언이 입맛을 다시며 다가왔다.

「일찍 일어나길 잘 했어! 역시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도 먹는다니까.」

「지금 내 케이크를 벌레에 비교한건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벌레?」

두 사람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진혁은 멀리서 걸어오는 육중한 발소리를 들었다.

「누가 오는데.」

익숙한 발소리에 진혁이 피식 웃었다.

「난 못 들었는데.」

임진혁이 예고했다.

「이제 곧 노크 소리가 들릴 거야.」

「발소리 같은 건 안 들린다니까.」

-똑똑똑

정말로 그때 누군가 주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브라이언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뭐야, CCTV라도 있어? 어떻게 알았어?」

「들어와!」

진혁이 소리쳤다.

헝클어진 붉은 곱슬머리를 긁적이며 리처드 베이커가 히죽거리며 들어왔다.

「뭐 먹을 거 없어?」

그는 어제 늦게까지 야식을 먹어 아직도 볼록 튀어나와 있는 배를 두드리며 물었다.

「진혁이 넉넉하게 만든 케이크라든가, 쿠키라든가, 샌드위치 같은 것 말이지.」

브라이언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리처드! 그런 건 없어. 오늘 오후 비행기 타려면 어서 가서 준비해야 하지 않나?」

진혁이 웃음을 터트렸다. 식탐이라고는 없던 브라이언이 강마리오처럼 행동하는 것이 우스웠다.

「망고 레어 치즈 케이크 좀 시식해 줄래?」

리처드는 이 제과 주방이 자기 집이나 되는 것처럼 당당하게 행동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세면대에 다가가 자연스럽게 발판을 밟고서 흘러나오는 물에 손을 씻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망고 레어 치즈 케이크 앞으로 다가가 코를 들이밀었다.

「오! 망고 향이 좋은데? 너무 달지도 않고 딱 적당한데.」

노란 사각 케이크 가까이에 코를 갖다 댄 리처드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레몬을 넣었어?」

「껍질을 갈아서 조금. 리처드 개 코네?」

「이 정도는 보통이지.」

호승심이 생긴 브라이언 역시 망고 레어 치즈 케이크에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댔다. 브라이언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크림치즈는 프랑스산 카프리스 데 앙쥐를 썼지?」

리처드가 놀라서 물었다.

「브라이언! 맛보지도 않고서 그걸 어떻게 구분해?」

「임진혁은 맨날 이런 식으로 구분하더라고. 눈으로 보면 다 알던데?」

리처드 베이커는 팔짱을 끼고서 생각에 잠겼다. 그는 깨달았다는 듯이 주방 왼쪽 끝에 있는 분리수거함으로 향했다. 쓰레기통 뚜껑을 들춰 본 리처드가 외쳤다.

「브리, 이거 봤지!」

쓰레기통 속에 있는 낯익은 치즈 포장지를 보고서 리처드가 외쳤다. 브라이언이 낄낄거렸다.

「아까 밀가루 봉지 버리면서 보긴 했지. 그래도 보기만 해서 맞추었잖아?」

「훌륭한 페이스트리 쉐프라면 후각과 미각을 활용해야지.」

「시각과 추리력, 회색 뇌세포도 말이야.」

「진혁! 여기 있는 이 접시 써도 되나?」

「응!」

리처드는 신이 나서 칼과 접시, 포크를 꺼내왔다.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채 히죽히죽 웃음을 흘리며 케이크를 반으로 썰었다.

절반으로 잘린 케이크를 자신의 접시 위로 옮기려는 브라이언의 손목을 리처드가 잡았다.

「브리.」

「엉?」

「진혁이도 맛을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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