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427화 (425/656)

제 427화

리처드 베이커가 단호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흐역이라는 발음은 내 아들 이름에 넣을 수가 없네.」

「뭐라고? 흐역?」

「진 흐여어어어억 말이야.」

리처드가 의도적으로 혀를 굴리며 발음했다. 브라이언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푸하하하하!」

어느 순간부터 진혁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러워했다.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무거운 그림자가 어깨를 내리눌렀다. 하지만 리처드 베이커가 저런 식으로 놀리는 걸 들으니 느낌이 전혀 달랐다.

브라이언 신이 손에 쥔 닭 다리로 접시를 두드리며 웃는 동안 진혁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우리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인데.」

「어, 그건 실례.」

「애 아빠가 아기 이름도 발음 못 하면 곤란하긴 하지. 내 이름을 따서 지었다니 민망하네.」

「하하.」

「하지만 진혁 자네는 너무 이레귤러야. 난 내 아들이 브라이언처럼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닭 다리 살을 뜯던 브라이언이 큭큭 웃었다. 튀긴 닭은 바삭하고 짭짤해서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내가 평범하게 살고 있긴 하지.」

「다 그렇게 사는 거라고, 한두 번씩 가게도 망해 가면서. 고작 처음 연 가게잖아? 나는 여덟 번이나 실패한 적이 있으니 지금 가게가 잘 되고 있는 거야. 이제 일곱 번만 더 실패하면 돼.」

「여덟 번…, 아니 지금 나보고 7번을 다 망하라는 이야기야?」

브라이언이 어이없어했다. 진혁이 웃었다.

「맹자에도 칠전팔기(七顚八起)라는 말이 있어.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면 된다는 이야기지.」

「잔이 비었네! 맥주를 좀 더 시키자고.」

리처드 베이커가 손을 들어서 외쳤다.

“여기요! 맥주 더!”

「아니, 한국말을 대체 누구한테 배웠길래 저 말만 저렇게 유창해?」

이전에 H & J 베이커리 앤 카페에서 지낼 때, 백진영이 가르쳐 주었다. 진혁은 모르는 척했다.

「그러게….」

브라이언이 말했다.

「그냥 솔직하게 자기가 알려 줬다고 해.」

「내가 알려준 건 아닌데.」

「사실대로 말해도 뭐라고 안 할게.」

「나 진짜 아니라고.」

진혁이 정색했다.

「아니라는데 왜 자꾸 그래.」

「하하하하.」

스마트폰을 본 진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

진혁이 자리를 비우자 브라이언이 중얼거렸다.

「임진혁 쉐프한테 저런 면도 있었는지 몰랐네.」

「세계 대회니 뭐니 일찍 나가서 그렇지 그냥 순수한 녀석이야. 같이 H & J에서 일할 때 봤어.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속도가 느리면 해결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지. 제일 쉬운 건 사람을 새로 고용하는 거고, 더 좋은 건 느린 애들을 빠르게 하는 거야. 가장 무식한 게 자기 몸으로 때우는 거지. 그런데 저 임진혁이는 자기도 고용된 몸인 주제에 지가 오래 일해서 그만큼을 때우려고 하더라고. 젊어서야 그렇게 해도 되지만 나처럼 나이 들어 봐, 몸이 배겨나지를 못해. 적당히 쉬어가면서 해야지. 저런 놈들이 과로사하는 거야, 과로사.」

「리처드, 그 얘기 좀 자세하게 들려줘.」

「그게 말이지….」

리처드 베이커는 과거 자신이 진혁을 보면서 느꼈던 것들을 이야기해주었다.

다른 직원 세 명의 업무량을 혼자 감당하던 진혁.

리처드 베이커는 나름대로 자신이 손이 빠르다고 생각해 왔다. 그렇기에 진혁 1인분의 일을 하기 위해 내기를 했으나 보기 좋게 져 버렸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샌드위치 대결을 계속했다.

진혁이 만들어낸 갖가지 케이크 위치는 좀 못생기긴 했어도 맛이 좋았다.

부족했던 디자인적인 면도 유키코나 다른 이들의 조언을 받으면서 점차 나아져 갔다.

「진혁의 가장 좋은 점은 귀가 열려 있다는 거지.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허투루 듣지 않아. 젊은 나이에 크게 성공한 애들은 세상을 쉽게 본다고. 자기가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자만심에 가득 차 있는데 진혁은 다르지.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반면에 브라이언 자네는 그냥 나처럼 평범해. 그리고 열심히 하잖아?」

전에도 얼핏 들었던 이야기지만 다시 들으니 또 달랐다.

「아뇨, 들으니까 알겠는데. 진혁은 부족한 시간을 노력으로 커버했을 뿐이잖아.」

그냥 평범한 또래 친구다. 그가 실력이 뛰어난 이유는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이다.

괜히 한 사람을 우상화하고 부러워하고 질투했는지도 모른다. 경력이 짧은 만큼 그 짧은 시간 내에 혼을 불태우듯 열심히 했다.

「도대체 내가 뭘 부러워했는지 모르겠네.」

「무슨 이야긴가, 브라이언?」

브라이언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리처드. 그보다 아기 이름은 내 이름보다 진혁이라고 짓는 게 더 좋지 않은가? 부모라면 누구라도 자기 아들이 저렇게 살기를 바랄 거야.」

「아니, 저 모습도 좋기야 하지. 하지만 발음이 거지 같다니까. 흐혀여어어어어어억. 그리고 나는 자네가 더 좋아.」

「푸흐흡.」

브라이언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리처드 베이커가 자신을 그렇게 좋게 봐주었는지 몰랐다.

그저 같은 시간에 일어나 연습을 계속했던 것뿐이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같이 새벽에 일어나서 대회 준비를 했다.

실력이 부족하니 노력이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하는 디자인을 케이크로 만들어내려면 정확한 파이핑 솜씨와 색깔 감각이 필요하다.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남들과 다른 특색있는 장점을 갖고자 했다.

최신 패션 일러스트 잡지를 구독하여 넘겨 보면서 유행하는 색감을 살폈다. 새로운 색을 조색해서 케이크에 올려 보았고, 아내의 조언을 얻었다.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 노력하는 그 모습을, 리처드 베이커가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도 젊을 때는 자네같이 살았다고.」

「아니 리처드 씨는 지금도 열심히 살잖아요.」

「지금은 다 귀찮아. 상이고 뭐고 필요 없어. 그냥 퇴근하고 아기 기저귀 가는 것도 벅차다고. 지금 여기 잠깐 와 있으니까 해방되고 좋네.」

「허허허허.」

「물론 아기는 귀엽고 아기 똥도 귀엽지만 열두시간 가게 열었다가 집에 와서 기저귀 갈고 있으면 똥이 버터크림 같고 버터크림이 똥 같은 기분이 든다고.」

「요즘 어쩐지 똥 이야기를 많이 듣네….」

「누가 똥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에 실비안 웨인스톡 씨를 만나게 됐는데, 그분이 진상 손님 이야기를 하다가 그 이야기를 하더라고.」

브라이언은 그 인상 깊은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고자 했다. 하지만 흥분한 리처드 베이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아니 뭐라고?! 실비안 웨인스톡 쉐프님을 만났다고! 어디야, 설마 지금 한국에 와 있어?!」

「임진혁 쉐프의 대회준비팀 코치야.」

「맙소사아아아아! 웨인스톡 쉐프의 연간 세미나 가격이 얼마인 줄은 알아? 1인당 참석비가 1만 달러야, 1만 달러. 그런데도 선 예약이 넘친다고. 그 돈 귀신 할망구 웨인스톡 쉐프를 여기까지 불렀다니! 도대체 얼마를 쓴 거야? 그 돈이면 아기 브라이언을 스트레이트로 아이비리그 대학까지 보낼 수 있겠네!」

「잠깐 리처드 당신 너무 갔어.」

「아이비리그까지는 무린가? 그럼 주립대학?」

「아니 아니 그보다 아들 대학교육을 벌써 생각하고 있어?」

「당연하지. 대학 학비로 몇만 달러가 드는데 미리 예산을 짜야 하지 않나?」

「리처드야말로 아버지를 본받아서 제과제빵을 하고 있잖아. 아들에게 가게를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거야? 진혁 쉐프도 부자 가게를 하고 있는데.」

「에이, 가게는 케이시가 물려받을 거야. 그리고 리틀 브라이언이 대학을 가고 싶을지 제과제빵을 하고 싶어 할지 지금은 모르지 않나? 아이가 나중에 선택할 수 있게 해주고 싶다네. 뭐든지 하고 싶은 걸 하면 되지, 미리부터 내가 걔 미래를 정할 수는 없어. 그리고 혹여 걔가 제과제빵을 하고 싶다고 해도, 나중에 알아서 지 가게를 차릴 정도로 성장하면 될 일이야.」

「제시카는 아직 임신하지도 않은 아이를 법률 영재로 키우고 싶어 하는데.」

「막상 낳아보면 또 다를걸.」

「하하.」

「애들은 맘대로 안 돼. 지금 내가 이쪽 보라고 까꿍 까꿍 온갖 애교를 부려도 무지개색 모빌 보고 있다고.」

「아하하하하.」

전화 통화를 마친 임진혁이 돌아왔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고 있어?」

「별 것 아니야.」

「여하튼 리처드, 들러줘서 고마워. 이왕 오는 것 가족들까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니지, 아니지. 그렇게까지 신세를 질 수는 없어. 태어난 지 기껏해야 며칠 되지 않은 아기가 비행기를 타는 것도 좋지 않고.」

「아, 그렇지.」

진혁이 머쓱해 했다. 브라이언이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투명한 유리잔에 맥주를 새로 따르자 하얗게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크림 모양의 미세한 거품을 들여다보며 브라이언이 중얼거렸다.

「진혁.」

「응?」

「미안하다.」

「음.」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열심히 할게.」

「그래.」

「뭐야, 두 사람? 분위기가 왜 이래?」

리처드 베이커가 다시 맥주를 부어 주었다.

「더 마시라고!」

「내일 새벽부터 다시 연습해야 된다고요.」

「여태까지는 안 했어?」

「안 한 건 아니지만.」

「그럼 맥주 좀 마셔도 일어날 수 있을걸.」

「아니, 벌써 1리터는 마셨잖아.」

「조금만 더 마시자고.」

「알았어, 마지막 한 잔만 더.」

「한 잔만 더!」

술자리는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          ◈          ◈

다음날 새벽, 5시에 일어난 브라이언은 눈을 비비며 제과 주방으로 향했다. 간밤에 맥주를 지나치게 많이 마신 나머지 새벽에 깨어 여러 차례 화장실에 가느라 제대로 자지 못했다.

‘으으으으.’

아니나 다를까 제과 주방에는 이미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브라이언이 노크했다.

「임진혁! 자리에 있나?」

「들어와.」

「언제부터 한 거야?」

「한 시간 전부터?」

테이블 위에는 한때 케이크였을지도 모르는 무언가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상자 속에 넣은 케이크를 잔뜩 흔들어 크림과 시트가 분리되게 만든 다음에 접시 위에 올려놓으면 이런 모양이 될 것이다.

임진혁이 만들었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음식물 쓰레기처럼 처참하게 무너진 케이크 현장을 보며 브라이언이 입을 딱 벌렸다.

「세상에. 이거 지금 진혁 자네가 만든 거라고?」

진혁이 대답했다.

「거꾸로 고정해서 보여주려고 했는데 고정이 잘 안 되네.」

「진혁 잠은 좀 잤어? 피곤하지는 않고?」

「피곤하지 않아.」

임진혁은 사실 한숨도 자지 않았다. 애초에 맥주를 그만큼 마셨다고 취하지도 않았다. 다른 이들이 취해서 곯아떨어져 있는 동안 그는 주정을 배출하고 멀쩡한 정신으로 운기조식을 했다.

미미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으니 자는 척 침대에 누울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씻기만 하고 바로 제과주방으로 와서 생각해두었던 케이크를 준비했다.

이미 말했던 ‘거꾸로 뒤집힌 한정식집’을 실제로 만든 다음에 사람들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

‘이거, 어느 시점에는 무너질 수밖에 없잖아?’

미미를 위해서 개발한 기술이 케이크에도 효용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 기술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진혁이 계속 케이크에 손을 대고 있어야 한다.

‘손을 떼면 다시 떨어져 버리다니. 다른 방식으로 해야겠다.’

예상치 못했던 허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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