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424화 (422/656)

제 424화

그날 미팅은 소득 없이 끝났다.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브라이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혁 쉐프, 솔직히 말해서 나는 여태까지 내 스승이 이 바닥에서 제일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했단 말이지?」

「그런데?」

「다 똑같아. 여기서 생존하려면 누구나 저렇게 될 수밖에 없나 봐.」

「…글쎄? 성격이 강한가? 저 나이 때면 다 그렇지 않나.」

진혁은 이 슈퍼스타 페이스트리 쉐프들이 특별히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깊이 파고 들어가며 경력을 쌓으며 아는 것이 많아지면 자신감이 생기고 오만해진다. 조금 두들겨 주면 금방 해결되는 치료 방법이다.

「그 나이 때라니, 마치 저 나이였던 적이 있었던 것처럼 말하네.」

「하하.」

「하아. 나는 나중에 나이 들어도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두 사람만 남은 회의실에 한 비서가 방문하여 브리핑했다.

“이번에 참여하실 월드 페이스트리 챔피언십에서 최선의 실력을 발휘하실 수 있도록 황 회장님께서 전력으로 도우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니, 그냥 평소대로 연습하면 되는데.”

“최근 5회 간의 우승 경향과 예상 심사 위원의 성향 정보 분석을 들으시겠습니까?”

진혁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최근 두 번은 봤는데.”

“<고향의 자연>과 <모던 클래식>을 보셨군요.”

한 비서가 서류를 후루룩 넘겼다. 그는 과거 월드 페이스트리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이들이 어떤 경력을 가졌으며 무엇을 강점으로 가졌는지 짚어주었다.

“케일 보니타 쉐프는 벨기에 출신으로, 식물과 동물의 모양을 진짜같이 재현해내는 웨딩 케이크로 유명했던 분입니다. 웨딩 케이크에서만 20여 년 이상의 경력이 있고, 실비안 웨인스톡 쉐프의 직계 제자죠.”

“아. 그분이 고향의 자연 테마로 우승했죠?”

브라이언이 아는 척을 했다.

“벌새가 백합에 올라간 모양의 케이크가 우승했지? 다른 사람들이 식물이나 동물 한 가지를 골라서 집중한 동안 엄청난 속도로 두 가지를 다 만들어 장식했잖아.”

한 비서는 프레젠테이션을 아주 제대로 준비해왔다. 케이크를 만드는 동영상까지 어디선가 입수해 와서 틀어주었다. 화면 속에서 케일 보니타가 과일을 다져 넣은 케이크 시트를 오븐에 넣고 백합꽃을 만들기 시작했다.

“무화과와 오렌지 케이크라, 복합적인 도전이네.”

“아무래도 요즘은 거의 생크림 케이크나 초콜릿 케이크, 그리고 치즈 케이크들이 팔리잖아? 복잡하고 생소한 맛의 케이크를 개발하는 경우가 드물지.”

“음.”

그 전해의 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초콜릿 카르파치오와 초콜릿 젤리를 얹은 콜리플라워 케이크였다.

다만 케이크의 모양 자체는 초콜릿이나 콜리플라워와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모던 클래식>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나폴레옹에게 현대의 정장을 입히고 대포 모양 케이크 위에 앉혀 놓았다.

『페이스트리 쉐프 포이레 텐저는 모든 미식적 요소들이 달콤하게 모아두었다가 마지막에 씁쓸한 맛을 주어서 모든 맛을 모으고자 했습니다.』

동영상에서 흘러나오는 해설을 들으며 브라이언이 물었다.

“씁쓸한 맛을 어디에 숨겨 놓았다는 건가?”

진혁이 턱으로 고갯짓했다.

“딱 보면 저거밖에 없네. 대포 안에 들어있던 포탄.”

『포탄 모양의 초콜릿 캡슐 안에 달콤쌉쌀한 맛이 숨어있었습니다.』

“저걸 어떻게 맞추냐. 미리 봤어?”

“아니, 케이크 사진만 봤어. 그런데 저 케이크의 단면도를 보면 전부 균일하니까 뭔가를 숨겨놓았을 수가 없어. 쓴맛이 섞여 있다면 케이크 전체에서 쓴맛이 났을 거 아냐. 그러니까 별도로 제작되어 포대 안에도 들어있고 케이크 위에도 얹혀있는 포탄밖에 없지.”

“듣고 보니 그렇네.”

“보면 보이잖아.”

한 비서가 씨익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두 분을 위해서 준비했습니다. 포이레 텐저의 모던 클래식 케이크입니다.”

직원이 미소지으며 카트를 끌고 왔다. 나폴레옹은 없지만 조그마한 와인색 열매가 올망졸망하게 얹혀 있는 새까만 케이크다.

방금 전에 다큐멘터리를 통해 만드는 장면을 본 케이크가 눈앞에 공수되어 오자 브라이언은 크게 놀랐다.

「하느님 맙소사! 쉐프 포이레가 뉴욕에서 윈도우 베이커리를 열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설마 지금 거기서 사 온 건가?」

저도 모르게 영어로 지껄이고 있는 브라이언을 무시하고 한 비서가 진혁에게 말했다.

“황 회장님께서 포이레 쉐프를 잠깐 초청하셨습니다. 원하신다면 만나 보셔도 좋습니다.”

브라이언이 혀를 내둘렀다.

“제시보다 더 내조를 잘 하는 아내는 처음 봤네.”

진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케이크를 먹어본 다음에 결정하지.”

한 비서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나자 직원이 케이크를 절반으로 잘랐다. 그리고 반으로 자른 케이크를 진혁과 브라이언의 앞에 하나씩 놓아 주었다.

달콤한 향기가 훅하고 풍겨왔다.

“카르파치오는 보통 날생선이나 익히지 않은 신선한 쇠고기로 만들잖아? 한 걸음 더 나간다고 해도 보통 얇게 썬 닭고기나 조개관자 정도를 올린다고. 레몬즙이나 라임즙, 그리고 후추와 소금, 올리브나 트러플 오일로 간하는 요린데. 초콜릿으로 이걸 만들다니.”

“사실 이름만 카르파치오지.”

얇게 썬 다크 초콜릿 잎에 화이트 초콜릿으로 된 꽃잎이 조화롭게 뿌려져 있다. 그 위에는 통째로 올라온 핑크빛 견과류가 보였다. 그 독특한 향을 맡은 진혁이 짧게 말했다.

“이건 핑크 페퍼네.”

“보통 육류에 많이 쓸 텐데.”

분홍 후추는 같은 후추과에 속하지만, 흑후추나 백후추와는 맛의 결이 다르다. 살짝 달콤하면서 귤이나 라임이 가진 특유의 시트러스한 맛이 있다. 크기는 아주 작지만 통째로 씹어먹어도 작은 금귤을 껍질째 씹어먹는 것과 비슷한 맛이 난다.

“꼭 핑크 페퍼를 썼어야 했나? 다크 초콜릿하고 카다멈도 어울렸을 텐데.”

진혁은 케이크를 맛보았다.

몰캉거리며 쫄깃한 젤리의 식감, 그리고 시트러스 향이 짙은 핑크 페퍼에 잘게 간 콜리플라워와 촉촉하고 달콤한 초콜릿 시트는 놀랍게도 아주 위태롭게 조화를 이루었다. 단 1g만 정량이 달라도 괴상한 맛이 날 것이 틀림없다.

“균형을 아주 잘 잡았는데?”

“진짜.”

미식가들이 선호할만한 복합적이고 개성적인 맛이다. 진혁은 이런 맛보다는 조금 더 단순하고 솔직한 맛을 즐겼다.

“핑크 페퍼는 견과류 알레르기 있는 사람들은 못 먹을 텐데.”

“그래?”

“흑후추나 백후추하고 종이 달라서 말이지.”

“흠, 그래도 이게 올라가 있는 편이 맛이 좋기는 한데.”

최근 제과제빵계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하여 폭넓게 지식을 쌓은 한 비서가 말했다.

“아무래도 대회에서 미식가들을 상대로 한 ‘맛’과 일반 대중들을 상대로 하는 맛은 다르니까요. 판정 기준부터 단순한 맛보다는 복합적인 맛을 우선하니 말입니다. 초콜릿이라고 하더라도 초콜릿 자체의 맛을 깔끔하게 살리는 것보다, 다양하고 신기한 향을 가미한 쪽이 좋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핑크 페퍼를 올린 게 아니겠습니까?”

“흐음, 그럴지도 모르겠군.”

“임진혁 쉐프는 한 가지 맛을 다양한 층으로 겹쳐 올리면서 쌓아가는 걸 선호하잖아? 그런데 이쪽 대회에서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닌가 본 데.”

브라이언이 웃음을 실실 흘렸다.

“마리오 녀석은 예선에서 탈락하겠는데.”

“그야 나랑 같이 나가니까.”

“마리오가 떨어질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거야?”

“응. 같은 국가에서 출전 신청을 하면 둘이서 따로 겨루거든.”

“흐아. 나 지금 한순간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왜?”

브라이언은 왜 부끄러웠는지 말하지 않았다.

‘임진혁 쉐프와 국적이 달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버렸네.’

“쉐프를 만나보실 겁니까?”

“아니요,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돌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임진혁이 한 비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서와 직원이 나가고 나서 브라이언이 물었다.

“그래도 한 번 이야기 들어보는 게 낫지 않아?”

“어차피 이번에는 심사위원이 다 갈려. 한 번 심사위원을 한 사람은 다시는 할 수 없으니까, 그때 대회에 나온 심사위원과 지금 심사위원들은 달라. 주제가 뭐가 나올지 예상하는 건 실비안 웨인스톡 쉐프와 주영모 쉐프가 할 거고.”

“아, 그래서 부른 거구나.”

“아드레아노 존부 쉐프와 시몬 리옹 쉐프는 기술을 가르쳐줄 거야.”

“무슨 기술?”

“젤리 안에 잉크를 심어 넣는 기술, 그거 열두 개의 잉크를 각자 다른 심으로 어떻게 꽂는지는 시몬 리옹의 독보적인 기술이지. 그리고 존부 쉐프가 사용하는 특별한 치즈와 초콜릿 컨스트럭션 레시피도 궁금하고.”

브라이언은 그게 어떤 레시피인지 듣자마자 바로 깨달았다.

“하프 치즈 앤드 초콜릿 케이크 말이지?”

“초콜릿으로 기둥을 세우고 치즈로 맛을 낸다는 그 케이크 말이야.”

◈          ◈          ◈

한 비서는 자리를 떠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는 전화를 걸어 상대방이 받자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예, 임진혁 쉐프님은 케이크가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쉐프를 만나고 싶어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쉐프들은 아직 교섭하지 못했고?」

「비행기 표와 제반 비용, 그리고 추가적인 돈을 제공해도 자신의 가게를 뜨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의가 부족했던 게 아닐까?」

「한 차례 방문에 2만 달러라면 이미 지나치게 충분한….」

「아니, 아니. 반드시 돈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그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사한 다음에 내 남편을 방문하게 만들어요. 고서를 좋아한다면 책을 안기고, 미식가라면 좋아하는 음식을 즐기게 하면 되지. 이런 것까지 일일이 설명해 주어야 하나? 한 비서님이 그래서 월급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제가 부족했습니다.」

「다음에는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믿어요.」

배경에 희미하게 괴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 비서는 그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공식적으로는 요양하고 있는 황태명의 아들이자 미미의 부친. 실제로는 딸에게 바로 권력과 재산이 승계되는 것을 알고서 친딸을 해치려고 했던 자다.

한 비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나쁜 타이밍에 전화를 걸었다. 갇혀 있는 부친과 대화를 나눈 날이면 미미는 유난히 감정적으로 되곤 했다.

‘언젠가는 부군 되시는 분께 아버지의 일을 이야기하셔야 할 텐데 말이지. 평범하게 자라신 분인데.’

황려권에 대한 진실은 미미의 수하들 중 오직 다섯 명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황미미를 포함한 여섯 명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임진혁이 뛰어난 청력으로 모든 사실을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          ◈          ◈

복도 너머에서 한 비서와 미미의 통화를 의도치 않게 들어버린 임진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한 비서보다 훨씬 더 청력이 민감했기에 비서가 듣지 못한 다른 소리들도 들을 수 있었다.

‘황려권 저놈은 정말로 몹쓸 놈인데. 죽여 줘야 하나?’

그는 아내의 앞길을 위해 쓰레기를 치워줘야 하지 않을까 잠시 고민했다.

‘장인을 어서 빨리 죽이는 편이 좋지 않을까?’

황려권은 또 다른 탈출 시도가 좌절되자 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친딸에게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품위 없는 욕설이었다.

‘자기 딸을 개자식이라고 놀리면 자기가 개가 되잖아. 허, 참.’

다양한 살인 방법에 대해 생각하던 진혁은 문득 스마트폰이 울리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의 전화였다.

진혁은 부친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니야. 더 이상 살인은 하지 않기로 했으니….’

결혼하면서 평범하게 살려고 마음먹고, 주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도 최소한으로 하려고 했다.

‘하지만 세상이 날 가만히 두지 않네.’

“여보세요, 아버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