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0화
흥겨운 사물놀이가 끝나고 대폭 생략된 전통 혼례식이 시작되었다. 본디 전통 혼례식에서는 신랑이 신부보다 먼저 입장한다. 전안례라 하여 기럭아범에게 나무로 깎은 기러기를 받아 신부댁에게 바치고서 절을 한다.
이는 백년가약을 맹세한다는 의미다. 그러고 나서 신부가 들어와 신랑에게 절을 하는데, 그들은 이 절차를 바꾸었다.
애초에 신부의 어머니는 옛날에 돌아가셨고 아버지 역할을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이런 경우 조선 시대에는 삼촌 등 아버지 역할을 할만한 웃어른이 대신 나왔다. 하지만 미미는 병든 아버지가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도, 아버지 역할을 할만한 웃어른을 모시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신랑과 신부는 나란히 들어와 천지신명을 향해 절을 올렸다.
기러기는 손님상 위에 있었다.
손님 모두 앉은 탁자 가운데에 실제 기러기와 유사한 모양의 케이크가 놓여있었다. 신랑이 미리 만들어 둔 기러기 모양의 케이크는 네 사람당 하나씩 돌아갈 만큼 넉넉했다.
교배(交拜)라 하여 서로 번갈아 가며 맞절을 할 차례가 되었다.
이마에 연지를 찍고 대례복을 입은 신부는 무거운 옷자락을 들어 올려 큰절을 올렸다. 한복을 입은 도우미가 옆에서 부축하여 절을 하도록 도왔다. 신부가 두 번 절하면 신랑이 이 절을 받고 한 차례 절을 해주어야 하나, 두 사람은 서로 한 번씩 맞절하는 것으로 단순화했다. 이제 서천지례라 하여 하늘을 대신해 혼인을 집전하는 집례자가 성혼 선언을 해야 한다. 하나 두 사람은 스스로 하기로 했다. 미미가 먼저 자신이 써온 편지를 읽었다.
“검은 머리가 파 뿌리처럼 희어질 때까지 곁에 머무르겠습니다.”
진혁의 검은 머리가 하얗게 세는 일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의도치 않게 영원을 맹세하는 편지 내용을 들은 후 진혁은 임진희가 써준 선서문을 보았다.
함께 태어난 혈육처럼 아끼고 사랑하겠다는 언급을 본 그는 그 부분을 아예 빼버렸다.
“…평생 동안 아끼고 사랑하겠습니다.”
누구보다도 더 진희가 열렬하게 손뼉을 쳤다.
“자식, 눈치가 좀 생겼는데?”
“진희야. 무슨 일인데?”
“저놈이 글쎄 성혼선언문을 직접 안 쓰고 못쓰겠다면서 나한테 써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대충 써서 줬지. 망할 놈이 저걸 그대로 읽을까 봐 좀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러지는 않네.”
“진희야.”
우아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어머니가 진희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아우! 엄마! 잘못했어요!”
진희는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 도망쳤다.
그리고 합근례(合?禮)가 남았다.
두 사람이 하나의 표주박을 갈라 만든 술잔에 술을 담아 마신다.
앞으로 하나가 되어 살아가겠다는 맹세를 뜻하는 순서다.
미미는 바가지에 담긴 술을 홀짝홀짝 한 입 마셨다.
진혁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 번 만에 벌컥 원샷했다.
“신랑이 호탕하구만!”
“잘 살겠어!”
사람들이 손뼉을 쳐 주었다. 이제 두 사람의 바가지를 포개어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서부모례라 하여 부모에게 인사드릴 차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 의논해 그 인사를 생략했다. 대신 해와 달을 비롯한 천지신명에게 큰절하여 경의를 표하였다.
흥겨운 사물놀이 공연이 다시 이어졌고, 두 사람은 각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혼인 예복에서 평범한 두루마기와 바지로 갈아입고 나온 진혁은 역시 한복을 입은 미미와 다시 만났다.
미미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고 진혁은 그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탁자를 돌아다니며 인사를 했다. 음식을 먹을 틈도 없었다.
“이 기러기, 처음에는 그냥 조각상인 줄 알았어.”
“하하. 그냥 잘라서 드시면 돼요.”
“어쩌면 케이크를 이렇게 감쪽같이 만들었담.”
예전에 쿠프 드 몽드 파티쉐리에서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언급했던 적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꿈꾸었던 완벽한 ‘달콤한 연회’에 대해서 말이다.
그는 연회에 사용될 의자부터 테이블, 탁자 위의 린넨부터 바구니에 담긴 꽃과 과일, 그리고 촛대와 양념통, 은 식기까지 전부 마지팬으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벌레들이 습격하여 연회는 완전히 중단되고 말았다.
진혁은 원래 결혼식을 그런 식으로 하면 어떨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수백 명의 손님이 방문할 연회에서 탁자와 식탁 등 모든 것을 마지팬으로 만들려면 엄청난 시간과 돈, 그리고 기획이 필요했다. 더 이상 단 것을 많이 제공하는 것이 부유함과 고귀함을 증거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 등도 한몫했다. 불룩하게 나온 배를 보면서 위엄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영모 쉐프가 히죽히죽 웃었다.
“결혼 축하하네, 임진혁 쉐프. 이제 인생의 무덤에 들어왔구만.”
드림팀의 미팅은 바로 이틀 후에 진행될 예정이었다. 진혁은 웃으며 말했다.
“축하 감사합니다.”
짓궂은 농담을 하는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는 적당히 감사의 말을 하면서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한쪽 구석에서 아내 없이 홀로 갈비탕을 떠먹고 있던 브라이언 신을 발견했다.
“브라이언!”
“여어.”
“분명히 아내도 같이 초청한 것 같은데.”
해외에 거주하는 손님에게는 일괄적으로 비서가 2인분의 비행기 표와 숙소 티켓을 제공했다고 들었다. 진혁이 맞은편에 앉자 미미도 옆에 앉았다.
“바빠서 오지를 못 했어. 그래도 축하한다고 전해 달라고 하더라.”
“하하, 고마워. 그리고 승낙해줘서 고맙고.”
“당장 내일 모레부터잖아? 아예 짐을 다 챙겨 왔다고.”
브라이언은 의욕이 하늘까지 닿아 있는 상태였다.
“이미 진혁 쉐프 자네가 생각해놓은 아이디어가 있겠지. 3개월은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시켜서 현실에 내놓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야. 그러니 여러 가지의 아이디어를 브레인스토밍하기보다, 어서 빨리 최고의 아이디어를 내는 게 좋겠어.”
자신의 대회처럼 흥분해서 말하는 모습을 보며 진혁이 손을 내저었다.
“뭘 할지는 이미 생각해 뒀어.”
“잠깐, 심사 기준을 잘 알고 있는 코치들을 여럿 섭외했다고 들었는데.”
“물론이지.”
“세계 최고의 심사위원들이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는지 직접 배울 수 있다는 건 정말로 엄청난 기회야. 내가 여기 왜 왔는지 알잖나? 심마니에게 산삼 캐는 방법을 알려주는 거나 다름없다고.”
“괜찮아.”
“후…, 하긴. 알아서 잘 하겠지.”
브라이언은 멋대로 납득했다. 그는 자신이 품고 있었던 의문을 물었다.
“그런데 나를 보조로 선택한 이유는 뭐야?”
“….”
진혁은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 브라이언의 눈을 응시했다.
마리오 강을 보조로 쓰려고 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그 녀석은 기본적으로 별로 성실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맛있는 빵이나 제과류를 계속 만들어 주면서 꼬드기면 자신의 능력보다 120% 이상을 해낸다.
반면에 브라이언 신을 보조로 요청한 이유는 전혀 달랐다. 그만이 갖고 있는,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서 보여주었던 장점을 살려 센스를 익힐 수 있기를 원했다.
‘네 취향이 제일 평범하니까.’
브라이언은 진혁이 아는 이들 중 제일 ‘대중적인’ 취향을 갖고 있는 페이스트리 쉐프였다. 그는 준비하는 도중에 진혁 대신 ‘일반인의 눈’이 되어줄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 브라이언이 기뻐할까?
임진혁이 기억하는 ‘브라이언 신’은 항상 특별함을 추구해왔다.
진혁은 가볍게 말했다.
“내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그렇지, 디저트 서바이벌 쇼가 거의 첫 데뷔 무대였다시피 했지.”
아버지가 멀리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진혁아! 이리 와 봐라.”
브라이언이 사과했다.
“내가 괜히 이런 걸 물어봤네. 모레 이야기하자고.”
“그래, 맛있게 먹다 가.”
임진혁이 일어나고 나서 미미가 영어로 물었다.
「미스터 신.」
「브라이언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제 비서가 무례하게 행동했다고 들었어요.」
그녀는 분명히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묘하게 쌀쌀해 보이는 태도였다.
「오해가 풀렸으니 괜찮습니다.」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제 불찰이에요. 실수한 이는 적절한 처벌을 받았으니 염려하지 마세요.」
「아니 정말로 괜찮은데요.」
「3개월 동안 임진혁 씨를 잘 부탁해요. 과욕에 앞서 무리하거나 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도록 도와주시리라 믿어요.」
브라이언은 큭큭 웃었다. 방금 일순 차가워 보였던 것은 역시 착각일 것이다. 갓 결혼한 새신부가 남편을 걱정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미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자신의 부인을 떠올리며 그가 말했다.
「걱정하지 않게 잘 돌보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시다가 가시길.」
한국에서 올린 전통혼례는 성황리에 끝났다. 손님들은 한지에 감싸인 상자를 받고서 돌아갔다. 상자를 나눠주면서 직원들이 당부했다.
“꼭 4시간 이내로 드셔야 합니다.”
“주의하세요!”
“지나면 드시지 마세요!”
“거참, 뭐길래 그래?”
“열어 보시면 압니다.”
“먹으라는 걸 보니 간식 같은데. 디저트인가?”
“디저트라면 굳이 네시간이라는 시간제한이 없을 것 같은데 말이지!”
“궁금하네~.”
그것도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붉은색 상자를 받았고 어떤 이들은 녹색 상자를 받았다. 브라이언 신은 그중에서도 빨간색 상자를 받았다.
“녹색도 가져가고 싶은데 안 될까요?”
“브라이언 씨는 어디 보자. 붉은색이네요. 그리고 한 사람당 한 개씩 미리 준비된 선물이라서 더 드릴 수는 없어요. 죄송합니다.”
직원은 곤란해하며 여러 번 사과했다.
브라이언 신은 빨간 상자를 안고서 숙소로 돌아갔다. 야외 전통혼례를 올린 마당으로부터 숙소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길거리 음식도 서서 먹지 못하는 성격상 도저히 미리 풀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담하게 조성된 공원을 지나 벤치가 보이자마자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나무 의자에 앉은 브라이언은 바로 금빛 리본을 잡아당겨 풀었다. 조급한 마음으로 한지 포장을 벗기자 각진 상자가 나왔다.
“네 시간 전에 먹으라는 건, 빨리 먹으면 먹을수록 맛있다는 거겠지?”
고급스럽게 붉은색과 금색, 은색으로 장식된 상자였다. 해와 달이 금박과 은박으로 새겨진 상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공예작품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브라이언에게는 상자의 아름다움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상자를 벗기자 그 안에는 비닐지가 포장되어 있었고 “손대지 마시오!”라는 주의문이 쓰여있었다.
“대체 왜 이렇게 겹겹이 싸놓은 거야?”
조심스레 벗겨내자 두꺼운 비닐지 안쪽 투명한 비닐에 담긴 드라이아이스가 보였다. 공기에 노출된 드라이아이스가 기화되며 자그마한 안개가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는 성급하게 비닐째 드라이아이스를 곁의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비닐지까지 벗겨내자 그 안에는 아이스크림을 담을 법한 단단한 플라스틱 용기가 들어 있었다.
“뭔지 알겠다. 아이스크림인가 본데?”
기름종이를 벗기자 안에는 그가 처음 보는 음식이 들어있었다. 바싹하게 구워진 타르트지 위에, 얇게 썰어 돌돌 말려있는 붉은 고기가 보였다.
살짝 데쳐져 있는 것이 스테이크로 치면 레어 정도였다.
상자 가장 안쪽에는 요리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콜드 레어 스테이크… 타르트?”
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