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8화
페이스트리 월드컵 싱글 챔피언십.
작년까지 팀제 출전만을 허용하던 페이스트리 월드컵에서 최초로 1인 경쟁 부문을 신설했다.
대회 참가 규정을 읽어본 백진영이 말했다.
“혼자 출전하는 거야? 아니네. 보조를 데리고 출전할 수 있네.”
“응.”
“보조는 생각해둔 사람이 있어?”
“당연히 있지. 이번에 결혼식 때 케이크 먹어 보니까 실력이 많이 늘었더라.”
“오.”
백진영이 휘파람을 불었다.
“인정받아서 좋아하겠네.”
“옆에서 평가해줄 사람이 필요하긴 하니까.”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전화번호부를 검색하는 임진혁에게 진영이 물었다.
“그 제안을 전화로 하려고?”
“그래?”
“중요한 일이잖아. 만나서 하는 게 좋을 텐데.”
“그럼 명동점으로 바로 갈까.”
백진영이 팔짱을 끼었다.
“잠깐만. 강마리오 씨가 지금 명동점에 있나?”
“그럼 난 먼저 간다.”
진혁이 가게 문을 열고서 나서자 백진영이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
“아니, 잠깐만! 나도 같이 가자.”
“형은 아직 마무리 덜 끝났잖아?”
“전에는 기다려 줬잖아? 임진혁 결혼하더니 오히려 배려가 부족해졌는데?”
“아니…, 그래. 같이 가자.”
백진영은 테이크아웃 커피를 내렸다. 진혁을 위한 아인슈페너와 자신을 위한 아메리카노, 그리고 진혁의 보조가 될 그녀를 위해서 한 잔, 총 세 잔의 커피를 캐리어에 담았다.
막상 명동점에 도착했을 때 정작 그 ‘바른말을 해줄 사람’으로 간택된 이는 그리 기뻐하지 않았다.
“진희 누나! 나하고 같이 대회 나가자.”
주방에서 야근하고 있던 임진희가 눈꼬리를 추켜올렸다.
“너 여기를 왜 찾아왔어? 새신랑이 집에 일찍 들어가야지.”
“대회 나가자니까. 미국 대회야. 보조로 나와라.”
불친절한 설명에 진희가 눈을 가늘게 떴다.
“갑자기 무슨 대회 출전이야? 결혼식 때문에 자리 비운 거로는 부족해?”
임진희가 짜증을 내며 허리에 양손을 올려놓았다. 명동점 정리를 하고 내일을 위해서 반죽을 하고 있던 참이다. 최근 한정판 케이크 때문에 정신없이 일이 바빴다. 그렇지 않아도 일이 밀려 있는 와중에 임진혁의 결혼식 때문에 원치 않는 휴가를 내서 참석까지 해야 했다. 진혁이 결혼한 것은 좋은 일이고 축하해야 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혼식 휴가에 참석하는 동안 밀린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임진혁이 태평하게 말했다.
“너도 네 커리어를 살리기 위해 대회 나가고 싶다며. 이번에는 내 보조로 나가고, 다음에는 네가 직접 나가면 돼지.”
진희가 부들부들 떨었다.
“아니, 그거야 그렇지. 그런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있잖아. 펜로즈 삼각형 케이크도 잘 팔리고, 인턴도 이제 슬슬 사람 노릇 할 때 됐다고. 독립을 그냥 하냐? 내가 옆에서 봐줘야지. 새끼 토끼를 야생에 내동댕이치면 늑대에게 잡아먹힐 거 아니냐고.”
그녀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눈 밑에는 그늘이 짙었다. 임진혁이 진지하게 말했다.
“알아서 내보내면 잘 클 거야.”
“….”
“나도 아버지가 뭐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서 컸잖아.”
“너랑 다른 사람이랑, 같냐? 같아?“
분노에 가득 찬 울부짖음이 쩌렁쩌렁하게 가게를 울렸다.
“자기계발은 등 따시고 배부를 때 하는 거야! 난 지금 야근에 시달리는 직장인 1이라고! 차라리 병원에서 다시 일하고 싶어! 다음 타임 근무자 나타나면 인계하고 집에 갈 수나 있지. 지금 이건 내가 책임져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잖아!”
임진혁은 진희에게 요청해봤자 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았어, 알았어. 진정하라고.”
“진정 같은 소리 하네! 지금 이 일복이 누구 때문에 터진 건지는 알아?! 예술가와 함께 진행하는 콜라보레이션 한정 케이크도 좋고 다 좋아! 그런데 그걸 꼭 지금 시기에 바로 진행해야 했냐고! 이 정신 나간 놈아!”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덤벼 오는 진희에게 임진혁은 순순히 몸을 맡겼다.
“저번에 같이 대회 동영상 보면서 분석할 때 직접 출전하고 싶어 했잖아. 그래서 이번에 같이 나가자고 하면 좋아할 줄 알았지.”
진희는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으래애. 생각해 줘서 고맙네에에.”
전혀 고마워하는 것 같지 않은 표정이었다. 진혁은 힐끔 안쪽에 쌓여 있는 재료들을 살폈다. 꺼내 놓은 양과 지금 일하는 속도를 보니 대강 감이 잡혔다.
‘혼자서 하려면 밤 열두 시까지 일해야겠군.’
“일꾼을 많이 뽑아놓았는데 왜 혼자 일하고 있어?”
진희는 입을 삐쭉거리며 손을 씻었다. 다시 반죽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임진혁 역시 손을 씻었다. 앞치마를 걸치고 자연스럽게 다가가며 그가 물었다.
“많이 피곤하면 일하는 것 좀 도와줄까?”
백진영이 거들었다.
“여기 진희 씨 좋아하는 바닐라 카페 라떼도 있어요. 좀 마시면서 쉬세요.”
진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고마워요. 그런데 밤에 커피 마시면 못 자서요. 새벽에 일찍 일어나야 해서 마음만 받을게요.”
평소에는 배려심 깊은 그녀가 예민해져 있는 모습을 보고서 백진영은 뒤로 물러났다.
“그럼 남매 두 분이 이야기 나누시고, 저는 먼저 갑니다. 진혁아, 내일 봐!”
백진영은 뒷걸음질 치면서 인사하고 빠르게 사라졌다. 따라오겠다더니 혼자 도망간 진영을 보며 임진혁이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저 형은 대체 왜 온 거야?”
“커피 주려고 온 것 같은데. 일더미만 산더미같이 안겨주는 누구보다 백배는 더 낫지.”
“음음.”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도 진혁은 반죽을 서둘렀다. 진희가 꺼내둔 재료만을 보고서 뭔지 묻지 않고 바로 일을 시작했다.
“아니, 너 뭔지는 알고 하는 거야?”
“응. 쿠키 반죽이잖아?”
“….”
설명해주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하니 고맙긴 하지만 어쩐지 약이 오른다. 진희가 중얼거렸다.
“다음 주에 또 결혼식이잖아.”
“그렇지.”
“이번엔 다 같이 즐겁게 여행하고 왔잖아. 다른 애들은 남아서 가게 오픈하니까, 오늘까지 남으라고 하기 그렇더라.”
두 사람은 묵묵히 반죽을 계속했다. 진혁이 도우니 순식간에 끝났다. 진희는 일을 마치고 손을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고 스트레칭을 했다.
“덕분에 일찍 끝나긴 했네. 고마워.”
그녀는 고맙다고 말하면서도 입을 삐죽거렸다. 기분은 조금 나아진 것 같았지만 여전히 피곤해 보였다.
가족들에게 무공을 전수할 생각은 없지만, 기초 체력 정도는 도와줘야 하는 게 아닐까?
진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체력이 너무 약한 거 아니야? 다음 인턴 애들이랑 같이 운동 좀 하는 게 어때?”
“절-대 노. 노노노노노. 그럴 시간 없어.”
진혁이 짠 제과제빵 아카데미의 훈련 프로그램은 다른 제과제빵 학원과는 명확하게 다르다. 인간의 육체를 극한까지 몰아붙이고 빵을 굽게 시킨다. 그녀는 그 프로그램에 입소한 이들이 전부 소년원 출신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짰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인턴들이 얼마나 힘들게 육체를 단련하는지 알고 있던 진희는 바로 거절했다.
진혁은 마지막으로 미련을 갖고 물었다.
“웨딩 케이크나 행사용 케이크, 그리고 대회 준비 같은 것도 하고 싶다며? 그래서 이번에 웨딩 케이크도 만든 거잖아. 실력도 꽤 많이 늘었던데.”
그는 진희를 스쳐 지나가며 자연스럽게 팔꿈치를 서로 부딪쳤다. 육체적인 접촉을 통해 진기를 조금 보내주어 원기를 회복하게 하기 위해서다.
몸이 조금 좋아지면 반응이 달라질까 싶었는데 진희는 오히려 침착해져서 차분하게 말했다.
“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아. 이 시기에 어떻게 삼 개월이나 자리를 비우냐?”
그녀는 진혁이 서류 위에 연필로 휘갈겨 놓은 ‘연습 기간 3개월’이라는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어 주었다.
“너야말로 결혼하고 나서 부부 생활에 적응해야지, 이렇게 바깥에서 놀고 있으면 어떡해. 도대체 결혼은 왜 한 거야?”
“원래 조금 거리를 두면 더 좋대.”
“아, 다 헛소리야. 부부는 같이 있어야지. 아빠가 엄마 껌딱지같이 붙어 다니는 것 못 봤어? 그러니까 사이가 좋지. 오해가 생길 여지도 없고.”
“프랑스 가는 건 아빠 혼자 왔잖아.”
“그건 몇십 년 만에 혼자 움직이신 거고! 결혼하자마자 바로 미국 가서 제과제빵 수련을 하겠다는 게 어디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할 짓이야?”
진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서 같이 안 한다는 거지?”
“어! 너도 깊이 생각해봐라. 미미 씨가 과연 원하는지.”
“미미 씨도 좋아하던데.”
예상외의 말에 진희가 뜨악해했다.
“응? 그럴 리가.”
“개강하기 전에 드라마 촬영이 잡혀 있대. 일정을 오래 비워둬야 해서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내가 먼저 얘기해줘서 고맙다고 하더라. 한 비서가 알고서 미리 제안한 거냐고 칭찬도 했어.”
“그, 그래…. 그건 잘했네. 미미 씨도 엄청 빠른 나이에 결혼했으니까 자기 하고 싶은 건 다 해야지….”
“한족들은 빨리 결혼하는 편이래. 대학 다니면서 결혼하면 상점도 받고.”
“상점?”
“졸업할 때 10점이 필요하다고 하면, 학생이 결혼하는 경우에는 3점을 추가로 준다거나 하는 식이라고 하더라.”
“그래, 둘이 알아서 잘 해라….”
진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진짜 안 하면 다른 사람한테 보조해달라고 한다?”
“그래! 제발 그렇게 해! 난 괜찮아!”
“알았어.”
진희를 배웅하고 나서 임진혁은 강남에 새로 얻은 집으로 돌아왔다.
넓고 아무도 없는 집안은 휑했다. 그는 텅 빈 집안을 둘러보며 미묘한 기분이 되었다.
며칠 동안 옆에 바싹 붙어 있던 사람이 없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아무것도 경계할 필요가 없겠군.’
잠들어 있는 동안 눈치 보면서 화장실에서 운기조식을 할 필요도 없고, 항상 호신강기를 내리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는 해방된 기분으로 가부좌를 틀고 모처럼 제대로 된 자세로 운기를 시작했다.
소주천과 대주천을 거쳐, 노도와도 같은 진기가 강물처럼 도도하게 전신에 흘렀다.
상쾌하고 흥겹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남의 눈치도 보지 않고서 그는 원하는 만큼 마음껏 대주천을 시행했다.
막힌 코가 뻥 뚫리는 것처럼 시원하고 즐거웠다.
새벽이 되어갈 무렵, 그는 스마트폰으로 강마리오에게 화상통화를 걸었다.
-뚜륵.
마리오는 신호음이 한 번 울리자마자 바로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진혁이 네가 나한테 전화를 다 하고. 내가 바빠서 통화할 시간도 없지만 네 전화는 특별히 받았지. 이번에 맛본 결혼식 케이크가 맛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전화한 거지?”
마리오는 숨도 쉬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멋대로 늘어놓았다. 진혁은 대강 얼버무렸다.
“케이크 맛있더라.”
“그렇지! 맛있지! 나도 할 수 있다고. 형이 아이디어를 냈지만, 기술은 내가 다 했다. 흐흐.”
인정받은 것이 신났는지 영상통화 화면 속에서 마리오가 둠칫둠칫 어깨를 움직였다.
“월드 페이스트리 챔피언십, 보조해줄래?”
“어어어?”
마리오가 입을 벌렸다.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나도 그거 출전할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