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417화 (415/656)

제 417화

늦은 나이에 주위를 둘러보며 깨달은 것이 적지 않았다.

이 카페 안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만 같다.

결코, 기분 탓이 아닌 오행진의 효과였으나 그는 알지 못했다.

‘은퇴라.’

에드워드 해링턴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케이크에 포크를 가져갔다.

‘역시 큰놈보다는 작은놈이 좋겠어.’

이사회가 발칵 뒤집힐만한 안건을 생각하며 그는 초콜릿과 커피의 맛을 느꼈다.

구름처럼 사르륵 녹아내리는 달콤한 맛.

베이글과는 또 다른 쾌락에 저절로 전신의 긴장이 흐물흐물 풀려버린다.

‘은퇴하고 아예 이곳에 별장을 얻어서 조금 쉬는 것도 좋겠지.’

◈          ◈          ◈

일주일이 지났다.

6일간 미미와 함께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진혁은 해맑은 얼굴로 출근했다.

“여! 새신랑!”

“어서 와요, 형.”

“음? 여기 해링턴 클리닉의 이사장이 있네.”

“저 할아버지 여기 단골손님이야. 매일매일 와서 똑같은 빵만 먹고 있어.”

진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평범하게 콧대 높은 서양 노인네였는데.’

쿠프 드 몽드 파티쉐리에서 만났던 시몬 리옹이라는 심사위원도 그랬다.

세상을 살다 보면 종종 건방지고 무례한 사람들이 보인다. 특히 자신의 권위가 세계 최고라고 착각하며

확실하게 맛있는 빵을 내놓았다. 알아서 굽히고 사과해오는 결과를 바랐는데, 엉뚱하게 여기 와서 빵을 먹고 있다.

진혁은 오랜만에 오픈 키친에 서서 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해링턴이 와서 인사했다.

「임진혁 쉐프, 허니문을 다녀왔다며?」

「예.」

「결혼 축하하네.」

그는 따로 준비해왔는지 양주를 한 병 내밀기까지 했다. 이전에 보였던 거만한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방침상 따로 선물은 받고 있지 않습니다.」

결혼식 같은 특별한 행사라면 모를까, 가게에서 개인 팬들이 주는 선물은 원칙적으로 거절하고 있다.

「업무 때문에 바쁘실 텐데. 휴가를 오신 겁니까?」

「은퇴했다네.」

병원에서 일에 쫓기며 바쁜 스케줄에 휘말려 살아가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 고급 양복을 차려입고 중절모를 쓰고 있지만 느긋하고 여유 있어 보였다. 정말로 장기 휴가를 온 사람처럼 한가하게 여가를 즐기는 모습이다.

「그렇습니까.」

「이것도 다 자네 덕분이야.」

「…예?」

「바쁘게 한 방향만 보면서 달려가고 있었는데 자네 덕분에 인생에 일하는 것 외에 다른 즐거움들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네.」

테이블에 앉아 있던 머리가 희게 센 노부인이 걸어오더니 옆에 섰다. 기품있어 보이는 태도로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임진혁 쉐프. 워커 홀릭인 남편이 갑자기 은퇴한다고 해서 무슨 바람인가 했는데 말이에요. 아들도 진혁 쉐프 신세를 졌다고 들었어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녀는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진혁은 손을 쉬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에 처음 나오는 가게다. 다른 단골손님들 역시 다가와 축하의 말을 건넸다.

“진혁 씨, 결혼 축하해요.”

정지숙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초대를 받았으나 일정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단골손님 중의 한 명이었다.

“감사합니다.”

진혁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해링턴 부부는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나며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노부부는 행복한 표정으로 빵을 고르고, 포장해서 나갔다. 끝내 양주는 돌려받지 않고 테이블에 억지로 두고 갔다.

백진영이 감탄했다.

“뭐야, 임진혁. 뭘 한 거야. 미국 가서 저 사람을 은퇴하게 만든 거야?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진혁도 상황을 알 수 없었다.

“난 방금 왔잖아. 계속 여기에 있던 사람이 모르면 내가 어떻게 알아?”

백진영이 놀렸다.

“역시 진혁 쉐프님. 인생을 다시 돌이켜보게 만드는 마법의 빵.”

강운곰이 킥킥 웃었다.

“노인은 은퇴하게 하고 젊은이에게는 제빵사의 꿈을 접게 만듭니다, 임진혁 클라스.”

“뭐야, 너 제빵사 안 해?”

“난 할거지만. 당장 유일봉 선생님 속도만 봐도 못하겠다고 접고 나가는 애들이 보이니깐.”

“잘하는 사람을 보면 자극받아서 더 제대로 하고 싶어져야 하는 거 아니냐? 왜 좌절을 하지.”

임진혁이 어깨를 으쓱하자 백진영이 킥킥 웃었다.

“태산을 받치는 거목이라서 그런 거야.”

“하하하하.”

오랜만에 메인 페이스트리 쉐프가 다시 나오자 가게 앞에 줄줄이 줄이 늘어섰다.

이제는 나름 빵집 특화한 리뷰 겸 임진혁 쉐프의 팬 유튜버로 자리 잡은 도을이 역시 셀프 카메라를 켜고 찾아왔다.

“형! 신혼여행은 좋았어요?”

“응.”

“보통 유럽이나 동남아 같은 데로 많이 가잖아요. 그런데 여행을 위구르로 간 이유가 있어요?”

진혁이 피식 웃었다.

“돌아가신 어르신께서 미리 추천한 곳이야.”

“왜 저번에 비행기 테러 때문에 고생했잖아요? 치안이 좋지 않다고 들어서 걱정했죠.”

“좋지 않으면 좋게 만들면 되지.”

“그건 현지 사람들이 할 일이고 관광객이 할 일은 아닌데!”

“그렇긴 하지? 도을아, 이제 그만 가라. 형 일해야겠다.”

말이 길어지자 짧은 인터뷰처럼 되어버렸다. 뒤에 몰린 손님들을 보며 진혁이 손짓했다.

“으앗! 제가 배려가 없었네요. 기다려주신 손님 여러분, 죄송합니다! 제가 쿠키 하나씩 쏠게요!”

“오오~!”

“고마워요~!”

찡그린 표정으로 줄 서 있던 손님들이 얼굴을 활짝 폈다.

“역시 옥빵상제!”

도을이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줄 선 사람들의 쿠키 값을 계산했다.

“한 사람당 개수 제한 있어도 이건 괜찮죠? 내가 가져가는 게 아니니까?”

“엉.”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백진영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속삭였다.

“도을이 너 무리하는 거 아니냐? 우리 쿠키는 비싼데.”

“저 이거로 의외로 돈 좀 벌어요. 요즘은 빵집 리뷰말고 메추라기 키우기도 시작했거든요. 사람들이 메추라기 좋아해요.”

“오오.”

진혁은 손님들을 바라보았다. 앳되기만 하던 김도을의 얼굴에 면도하다 베었는지 작은 상처가 보였다. 전에는 수염 자국도 많지 않았는데 이제는 면도도 매일 하는 모양이다.

‘자식, 크긴 컸네.’

유튜브 쪽에서도 잘 나가는 모양인지, 손님 중에서 도을에게 다가가 팬이라며 악수를 부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게 영업하는 데 방해되면 안 되니까요!”

도을은 미안해하며 후다닥 자리를 떴다.

‘자식이 있으면 이런 느낌일까?’

햇살 경로당의 노인들을 보면 옛사람들이 떠올라 기분이 좋다.

하지만 이렇게 어린애들이 무럭무럭 자란 걸 보니 신기하다.

진혁이 돌아와서 그런지 그날따라 손님이 많았다.

평소보다 늦게 가게 문을 닫고서 직원들을 돌려보내고, 백진영이 진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야.”

“응?”

“고생했다. 이제 신혼집으로 돌아가겠네? 미미 씨는?”

“중국에 있지.”

“모처럼 결혼했는데 주말부부를 하는 거야?”

“응.”

“그럼 네가 주말마다 중국에 가는 거야?”

“아, 그건 아니고.”

백진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부부는 같이 살아야지.”

임진혁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는 방금 받은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이 느닷없이 튀어나온 <해와 달> 이천 지점 개업 계획서는…, 가영 씨 때문이구나?”

“아니, 설마 내가 그것 때문에 이천점을 개업하자고 하겠어? 주말마다 자주 내려가니까 그만큼 사업성이 보인다는 거지. 흠흠. 그러잖아도 프랜차이즈를 확장할 거라며? 꼭 서울에만 지점을 늘릴 필요 없잖아. 애초에 경기도 소망시에서 출발했던 가게고. 괜찮지 않아?”

“이천은 사람 진짜 없지 않나?”

“이천 무시하네. 소망시보다는 많거든?”

“거기는 우리 아버지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잖아. 애초에 십 년 넘게 단골 장사 하던 데서 키운 거지. 형이 이천 내려가면 정말 굴러온 돌이거든. 결혼 때문에 눈이 멀어서 사업성 없는 제안을 한 거면 바로 폐기한다.”

농담 반 진담 반 섞어서 건넨 말에 백진영이 발끈했다.

“그런 거면 내가 너한테 가져왔겠냐? 그렇게까지 말하면 섭섭하지. 형이 제대로 뽑아왔으니까 한번 읽어보기나 해.”

진혁이 종잇장을 넘기면서 말했다.

“내 말 한마디에 풀이 죽어서 바로 포기할만한 계획이면 읽어볼 필요도 없는데 말이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진혁은 꼼꼼히 사업 계획서를 살폈다.

평범한 테이크아웃 카페나 빵집은 아니었다.

김가영이 운영하는 도자기 공방과 영업한다는 점이 특이했다.

현지 손님들보다는 외지인들과 함께하며, 도자기 체험과 빵 만들기, 그리고 사탕 만들기 체험을 함께 한다는 점이 일반적인 빵집과는 완전히 궤가 달랐다.

진혁이 고개를 들었다.

“이건 굳이 우리 프랜차이즈로 나갈 이유가 없잖아?”

“우리 이번에 사탕도 팔기 시작한다며. 같이 묶어서 가면 안전하고 좋지.”

“으-음.”

“예비직원들 대상으로 운영하는 제과제빵 아카데미가 아니야. 아기 아빠랑 엄마들이 가족들 데리고 와서 방문하고 가는 쉼터가 될 거라고. 애들 지능 발달에도 도움 될걸?”

“유키코 씨 아이디어야?”

“응.”

“그리고 형은 아예 여기로 내려가게?”

해외로, 그리고 지방으로 점점 더 사업 반경이 넓어진다. 진혁은 여태까지와 다른 눈으로 백진영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간다.

“언제는 해외에 가고 싶다더니 지방으로 가게 됐네. 이거, 시기는 언제쯤으로 생각해?”

“우리가 내년 봄에 결혼할 거니까 그때쯤.”

“뭐야! 역시 사업보다 결혼이 먼저네.”

백진영이 웃으면서 진혁의 등을 툭 쳤다.

“네가 형보다 먼저 장가갔잖아. 나도 슬슬 가야 하지 않겠냐?”

“가영 씨가 선물한 백자 그릇들, 미미 씨가 마음에 들어 하더라. 아예 더 주문하고 싶다는 걸 내가 말렸어.”

“왜? 주문 들어오면 좋잖아.”

“개인이 일일이 굽는 건데 삼천 개 주문을 어떻게 받아. 결혼식에 왔던 손님들한테 접시랑 대접, 밥그릇과 국그릇까지 아예 열 개씩 세트를 주고 싶다고 하더라고.”

“…거절 잘 했다. 그렇지않아도 일 욕심이 있는데 그렇게 한꺼번에는 못 받지.”

백 개를 구우면 다섯 개, 여섯 개는 깨진다. 어르신은 항상 스무 개씩 굽는 것을 고집하셨다. 가마에도 크기가 있고 한꺼번에 갑자기 개수를 늘리면 언제 어디서 또 금이 가거나 깨질지 모른다. 가영을 만나면서 도자기 일에 대해서 조금씩 알게 된 백진영이 덧붙였다.

“어르신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신 모양이야. 병원 진료받도록 권유해도 거부하시고 계속 도자기 굽는 방법 가르치는 데만 매달리고 계신대.”

“정말 장인이시네.”

“그렇지, 뭐. 너 이건 뭔데?”

임진혁이 내놓은 대회 참가서를 보고 백진영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뭐야, 너 여기서 초청받았어? 그럼 여기에 나가는 거야?”

“월드 페이스트리 싱글 챔피언십. 당장 다음 주부터 대회 준비에 들어갈 거야.”

“아니, 잠깐만. 미미 씨하고 같이 여유 있게 신혼을 즐겨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이렇게 급해.”

“이전에는 팀으로 출전했잖아. 이 대회는 혼자 출전하는 게 가능하거든.”

“그 얘기가 아니잖아. 왜 이렇게 급하게….”

‘밤이 무서워서.’

진혁은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았다.

“지금 이대로 안주하면 실력이 더 퇴보할까 봐 그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