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416화 (414/656)

제 416화

임진혁의 결혼식에 참석한 <해와 달> 직원 일동들은 다음날 바로 선편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본점 오픈을 위해 새벽부터 셔터를 올리고 있던 백진영은 낯선 손님이 말을 걸어 깜짝 놀랐다.

「여기 혹시 쑥 베이글을 파는가?」

헝클어진 머리에 제멋대로 돋아난 수염 때문에 부랑자처럼 보이기도 하는 백인 남자였다.

백진영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손님! 죄송합니다. 영업은 오전 10시부터 합니다.」

「며칠을 기다렸으니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어.」

「….」

가게 영업 준비를 하는 동안 문 앞에서 얼쩡거리는 모습을 보니 행동은 부랑자 같았다. 좋은 옷을 입었지만, 며칠을 입었는지 옷이 살짝 구겨져 있다. 거기에 손질되지 않은 머리와 수염까지 더하니 행색이 추레해 더 보인다.

길거리에서 며칠을 산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이제 막 노숙 생활을 시작한 노숙자 레벨 1이라면 이렇게 보일지도 모른다.

‘아니 여기가 미국도 아니고 백인 노숙자가 있을 리가 없는데.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왜 저러고 있담.’

“사흘 동안 쉬었을 뿐인데 빵 예약이 왜 이렇게 밀려 있지?”

인턴 교육과 본점 제과제빵사를 겸하고 있는 유일봉이 투덜거렸다. 진영이 물었다.

“예약 오는 대로 다 받은 건 아니지?”

“당연하죠. 가게에서 판매할 분은 제하고 받았는데, 그래도 생각보다 꽤 있네요. 이럴 때 진혁이 형은 한 번 슉! 하면 슈르르르륵! 하고 빵이 만들어질 텐데. 난 너무 손이 느려서.”

“하하. 일봉 쉐프가 손이 느리다고 불평하면 다른 페이스트리 쉐프들은 울겠는데? 두 배 이상은 빠른 편이라고 생각해.”

“그거야 그렇죠. 하지만 제 목표는 그냥저냥 빠른 편이 아니라, 진혁이 형하고 비슷할 정도로 빠른 속도니까.”

“과연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일까?”

“형도 인간이니까 저도 언젠가 할 수 있겠죠. 으! 이놈의 형은 한국 결혼식에만 초대해도 되는 걸 굳이 양측에 다 초대해서. 지금 열흘 있다가 또 결혼식 참석하러 소망시 내려가야 하는 거 실환가….”

유일봉이 땅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백진영이 킥킥 웃었다.

“당연히 참석해야지. 유급휴가잖아.”

“그나마 그날은 전 직원 참여는 아니라 다행이에요. 가게는 문 열 수 있고.”

“일봉 씨는 참석 안 하게?”

“아니, 솔직히 이번에 가서 보고 너무 좋긴 좋았는데. 괜히 미란 씨 눈만 높아진 거 아닌지.”

“음.”

백진영이 에스프레소 머신의 버튼을 눌렀다. 진한 커피 향기가 향긋하게 가게 안에 풍겨 나왔다.

“오늘의 아메리카노, 테이스팅 해 볼래?”

“네! 좋죠!”

커피를 받아든 일봉이 홀짝홀짝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크, 역시 진영이 형 커피는 세계 최고라니까. 국가가 인정한 마약이야.”

유일봉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두 사람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커피를 나누어 마셨다.

창밖을 보고서 진영이 혀를 찼다.

“저 손님이 아직도 안 가고 바깥에서 얼쩡거리고 있네. 아까 쑥 베이글이 어쩌고 하던데.”

“한정판 쑥 베이글이요? 그러고 보니 무슨 의학협회 같은 데서 쑥 베이글을 다량 주문하고 싶다고 연락 오긴 했었는데. 재료 수급상 전일 주문도 곤란하고 뭣보다 우리가 결혼식 간다고 가게 문을 닫아서 못한다고 했죠, 뭐.”

“설마 저 손님이랑 상관있겠어?”

“농장에서 쑥은 365일 매번 연한 싹만 재배해야 해서 곤란하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상시 메뉴로 올렸을 텐데 말이지.”

연하고 부드러운 봄 쑥은 누구나 좋아하지만, 키가 쑥쑥 자라 있는 여름 쑥에선 쓴맛이 강하게 난다.

“그냥 연하게 자라자마자 바로바로 뽑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게 싫대. 뭔가 수익이 안 좋다나?”

“흐으음.”

한방 약재용으로는 쓸 수 있지만 빵 재료용으로는 좋지 않은 재질이라며 뭐라 뭐라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더랬다.

“안 그래도 밥 앤더슨 작가와 콜라보레이션 한정판 빵 판매를 하니까, 굳이 꼭 쑥 베이글을 유지해야 할 필요도 없고요.”

삑삑삑 오븐 소리가 울렸다.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던 일봉이 황급히 마저 컵을 들이켰다.

“아차, 빵 꺼내야겠다.”

“나도.”

곧 다른 직원들이 출근하면서 몰려 들어왔다.

“예-이! 복귀 신고합니다!”

“어서 와라.”

“이틀 동안 럭셔리하고 엘레강스한 생활을 즐기다가 일상으로 돌아오니 참 현실이 현실 같군요….”

“너만 그런 줄 알아? 나도 그래.”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영업 준비를 시작했고 바깥에 있는 손님은 완전히 잊혀졌다.

오전 10시경, 그 손님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쑥 베이글 하나, 오리지널 베이글 하나. 그리고…, 이건 뭐지?」

「쑥 베이글은 오늘까지만 판매하는데 잘 맞춰서 오셨네요. 이건 21세기의 화가 밥 앤더슨 작가님과 콜라보레이션한 펜로즈 초콜릿 커피 미니 케이크랍니다.」

마침 옆에서 음료를 내리고 있던 백진영이 능숙하게 대응했다.

「…! 그럼 이것과 이것도 주시오.」

「펜로즈 쿠키는 다음 주부터 한정 판매합니다. 이번 주에는 초콜릿 커피 미니 케이크만 판매하고요. 음료수가 필요하십니까?」

「됐소.」

펜로즈 초콜릿 커피 미니 케이크와 쑥 베이글을 받은 에드워드 해링턴은 천천히 탁자로 걸어갔다.

스마트폰이 대차게 울렸다.

큰아들의 메시지였다.

[아버지! 비행기를 연기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꼭 참석하셔야 하는 회의가 있는데요!]

“못난 놈. 네 나이가 쉰인데 아비 없어도 그 정도는 할 줄 알아야지.”

큰아들의 메시지에 응답하지 않고 에드워드는 조용히 앉아 빵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감회가 새로웠다.

비행기를 사흘 연기하고, 학회를 취소하고, 회의를 미루고, 대리 진료를 부탁했다.

여태까지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일들이었다.

나무가 뿌리내리듯 굳건한 자신의 위치에서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던 남자는 처음으로 일탈을 했다.

‘그 빵이 왜 그렇게 뇌리를 맑게 했는지 알아야 해.’

하지만 펜로즈 초콜릿 커피 미니 케이크를 주문한 것은 단순히 그 이유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는 미니 케이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맛있어 보여서 시킨 게 아니야.」

어디까지나 쑥 베이글과 비교하기 위해서 주문한 것이다. 그는 케이크를 외면하고 쑥 베이글을 손에 집어 들었다.

해링턴 클리닉 내에 위치한 윌리엄이 아무리 다양한 베이글을 내놓아도 전에 맛본 그 느낌이 나지 않았다.

드디어 그 모든 수수께끼가 풀릴 것이다.

「음…!」

겉면은 살짝 바삭하면서 안쪽은 쫀득쫀득하게 이와 혀에 달라 붙어온다. 쫄깃하면서도 촉촉한 맛에 저절로 전신이 활력이 치솟는다. 말초부터 뇌 신경계까지 직통으로 전류가 흐르듯, 찌릿한 쾌감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몰아쳤다.

맛있고 그리고 맛있다.

건포도나 아몬드, 피스타치오 따위의 견과류가 없이 담백하고 구수하며 쫄깃하다.

‘조금 부족한 느낌이다.’

이전에 진혁이라던 페이스트리 쉐프가 직접 만든 것과는

한입 물었을 뿐인데 어느샌가 쑥 베이글이 통째로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진료해야 할 환자의 과거 병력, 이사회에서 새로 결정할 안건, 뇌신경과학회에서 발표할 논문.

그 모든 것들이 전부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사라졌다.

‘상쾌해.’

며칠간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했다는 불쾌감 역시 사라졌다. 그저 눈앞에 있는 이 빵, 그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맛있는 빵 한 조각과 따스한 햇볕.

쑥이 들어가 있지 않은 오리지널 베이글도 비슷한 맛이 났다.

‘동양의 신비로운 약초와 상관없이 그냥 맛있는 건가.’

그는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있던 다양한 효능이 있다던 약초 ‘쑥’에 대한 연구를 치워 버렸다.

그저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세상에 오직 그와 빵 한 조각만이 존재한다.

얼마 남지 않은 삶에 굳이 욕심내며 아등바등하니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그러고 보면 아내가 몇 번인가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하자는 이야기를 했었지.’

아직 65세, 한창 일할 나이다.

종종 무릎이나 어깨가 쑤시기도 하지만 진통제를 먹고 푹 자면 나아진다.

손이 떨리기 시작해 십여 년 전부터 직접 메스는 잡지는 못했지만, 연구자이자 감독으로서 훌륭히 그 역할을 다해왔다.

훌륭한 신사로, 아들이자 아버지로, 그리고 남편이자 이사장이며 의사로 평생 책임을 다하며 살았다.

「으으음.」

그는 오리지널 베이글을 집어 들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놀랍게도 이 베이글도 맛있었다! 쑥이 들어가지 않은 베이글 역시 전신에 활력을 준다.

‘그러니까 쑥 때문이 아니야.’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며 쫄깃하다. 저절로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오는 맛이다.

동양의 신비한 약초 때문이 아니었다.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던 자신의 육체가 마치 한창때로 돌아온 듯싶다. 수영장에서 수면에 부유하듯 온몸이 가볍다.

이렇게 온몸이 편하고 마음이 가벼웠던 적이 언젠지 모르겠다.

진정한 신사는 음식이 맛있건 맛있지 않건 차별하지 않고 건강에 좋은 음식을 고루 들어야 하는 법이다. 신사답게 살아와야 한다 생각해 65년간 이런 맛을 모르고 살았다.

그러나 왜 그렇게 살아야 했을까?

베이글이든 블루베리든, 그것을 먹거나 먹지 않는 것으로 누군가를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을.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삶을 낭비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완고함으로 가득 찬 외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걸었어도 좋았을 것이다.

‘그래도 오길 잘했다.’

이 빵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태평양을 건너왔다.

명상과도 같은 차분한 마음 상태에 도달한 그를 방해하는 알람이 있었다.

스마트폰이 여전히 띠롱 띠롱 울렸다. 귀하게 키워 병원을 물려주려고 했던 첫째 아들놈이다. 이건 어떻게 하나요 저건 어떻게 하나요 하고 계속해서 울부짖는다.

「쯧, 아들을 잘못 키웠어.」

그는 스마트폰의 울림을 무시하고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단 한 조각 남았다.

베이글 두 개를 먹어 배가 불렀지만, 이 케이크를 먹지 않을 수는 없다.

밥 앤더슨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케이크는 각도를 돌려 보자 완벽하게 그 그림처럼 보였다.

먹기 아까운 모양이었다.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서 케이크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이런 건 기념 촬영해야지.’

자그마한 미니 조각이라면 소장하고 싶을 정도로 우아한 생김새였다.

먹기에는 아까운 예술 작품이다.

‘음, 사진이 비뚤게 나왔군.’

그는 다시 한 번 스마트폰 셔터를 눌렀다. 추수감사절 식사 자리에서 음식에 카메라를 들이대던 작은 아들을 야단쳤던 기억이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이래서 사진을 찍으려고 했던 건가.’

아들은 모두의 식사 시간을 방해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 순간을 기록에 남겨 오래오래 두고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뒤늦은 깨달음에 그는 한탄했다.

‘아들이 우리의 식사를 소중히 여겨 나중에도 돌이켜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몰랐구나.’

그의 뒤에 따라 들어왔던 손님들 역시 저마다 자신의 케이크에 스마트폰 렌즈를 들이댔다. 오히려 자신의 빵을 사진 찍지 않는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심지어 카메라를 보며 케이크를 들고서 동영상으로 뭐라 뭐라 조잘거리며 남기는 동양인 소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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