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5화
진희가 와하하 웃었다.
“야, 임진혁! 아무리 이 많은 결혼 축하 선물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답이 안 선다고 해도 선물해 준 사람들이 전부 죽기를 바라는 건 너무 뜬금없는 거 아니냐?”
임진혁은 진희의 말을 무시하고 미미에게 물었다.
“미미 씨. 어떻게 할 겁니까?”
“음.”
미미는 생각에 잠겼다.
“일단은 이번에 결혼식 하면서 받은 그림을 전시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 명작을 우리만 보기에는 아까우니까. 그리고 밥 앤더슨 씨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신 것 같던데, 배려를 받아들이신다면 메이요 클리닉에서 최고의 진료를 받으실 수 있도록 안내를 해드릴까 싶어요.”
“새아기가 마음이 참 착해.”
“이번에 축의금을 지진에 기부하겠다고 한 진혁 씨만큼 할까요.”
‘축의금’의 정체를 알게 된 임진혁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생각보다 너무 많다.’
기껏해야 2-3천만 원 정도 수준을 생각했는데, 지금 여기에 있는 건물들만 해도 이미 몇십 억대다.
“그때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현물이 아닌 현금만 기부할 거니까요. 이 정도면 충분할 거예요.”
따로 쌓아놓은 한화와 위안화, 수표를 보며 미미가 말했다. 임운정과 장은효가 동시에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심 건물이 아까우셨던 모양이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홍빠오 전부를 분류하고 정리하는데 시간이 꽤 걸려, 자정이 지나고 말았다.
진혁이 말했다.
“그럼 정리는 여기까지인가요?”
“둘만 있고 싶어서 조급해하기는.”
“그럼 나이 든 사람들은 먼저 갈게.”
“진희 너도 어서 나와라.”
부모님이 먼저 자리를 뜨고 진희가 머뭇거리며 그 자리에 남았다. 그녀가 말했다.
“미미 씨, 우리 진혁이 조금 눈치가 없을 때도 있고 세상 물정 모르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는데. 그래도 마음씨는 착한 애예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언니.”
미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손수 만들어 주신 캐러멜 치즈 케이크는 정말로 맛있었답니다. 해와 달 중국 지점에 정식 메뉴로 올리고 싶은데, 괜찮으세요? 아버님께서 만드신 초콜릿 마스카포네 치즈 케이크도 마찬가지고요. 미처 말씀드리는 것을 잊었네요.”
진희가 기쁨에 가득 차 외쳤다.
“당연하죠!”
“계약서는 비서에게 전해 따로 보내 드릴게요.”
진희는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들뜬 발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마침내 진혁과 미미 단둘만 남았다.
‘아.’
진혁은 자신이 아버지나 진희에게 케이크를 만들어주어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고마워요.”
“뭘요.”
미미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진혁 씨가 생각하고 계셨던 걸 제가 대신 표현한 것뿐인걸요.”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어째서인지 죽은 일월신교의 전 교주 생각이 났다.
앞으로 자신의 삶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내가 결혼을 왜 했지?’
갑자기 의문과 혼란이 자리 잡았다. 눈앞에 있는 여성이 아주 낯설게 느껴졌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며 케이크를 맛있게 먹던 모습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진혁은 미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진혁과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침실로 향하는 방문을 열며 미미가 활짝 웃었다.
“제가 먼저 씻을게요.”
그녀는 경대에 가서 섰다. 그리고 올림머리에서 진주 핀을 하나씩 하나씩 뽑아내기 시작했다. 전통대로라면 진혁이 내려주어야 했을 올림머리다. 당당하게 머리를 내리는 그 모습이 눈부시다. 찰랑거리는 긴 머리는 우아하게 등까지 흘러내렸다.
진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손끝에 와 닿아 감기는 머리카락이 부드럽고 매끈거렸다. 귤처럼 싱그러운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미미가 경대 옆에 놓여 있던 캔버스를 집어 들었다.
“미스터 밥이 그린 그림이요. 너무나 아름답지 않아요?”
언뜻 보면 단순히 검은 선 몇 개를 슥슥 그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서 보면 미소 짓고 있는 미미와 긴장해 있는 진혁의 표정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나란히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서는 두 사람, 그리고 손뼉 치는 가족들.
솔직하고 담백한 스케치는 밥 앤더슨이 여태까지 그려왔던 복잡하고 치밀한 그림과 아예 궤가 달랐다.
미미가 행복한 듯이 웃었다.
“이건 우리 아이들에게 가보로 물려줘야겠어요.”
아이.
그것은 진혁이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였다.
‘… 결혼하면 애를 갖지.’
진혁의 부모님 역시 그렇게 진혁과 진희를 낳았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갖는 경우도 있고 결혼하고 나서도 아이를 갖지 않기도 한다.
결혼 전 사전 계약 서류에는 두 사람의 친자녀가 우선으로 상속권을 갖는다는 언급 외에는 없었다.
미미 역시 사전 합의가 없었던 만큼 당연히 결혼 생활에서 자녀를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반면 진혁은 과연 자신이 아이를 원하는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겠고, 어떤 것을 기대해야 할지도 모른다.
“앞으로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은데요.”
“천천히 같이 나누면 되지요.”
그녀가 침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섰다.
“그럼 제가 먼저 씻을게요.”
진혁은 눈을 깜빡였다. 초야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는 희열도 기대감도 없이 침착하게 침대에 앉아 기다렸다.
‘보통 순서대로 씻는 건가? 그럼 난 옷을 벗고 기다려야 하나?’
전에는 이런 고민 따위를 하지 않았다. 껍질 벗겨진 사과처럼 헐벗은 여인들이 침실에 숨어있다 튀어나오면 적당히 기절시켜서 돌려보냈다. 혼례식을 올린 것은 물론이며 두 사람이 나란히 침실에 들어온 것도 처음이다.
욕실에서 샤워기가 틀어져 물이 쏟아져 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이 흐르는 소리에 긴장해서 빠르게 뛰는 미미의 심장 박동 역시 섞여 있다.
진혁은 겉에 걸치고 있던 청삼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펼쳐 침대 옆의 커튼을 잡았다. 망사처럼 아른아른하게 속이 비쳐 보이는 커튼은 부드럽게 손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는 단순히 커튼을 당겨 닫을 생각이었는데 나비 날개처럼 가볍고 나풀거리는 커튼은 쭉 찢어져 버렸다.
“….”
물소리에 가려서 찢어지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진혁은 갈라진 커튼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육체를 손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제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커튼이 이 정도의 힘으로 찢어질 줄은 몰랐다.
‘미미 씨의 육체 강도는 어떻지?’
정파의 무인들이 비슷비슷한 무인 가문과 혼사를 맺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초야 역시 그 중의 하나다. 흥분한 무림 고수에게 있어 단련하지 않은 인간의 육체는 밀가루 반죽처럼 약하기 그지없다.
터진 밀가루 반죽은 다시 주무르면 되지만 망가진 육체를 수복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명문정파의 후계자들은 어느 정도 무공을 익힌 여인을 원한다.
‘광안마 이 자식…, 이걸 노렸냐.’
어찌 보면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다 갔다.
무공이 최고인 줄만 아는 근육 뇌들 사이에서 자기만이 사람이라고 우기던 놈이다. 사람은 무공 없이도 살 수 있지만, 머리가 나쁘면 굶어 죽는다고 주장했다.
물론 일월신교의 절정고수들 사이에서 그 주장은 웃기지도 않는 농담으로 치부되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죽어라 노력해 무공을 익혔고 자신만의 무공-천안투마공-을 개발하기까지 했다.
‘야, 임마. 그래도 나한테 소개를 할 거면 무공을 좀 익혀도 괜찮지 않았냐? 손녀딸의 안위가 걱정되지 않던?’
진혁은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는 자신의 육체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었다.
현경의 위치에 도달한 절정 고수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생사경을 초월한 그는 자신의 육체만이 아니라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조차 자신의 의지로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그 증거로 바로 어제 태풍의 방향조차 바꾸지 않았는가.
하지만 대련이 아닌 색사(色事)를 위해서 육체를 조절해보려는 시도를 해본 적은 없었다.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가부좌를 하였다.
운기를 하며 음경해면체의 미세 정맥에도 충분한 양의 진기를 보냈다. 평소와 미묘하게 다른 길로 흘러간 충분한 양의 진기는 목표 장소에 혈액순환이 증진되는 결과에 도달했다. 적절한 양의 혈액에 해면체에 가득 차자 음경이 발기하여 속옷이 팽팽해졌다. 원하는 결과를 얻은 진혁은 다시 해면체 내부의 미세한 정맥혈관에서 혈액이 흘러나가 전신으로 돌아가도록 조정했다.
속옷이 다시 헐렁해졌다.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감고 가부좌하고 있는 가운데 속옷만이 텐트를 쳤다가 다시 가라앉고 다시 한 번 솟아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수월한데.’
생식기라 하더라도 손가락과 다르지 않아,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다. 식은 죽 먹기였다.
강호의 색마(色魔)들이 알았다면 전수해달라고 울부짖을만한 기술이다.
‘이건 옥경고하공이라고 부르면 되겠군.’
광안마의 천안투마공은 눈과 시신경에 집중하여 눈의 가능성을 최대까지 끌어내는 무공이다. 반면에 이 무공은 현대생리학을 통해 음경해면체의 구조와 원리를 파악한 진혁이 극히 미미한 양의 진기를 최적의 위치에 보냄으로써 성립한다. 많은 양의 내공은 필요하지 않지만 최소한의 혈액을 원하는 부위로 보내며 혈관을 터트리지 않을 수 있는 세심한 조절력이 필요하다.
무공의 고하(高下)와 색사의 능숙함은 기본적으로 관계가 없다. 무공을 잘 하는 이는 육체가 건강하여 병약한 이보다는 나을 것이나, 체력이 좋다는 것이지 기술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진혁이 새로 개발한 이 옥경고하공(玉莖高下功)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발기나 사정을 조정할 수 있다.
‘잘 되는데.’
이 정도라면 굳이 연습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속옷은 팽팽하게 당겨졌다가 다시 느슨해지고 다시 팽창하는 것을 반복하는 상태다.
새로운 무공을 창조하고 운기조식에 집중하니 마음이 평화로워지며 차분해졌다.
빵을 굽는 것도 즐겁지만 무공을 연구하는 것도 신난다. 진혁은 방금 창시한 무공의 묘리를 이해하기 위해 교감신경계(交感神經系)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 음부신경이 척추신경에 신호를 주면, 심부건 반사의 결과 망울해면체근이 수축한다. 해면체근이 수축하면 두 번째 수축부터 요도에서 정액이 분출한다.
이번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지극히 차분한 태도로 진혁은 자신의 육체를 관조했다.
의도하지 않게 속옷이 젖었으나 자신의 의지대로 원하는 양의 정액을 내보내거나 내보내지 않거나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거 재밌네.’
진혁은 저절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때 욕실 문이 열렸다.
욕실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민 미미가 진혁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다리 사이로 가 있는 것을 느낀 임진혁이 당황했다.
“아.”
“급하시면 먼저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미미는 조금 어색한 태도로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건 그런 게 아닙니다.”
“천천히 씻고 나오세요.”
◈ ◈ ◈
사소한 오해는 금방 풀렸고, 밤은 짧고도 길었다.
진혁은 한 마리 햄스터처럼 연약한 이가 자신을 완전히 신뢰해 그 몸을 기대온다는 사실이 신기하고도 놀라웠다.
‘한 번은 팔을 부러뜨릴 뻔했다.’
자신의 무공이 충분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는데, 한 곳을 조절하는 동안 상대방이 다른 데를 자극하는 경우의 수를 고려하지 못했다.
“벌써 깼어요?”
이불 속에 몸을 감추고 있던 미미가 눈을 뜨며 말을 걸었다. 그녀는 나른하고 행복해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진혁이 생각했다.
‘밤이 두렵다.’
자칫하면 새신부를 죽거나 다치게 할까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