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4화
씨앗은 평생 동안 새싹인 상태로 머물러있을 수 없다.
봄이 지나 여름이 오면 가지를 뻗어내고 줄기를 튼튼히 하다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가을이 되면 마른 잎을 떨구고 마침내 생명을 다하면 비로소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바로 섭리다.
‘그래서 그랬냐.’
황태명은 너무나 빨리 가 버렸다.
자신이 제안하는 모든 것을 거절하고 그대로 가버리는 것을 선택했다.
분명히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이 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저 떠나는 것을 골랐다.
천금같이 귀히 여기는 손녀딸을 진혁에게 맡긴다고 선언하며 훌훌 떠나갔다.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으로 새로이 무공을 수련하며 장생을 추구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반인으로서 평범하게 죽는 것을 선택했다. 계속해서 무공의 극한을 추구하고 있는 진혁과는 정반대의 길이다.
어찌 보면 더 용감한 길이다.
진혁은 황태명과 달랐다. 운기조식은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빵을 만드는 와중에는 다음 단계의 벽을 어떻게 하면 넘을 수 있을지 고민을 계속했다.
그 고민은 점점 더 변해갔다.
어떤 빵을 구우면 맛있을까 하는 고민이 길어졌다.
홀로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는 무공수련보다, 모두가 즐거워하는 빵 굽기를 더 즐기게 되었다.
무공을 수련하는 것이 빵을 굽는 것과 같고, 빵을 굽는 것 역시 무공을 수련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무공을 수련하는 것은 삶을 살아내는 것과 같으며 삶을 사는 것은 빵을 굽는 것과 같다.
“!”
도사들은 육체를 버림으로써 비로소 무공을 완성하여 승천한다고들 한다.
진혁은 그따위는 무공의 완성이 아니라고 믿었다.
도 닦는 도사 놈들이야 육체를 버리고 뭐가 있을지 모르는 다른 세상-심지어 없을지도 모르는-으로 가는 것이 도의 끝판왕으로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아는 상식 내에서 무공이린 심기체의 조화다.
마음과 몸 그리고 기.
내공과 외공 그리고 마음을 조화롭게 갖추어야 비로소 대공을 이룰진대 그 무슨 헛소린가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도사 놈들의 헛소리에도 한 가닥 정도 진리의 실마리가 숨어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버려야 해.’
그는 유형의 초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 자유자재로 검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손으로 반죽하지 않고 허공섭물을 이용해 반죽하면서 빵 전체에 글루텐을 고루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했다.
기운을 다스려 빵을 만들며 진리의 일부를 엿본 것이다.
전혀 다른 것 같은 깨달음은 서로 닮아있었다.
예전에 겪었던 잔혹한 사건들에 대한 미련을 담아 살인 사건 현장을 재현한 과자 집을 만들며 흥미를 느꼈다.
그때 이미 더 이상 과거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다만 자신의 느낌일 뿐이었다.
정말로 이전에 있었던 일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 일을 외면하지 않았어야 했다. 진혁은 아직 과거를 초월하지 못했다.
무림에서 겪었던 일들 모두가 덩굴처럼 그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새로이 맺은 인연의 사슬은 뿌리부터 그를 칭칭 감아 그를 현재에 묶었다.
단순히 결혼식이라는 의례 자체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있는 모두, 그와 함께 같은 시간을 살아가며 점차 나이가 들고 함께 늙어갈 것이다.
‘광안마, 너는 죽기 전에 이제 광안마가 아니라고 했지.’
그는 광안마가 아니지만, 광안마이기도 하다. 과거는 현재를 만들고 현재는 미래를 만든다.
그 깨달음은 척수를 관통하듯 한순간에 내려와, 진혁은 그만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자신이 도산검림이 아니라고 부정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는 도산검림이자 임진혁이며, 고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는 존재다.
그 모든 것이 전부 하나로 통한다.
진혁은 하객석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진희의 시선을 느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존재를 감지했다.
그리고 미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젊고 아름다우며 건강했으나 철저한 민간인이었다.
말 한마디면 산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권력자들과 친밀할 뿐이다.
미미가 삼촌이라 부르며 얼마나 친근한지 과시하는 그 행동 한 번 한 번마다 다른 사람들이 서로 눈알을 굴리며 관심을 보였다.
한 성의 유력자만이 아니라 다른 성들의 유력자들이 만날 일 없는 장소에서 만나 서로 정보를 교환했다.
그녀가 아버지를 제치고 할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 순조롭게 경영해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어렸을 때부터 쌓아두었다가 물려받은 강력한 배경이 있었다.
황태명은 미미에게 무공을 아예 전수하지 않았다. 대신 현대 사회에 맞는 기술을 익혔고, 돈보다 사람을 우선하여 인맥을 물려주었다.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우군인 진혁 자신이 미미의 곁에 머무르도록 안배했다.
‘얍삽한 놈.’
진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들 농사가 실패한 것을 빼면 참 잘 살다 갔다.
미미는 진혁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술을 참 잘 마시네요.”
“음.”
아무리 많이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진혁에게 술 내기를 하자고 덤벼든 남자들 모두 테이블 저 너머로 스러져, 직원의 부축을 받아 침실로 사라졌다.
저녁까지 이어진 식사와 술자리는 달이 뜰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왕 삼촌하고 대련 삼촌은 주당으로 이름 높은데, 자신 있는 술 내기에서 져서 억울해하고 계세요.”
미미가 조잘거리며 진혁을 방으로 안내했다. 신혼부부의 초야를 위해 마련된 침실에는 거대한 거실이 딸려 있었다. 미미는 거실의 창가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바구니를 들어 보였다.
“이제….”
“이제?”
그녀가 마지막으로 갈아입은 옷은 어깨와 등이 트여있는 시스루 형식의 개량 치파오였다. 허벅지에 길게 슬릿이 파인 채 발목까지 오는 긴 치맛자락이 날씬한 발목을 강조한다. 임진혁은 갑자기 강렬하게 미미를 의식했다.
침실로 향하는 문은 닫혀 있지만, 진혁은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여덟 명이 똑바로 누울 수도 있을 것 같은 넓디넓은 침대가 신경 쓰였다. 신혼부부를 축복하기 위한 붉은 비단 침구가 화려하게 깔려 있다.
그는 앞으로 한 걸음 발걸음을 옮겼다.
“들어가도 되냐?”
아버지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진혁은 미간을 좁혔다.
‘뭐지?’
결혼식은 철저하게 중국의 풍습을 따라갔다. 진혁의 한국 친척들보다 미미가 초청한 중국의 큰손님들을 더 신경 썼기도 하고, 한국식 결혼을 따로 할 예정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건물 리모델링이 완성되는 다음 주에 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들어오세요!”
미미가 대신 대답했다. 아버지만이 아니라 진희와 어머니까지 따라 들어왔다. 어머니가 걱정스레 물었다.
“부부 두 사람이 시간을 보내야지, 우리가 도움이 되겠어?”
진희 역시 한마디 거들었다.
“비서님에게 부탁하는 게 맞지 않나?”
“홍빠오를 정리하는 건 원래 가족들이 하는 거예요. 언니, 어머님, 그리고 아버님. 여기 앉으세요.”
다섯 사람은 머리를 모으고 붉은 봉투를 열기 시작했다.
“여기 언니가 열어 주세요.”
진희는 봉투를 하나씩 열어서 옆으로 넘겼고, 아버지가 그 품목명을 불러 주었다. 어머니는 진희가 넘긴 물건을 받아 상자에 정리하였다.
미미는 노트북 컴퓨터를 열어 선물 목록을 입력하였다.
진혁은 멀뚱거리며 봉투를 보았다. 멀리 한국에서 초청한 손님들이 넣은 축의금은 대개 10만 원, 30만 원 단위의 현금이었다. 노인복지수당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할머니들이 넣은 십여만 원을 보며 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한국에서 하는 결혼식에도 초청하려고 했는데 괜히 부담되시겠는데요.”
아버지 역시 근심스러운 표정이었다. 반면에 미미의 지인들이 홍빠오에 넣은 것은 현금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상하이에 있는 아파트?”
미미의 명의로 변경되어 있는 120평짜리 고급 아파트 맨션의 소유권 증서였다. 고가의 건물은 한두 채가 아니었다.
“여기 이건 제주도 별장인데.”
“아버지 여기 놀러 오셔서 낚시하셔도 되겠어요. 바닷가 근처네요.”
봉투를 뜯던 진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건물이 한두 개가 아니네. 반포 자이 아파트도 있어. 이건 도곡동 타워팰리스?”
이름만 들어 본 고가의 부동산 물권 증서가 한두 장이 아니었다. 세심한 배려로 예상 증여세까지 수표로 함께 들어 있었다. 한글로 된 부동산소유권 증명서를 손에 쥔 진희가 당장이라도 침을 흘릴 듯이 물었다.
“야, 나 집 한 채만 줄 생각 없냐?”
미미가 싱긋 웃었다.
“저희 별장으로 쓸 테니 언니도 와서 쓰세요.”
어머니는 진희의 등짝을 후려쳤다.
“어딜 탐낼 게 없어서 오빠 결혼선물을 탐내니.”
진희는 억울한 듯이 항의했다.
“아니, 아니. 당연히 농담이지. 설마 제가 진심으로 그렇게 얘기했겠어요? 그냥 다주택자는 세금 많이 내니까 내 명의로 하나쯤 옮겨 놓으면 내가 그 정도 세금은 낼 수 있다는 거지.”
미미가 웃었다.
“그래서 홍빠오 정리는 꼭 가족들끼리만 하는 거예요.”
“진짜 눈 돌아가겠네.”
중국 선적의 요트부터 시작해서 온갖 건물들까지 선물 내역이 아주 화려했다. 어머니가 턱을 괴고서 말했다.
“미미 씨가 이만큼 해줬으니까 받는 거지?”
“호호호.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뿌리신 만큼 제가 받는 거지요.”
“그래, 진혁이 너도 잘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잘 갚아야지. 이게 다 선물이지만 빚인 셈이니.”
진혁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극히 건강하며 행복해 보이는 가족들을 한 번씩 다시 바라보았다.
임진희는 20대 후반이지만 황미미와 다르지 않은 나이로 보였다.
부모님 역시 60대 초반이지만 40대에 가까워 보이는 젊은 나이로 보인다.
그의 부모는 장성한 아들을 두었으나 젊고 아름답다며 부러움 섞인 칭찬을 받고 있었다. 당장 몇 년 동안은 그 찬사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20년, 30년 후에도 여전히 그 모습이라면 어떨까.
어머니와 아버지, 진희는 지금 이대로의 모습일 테지만 주변 사람들은 변할 것이다.
결혼식장에 들어서며 장례식을 떠올리는 비관주의자처럼 진혁은 미래를 선연하게 보았다.
‘스스로 무공을 수련해 얻은 것이 아닌, 금강불괴와도 같은 건강하고 강한 육체. 마음과 몸의 조화가 흐트러질 수밖에 없어.
그 육체는 머지않아 정신을 병들게 할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점차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익은 벼처럼 시들어가 마침내 땅에 묻히는 동안 홀로 장생하여 살아있는 것은 결코 축복이 아니다.
강건한 정신력을 갖추지 못한 이들에게 불로는 오히려 저주에 가깝다.
그러한 사실 역시 마땅히 미리 내다보아야 했을 것인데 당장 눈앞에서 부모가 아파한다는 사실에 시야가 좁아져 멋대로 타인의 육체를 바꿔놓아 버렸다.
그나마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타인의 기를 받아들여 진행된 환골탈태라 다행이다.
그가 사랑하고 아끼는 평범한 가족들은 안타깝게도 무공을 극한까지 익히며 얻었어야 할 정신적인 강함을 갖고 있지 않았다.
강함이란 나무 열매처럼 남이 대신 얻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강해지려면 필연적으로 쇠가 담금질 되는 것처럼 자신을 깎고 다듬어야 한다.
그 과정을 견디며 강해지는 이들도 있으나 끝내 버티지 못하고 망가지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렇기에 진혁은 가족들이 강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고통을 겪게 하기보다 그저 보호하고 어루만지며 감싸주고만 싶었다.
어렸을 적의 임진혁에게 가족들이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듯이 말이다.
’하지만 어렸을 때 나는 완전히 망나니였어…, 무림 세계에 다녀오지 않았더라면 변화하지 못했을 거야.‘
자신에게 있어 그 고통 어린 시간들이 필요했다고 인정하는 데에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진혁이 말했다.
“지금 우리에게 이런 고가의 선물을 주는 당의 높은 사람들이라고 해도 50년 후에는 아무도 살아있지 않겠지.”
느닷없는 그 말에 아버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임마, 그때는 나도 죽고 없지.”
“갑자기 50년 후는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