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3화
저절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루이스 강은 사실 임진혁의 실력이 조금은 퇴보하였을 수도 있다고 추측했다. 매일같이 제과주방을 떠나지 않고 연습하던 때와 달리 지금은 CEO로 해외 출장이니 뭐니, 결혼식 준비니 해서 연습할 시간이 부족할 것이 분명했다.
“대회가 끝나고 그렇게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당연히 형 실력도 전보다는 훨씬 좋아졌겠지.”
미미에게 크럼블 치즈 케이크를 하나 건네준 진혁은 자기 것도 하나 꺼내서 그대로 입에 물었다.
“아니, 난 그동안 나름대로 바빴는데… 그리고 난 내 인생의 대부분을 얼음 조각을 하면서 보냈거든? 케이크가 아니고?”
루이스는 갑자기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미미와 진혁은 아무 말 없이 케이크를 오물거렸다. 진혁은 자신의 레시피를 기반으로 개량한 케이크가 마음에 들었다.
‘크럼블에도 치즈를 넣어서 치즈 향을 조금 더 강하게 했군. 크림치즈는 우리가 쓰던 게 아닌 다른 걸 가져온 것 같고. 유럽 브랜드인가? 우리도 이 치즈로 바꿔도 좋겠는데. 그리고 시트도 촉촉해.’
미미가 입을 열었다.
“부드러운 치즈 향이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깔려 있어요. 크럼블이 바삭바삭하게 부서지면서 녹진녹진하고 농후한 치즈가 혀 위에서 녹아내리네요. 시트가 조금 눅눅해진 감이 있지만 아주 맛있는 케이크였어요. 만들어 주셔서 고마워요, 루이스 강 쉐프님.”
아직 미미는 즉석에서 이런 대사를 한국어로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은 아니다. 즉 이 케이크를 미리 하나쯤 빼돌려서 먹어본 후 감상을 준비한 것이다. 진혁은 어쩐지 웃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가 진혁을 다시 응시했다.
“물론 진혁 씨가 만드신 게 제 입맛에는 제일 잘 맞지만요!”
루이스가 맞장구쳤다.
“그건 저도 그런데요.”
도을이 끼어들었다.
“저도요.”
재희가 맞장구쳤다. 케이크 커팅을 한다더니 둘이서만 케이크를 나누어 먹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하객들 모두가 술렁거렸다.
“진혁 총각이 만든 케이크가 아주 맛있지.”
금천복이 당당하게 선언했다.
“다른 빵집에 가면 그런 맛이 안 나.”
감호철과 이을순, 정갑녀 역시 저마다 떠들기 시작했다.
진혁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여기에 모인 녹색 농부 조합원들 역시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내 돼지고기를 그렇게 맛있는 샌드위치로 만들어주는 건 진혁 고문 이사님밖에 없다고.”
녹색 농부 조합의 까망돼지 농장주 박정돈에 이어 강화 장군감 농장의 조감경이 말했다.
“내 감을 가져가서 타르트로 만들었을 때부터 진혁 고문 이사님이 큰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을 했어.”
박정돈은 아쉬워하며 말했다.
“진작 내 딸을 소개했어야 하는 건데 늦었지 뭐야.”
“허허! 사람 인연이란 원래 어쩔 수 없는 거지. 내 아들도 솔로인데 어떤가?”
“예끼! 자네 아들은 한 번 갔다 왔잖은가. 내 딸은 미미 씨하고 동갑이야. 진혁 쉐프님이 좋다고 팬클럽에도 가입했다지 뭔가.”
“허허허.”
<해와 달>의 직원들 역시 왁자지껄하게 떠들었다.
“빵만 맛있게 만드는 게 아니고 인성도 완벽한 우리 임진혁 CEO님.”
“그런데 원래 케이크 커팅하고 나면 우리도 먹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나도 아까부터 저 케이크 먹고 싶었는데.”
“맞아, 맞아. 회사에서 파는 걸 어레인지한 버전이라고 들었는데.”
일봉의 모친은 서미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얼굴에 예비 며느리를 향한 호감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저 녀석도 이제 금방 결혼하나?’
시청의 직원이자 햇살 경로당과의 연계도 맡고 있는 서미란이다. 당연히 햇살 경로당의 노인분들과 함께 어울리도록 좌석을 배정했는데 언제 저리로 갔는지 연인인 유일봉과 그 부모님이랑 함께 앉아 있었다.
진혁은 아무 생각 없이 지인들을 나름대로 초대했을 뿐인데 자연스럽게 어른들을 뵙는 자리가 된 것이다.
일봉은 케이크를 보지 않고 미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진혁이 형처럼 이렇게 크게 결혼식을 올리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케이크는 직접 만들 수 있는데….”
“하으하하하하.”
미란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일봉의 어머니가 아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아들. 설마 지금 그걸 청혼이라고 한 건 아니지?”
“다, 당연히 아니죠!”
일봉이 쩔쩔매며 대답했다.
그 옆 테이블에서 백정흠과 김가영은 마주 보고 앉아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우리 조카를 만나본 지 오래됐나?”
“오래는 아니고요.”
“아가씨 나이가 몇 살인가.”
“호호호호호. 아가씨라니요.”
“호칭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네. 얘도 나이가 있는데 진지하게 만나는 거겠지?”
신랑 들러리라 자리를 비웠던 백진영이 허둥지둥 삼촌과 연인 사이에 끼어들었다. 김가영은 백진영의 검지를 붙잡고 잡아당겼다.
“아니, 오빠 도대체 어디가 있었어?”
“음료수 만들고 있었어….”
신부 들러리들은 뒤늦게 통역을 데려와, 신혼부부가 사라진 사이에 진영에게 음료를 부탁했던 것이다.
김가영은 미간을 좁히며 한순간 진영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받은 질문을 백진영에게 토스했다.
“진영 오빠는 어때? 날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거야?”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질문에 백진영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어? 어어어?”
백정흠은 가영에게 이것저것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가영은 미소 지으며 철벽 방어하고 있었다. 사회적 지위에 주눅 들지 않고 할 말 다 하는 모습이, 예전에 처음 봤을 때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무형문화재의 수제자로 들어가 자기 그릇을 구워내는 능력자다. 공무원 입시에 계속해서 실패하던 때의 그녀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영 씨도 나도 많이 변했지.’
김가영은 특별히 백정흠에게 ‘잘 보일’ 생각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초면에 무례하게 캐묻는 태도에 적당적당히 대답하며 음식과 파티를 즐겼다.
“삼촌, 가영 씨하고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저를 걱정하시는 건 고맙지만 그렇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어?”
삼촌에게서 완전히 독립해 자신만의 성공을 일군 백진영 역시 더 이상 백정흠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저를 아끼신다면 가영 씨도 아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허, 참.”
백정흠이 불쾌한 신음을 냈다.
“오늘 여기는 좋은 자리잖아요. 가영이가 인사드리러 온 자리도 아니고.”
폭죽을 터트리려고 숨어 있던 아버지는 언제 저리로 갔는지, 백정흠과 백진영 사이에 끼어들어 중재를 했다.
“아들이 이렇게 번듯하게 결혼하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 정흠이 자네도 아들을 결혼시키면서 좋았지?”
‘아니, 중재가 아닌가?’
아들 자랑을 하느라 신난 임운정의 이야기를 듣고서 백정흠도 씩 웃었다.
“이거 내가 그때 찾아가서 진혁이를 서울로 불러오지 않았으면 어디 이만큼 성공했겠어? 나도 진혁이를 키우는 데 일조했다고.”
“그야 그렇지! 동생이 신경 많이 썼지. 그리고 아들놈이 자네 생명을 구하느라 자기 목숨을 걸고 공사 현장에서 뛰어들기도 했고 말이야.”
“그러게. 운정 형이 아들을 참으로 잘 키웠어. 능력도 좋고 잘 생겼지, 그리고 무엇보다 의리가 있잖아. 내 아들이 진혁이 반만 해도 소원이 없겠어. 회사를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있는 데서 나눠 먹기만 급급하니.”
정흠이 한숨을 쉬자 임운정이 위로했다.
“그래도 조카를 잘 키웠잖아. 진혁이하고 같이 세운 회사가 이렇게 확장하고 미국과 중국에도 지점이 있는데 말이야. 저번에는 아시아 커피 대회에서 상도 탔다며.”
“어디 진영이가 키웠나? 진혁이가 키웠지. 그리고 진영이는 틀렸어. 지금은 여자 만난다고 늙어서 머리 벗겨지는 삼촌 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말이야.”
백진영은 삼촌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가영의 손목을 잡고서 그 자리를 떠났다.
계속 있어 봤자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두 사람이 사랑의 도피를 하는 연인처럼 식당을 벗어나 어딘가로 사라졌다.
‘즐거워 보이네.’
아기를 안고 있는 유키코와 그 남편 역시 드물고 희한한 음식을 맛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유키코는 게살 수프를 한술 떠서 맛본 후 조금씩 아기의 입안에 넣어 주었다. 빨간 모자를 쓴 아기는 행복한 표정으로 조그만 입술을 오물거리며 게살 수프를 먹었다.
“이게 게살 수프야. 그리고 이건 게맛살.”
“자, 이건 파인애플.”
다양한 음식을 하나씩 맛보여 주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나중에 임진혁 쉐프님처럼 훌륭한 페이스트리 쉐프가 되려면 너도 어렸을 때부터 미각을 단련해야지.”
‘… 엄청난 야망인데.’
진혁은 다른 집안의 가정 교육에 참견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그 옆 테이블을 보았다.
그가 멘토링을 해 주었던 김춘배와 이남희 부부가 긴장한 표정으로 디저트인 타르트를 맛보고 있었다.
거제도에서 여기까지 가게를 접고 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반드시 참석하겠다며 고집을 부렸던 부부다.
진혁은 그들을 그다지 대단치 않게 여기어 심령을 조종해 제멋대로 움직이게끔 하기도 했다.
“이것 봐, 여기 블루베리 타르트는 임진혁 사부님이 전수해 준 레시피하고 완전히 똑같은 방법으로 만든 게 틀림없다니까.”
“그런데 블루베리가 맛이 다르잖아요. 씁쓸하고 대신 치즈를 진하고 달콤한 걸 썼는데.”
“아예 다른 종류의 블루베리를 쓴 게 아닐까?”
블루베리에 블랙베리를 일부 섞어 넣어 단맛을 강화시킨 타르트를 맛보면서도 미각이 둔한지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부부였다.
그래도 엉망진창이던 첫인상과 달리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바로 옆 테이블에는 <해와 달>의 1기 인턴들이 자기들끼리 모여 있었다. 강운곰과 멸치, 너구리는 한쪽 구석에서 우걱우걱 먹는 데 열중하느라 바빴다.
“이것 봐. 이게 초미니 랍스터래.”
“도대체 어떻게 먹는 거야?”
“내가 이빨로 부숴 줄게.”
분명히 랍스터 접시 옆에 랍스터를 절단하기 위한 가위와 고정용 집게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음식을 접해본 적이 없는 이들은 그냥 랍스터만 달랑 가져왔다. 그것도 욕심이 넘쳐서 한 접시 가득히 담아왔는데 껍질이 단단하고 어떻게 열어야 할지 몰라 낑낑대고 있다.
“야! 어디서 이빨 같은 소리. 이거 여기 관절 꺾으면 돼. 이 형님의 관절기를 보여주마.”
사투 끝에 다리를 부수고 비어져 나온 흰 살을 맛본 너구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게 맛이랑 되게 비슷한데 뭔가 미묘하게 닭가슴살 같아. 뻑뻑한 게살이라고 해야 하나.”
멸치는 뾰족한 랍스터의 집게발 끝에 손가락을 찔려 제 손가락을 쪽쪽 빨고 있었다. 이미 제 몫의 랍스터를 해치운 강운곰이 두 사람에게 으스댔다.
“진짜 <해와 달>에 입사 안 했으면 어쩔뻔했냐. 이게 다 내 덕분이지.”
“임진혁 쉐프님 덕분이지 이게 왜 강운곰 네 덕분이야. 네 결혼식이냐?”
“난 지금 내 인생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중이니까 말 걸지 마.”
“줘 봐, 이 형님이 깨 줄게.”
“아, 더러워! 입 갖다 대지 마!”
“열어 준다니깐.”
그들도 나름대로 즐거워 보였다.
소년원에서 갓 나와 풀 죽어 있었던 소년들은 이제 훌륭한 꼬마 제빵사로 거듭났다.
‘모두 변했어.’
진혁은 이들을 모두 둘러보았다.
그는 자신이 혼자라고 생각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회 참석을 모두 거절했다.
옛 친구라고 주장하는 놈들이 집에 찾아와도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대학교에서 만났던 사람들 역시 따로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일반인 나부랭이 따위는 필요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홀로 수련하며 빵을 만들었다.
다만 마음속에 가득한 미련이었던 ‘가족’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 밖의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