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1화
한국과는 달리 중국식 결혼식에서는 신랑과 신부가 서로 손을 맞잡고 앞으로 걸어간다.
명망 있는 웃어른에게 주례를 부탁하지도 않는다. 신랑이나 신부가 친구에게 사회를 봐 달라고 하는 경우는 있다. 이번에 사회를 본 사람은 미미와 함께 <천마>에서 연기했던 배우였다.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합니다」
사회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진혁은 천천히 걸어갔다. 드레스 자락 때문인지 미미가 대단히 느리게 걷고 있어 그 걸음에 맞추었다.
「제가 진혁 씨만큼 빠르게 걸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붉은 주단이 깔려 있는 길을 느릿느릿 걷던 미미가 문득 중얼거렸다.
「음?」
「진혁 씨는 이렇게 느리게 걷지 않잖아요, 지금은 제 속도에 맞춰 주고 계시고.」
「그렇죠?」
「케이크 자를 때도 엄청나게 빠르고.」
뜬금없는 소리에 진혁이 피식 웃어버렸다.
「뭐어.」
「하긴 속도가 뭐가 중요하겠어요. 누가 곁에 있는지가 중요하지.」
미미가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사뿐사뿐 걷는 발걸음은 나비가 날아가는 것처럼 가볍다. 진혁은 시선 아래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머리에 꽂은 보석 핀이 휘황찬란하게 빛난다. 목에 건 루비 목걸이는 조금 전에 부모님이 선물한 물건이다. 본디 아무것도 걸고 있지 않던 목에 직접 걸었다. 배려심 섞인 제스처다.
옥처럼 고운 피부에 가느다란 눈썹, 앵두처럼 붉은 입술.
시중에서 흔히들 사용하는 표현이지만 미미에게는 진실로 잘 어울렸다.
하객들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부가 연예인이라더니 진짜 이쁘네.”
“곱긴 곱다야.”
하지만 미미의 외모에 익숙한 진혁은 조금 다른 감성으로 그녀를 보았다.
‘신부 화장이 두껍긴 두껍네.’
나이가 어리니 평소에는 화장을 그리 많이 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두께로 크림을 바르고 그 위에 다양한 종류의 가루를 얇디얇게 발랐다. 하지만 오늘은 무대분장처럼 두껍게 한 것이 아예 그 두께가 달랐다.
‘분만 해도 열 종류를 바른 것 같은데.’
생각해 보니 어머니도, 진희도 마찬가지였다. 눈꼬리를 길게 빼고 뺨을 붉게 칠했을 뿐인데 아주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탁자를 하나하나 지나면서 아는 이들을 하나씩 지나쳤다.
금천복 할매가 열렬하게 손뼉 치는 모습이 보였다. 옆에서 홀쭉이 감 어르신이 흐뭇한 미소를 띠고 느리게 양손을 부딪쳤다.
반면에 홍 어르신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신기한 음식들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옆에서 이을순 할매가 그러는 홍 씨 노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오른쪽 구석에는 화가가 있었다.
밥 앤더슨은 한쪽 구석에서 빈 캔버스를 펼쳐놓고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전에 그렸던 인물화와는 달리 유화가 아니었다. 오른손으로 목탄을 짚고서 결혼 장면을 스케치했는데, 그 선 하나하나에 힘이 실려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밥 앤더슨만을 촬영하는 카메라맨이 세 명이었다. 미미가 미스터 밥의 허가를 받아 붙여 놓은 사람들이다.
왼쪽 테이블에는 신부의 손님들이 저마다 중국어로 빠르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고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고 있는 사람 역시 꽤 많았다.
진혁은 앞만 보고 걸어 나갔다. 두 사람이 사회자 앞에 마주 보면서 서로 웃었다. 사회자가 말했다.
「그럼 맹세의 입맞춤을 하겠습니다.」
미미는 자신 있게 입술을 내밀었다.
본래 달콤할 리가 없는 인간의 입술을 다디달게 만들어주는 재료들을 아낌없이 쓴 수제 립 제품을 발랐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오늘을 위해 따로 만들어 준 것으로 사향과 로얄젤리 등 달콤하고 먹을 수 있는 재료란 재료는 전부 들어갔다고 했다.
진혁이 입을 맞추면서 속삭였다.
「이건 맛있네요.」
노골적인 말에 미미가 씩 웃었다.
「하.」
‘연이에게 보너스를 줘야겠어.’
평소 욕망을 거의 드러내지 않던 연인이 거침없이 사용한 표현에 미미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머릿속에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인센티브를 얼마나 줘야 할지와, 첫날밤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 그리고 흥분이 교차해 스쳐 지나갔다.
「마카다미아 오일과 사향, 그리고 로얄젤리라. 단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먹기 좋겠어요. 쿠키로 만들면 딱 좋을 것 같은데.」
미미는 고운 손으로 진혁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하객들에게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오른손이 진혁의 허리를 아주 조금, 쿠우우우욱 찔렀다.
「아니, 지금 날 보고 지금 쿠키 생각이 나요?」
◈ ◈ ◈
맹세의 키스를 마치고 두 사람은 다른 방으로 안내되었다. 미미가 말했다.
「옷 갈아입고 앞으로 다시 나와주세요.」
「음.」
진혁은 준비되어 있던 장포를 보았다. 이것은 드라마에 등장했던 도산검림의 의복이 아니었다.
검은색 바지와 붉은색 저고리, 해와 달을 금사로 수놓은 모양이다. 소수민족의 의복이 화려하게 발전된 형태로 일월신교의 혼례복이 바로 이런 모양이었다. 진혁은 죽은 자의 빈자리를 느끼고 쓴웃음을 지었다.
‘또 너냐?’
광안마는 죽은 지 오래지만, 그의 그림자가 이곳저곳에 느껴졌다. 팔에 와 닿는 낯익은 감촉만 해도 그렇다. 최근에 주로 쓰는 폴리에스테르 나일론 혼방사가 아닌, 전통 방식으로 물레를 이용해 짰을 실크 원단이다. 진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걸 누가 신경 쓰냐. 이런 사소한 디테일에서 집요하고 치밀하며 음험한 성격이 드러나는 거라고.’
대답할 이가 없기에 소리 내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옷을 마저 갈아입고 진혁은 탈의실을 나섰다.
복도로 나오자 미미가 그 앞에 서 있었다. 금색 저고리와 몸에 달라붙는 형태의 금색 치마에도 은사로 일월의 자수가 놓여 있다.
미미는 작은 방으로 진혁을 안내했다.
「여기에요.」
창문이 동그랗게 뚫린 조그마한 선실에는 아무 가구도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바닥에 깔려있는 카펫 위, 사기그릇 위에 맑은 물이 찰랑하게 담겨 있을 뿐이다.
창문을 통해서 뜨겁게 정오의 햇볕이 내리쬐어 그대로 물에 내리꽂혔다. 수면을 거친 빛은 그대로 굴절되어 그릇 바닥 고요히 가라앉았다.
천지신명 아래, 햇빛에 맹세하는 두 사람만의 약속.
허례허식 없이 일월신교의 방식 그대로 진행하는 결혼식이다.
감동이 벅차올라 진혁의 메마른 마음속을 적셨다.
「…이건.」
미미가 해맑게 웃었다.
「이런 건 처음 보시지요?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워낙 시골 사람이라 거기서는 결혼식을 할 때 하는 방식이 특별히 따로 있대요. 꼭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전에 말씀하셨어서.」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미미가 덧붙였다.
「이제 이 앞에 앉아서 우리를 이제까지 길러주시고 아껴주신 친척과 가족 어르신에 대해서 잠깐만 이야기하면 된다고 해요.」
일월신교의 혼례 의식에 그런 방식 따위는 없다. 교주이자 제사장으로 무공을 비롯하여 모든 제례에 정통한 진혁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하하하.」
미미는 그 웃음을 전혀 엉뚱하게 받아들였다.
「보시기에 우습거나 사이비 종교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저희 집안의 전통이에요. 미리 말씀드리지 않은 건 죄송하지만,」
「아니, 아닙니다.」
진혁이 웃으며 정정했다. 미미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럼요?」
「돌아가신 어르신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그분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어요.」
황태명은 아기 때부터 천재라고 이름이 높았단다. 세 살에 논어를 읽고 다섯 살에 시경을 줄줄 읊었다고 한다. 위인전을 듣는 것처럼 포장된 신화에 진혁이 킥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다 외우고 있었던 걸 현대사회에 남아있는 책과 다른 부분만 확인하고 다시 외운 척했겠네.’
할아버지가 자기를 얼마나 아껴주셨는지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진혁은 감회에 젖었다.
‘적이라면 어린아이라도 가차 없이 목 자르던 그놈이 이렇게 사람이 다 되다니….’
현대 한국에서 자라던 자신이 과거 무림 세상에 왔을 때 컬쳐 쇼크를 느끼며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처럼, 광안마 역시 현대에서 고생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눈치 빠르고 머리 좋은 녀석은 이쪽 세계에서 중시하는 가치를 금방 파악하고 그에 맞춰서 연기하면서 살아온 듯싶었다.
‘그래, 그놈이 평생 평범하게 살다가 죽었다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지.’
그가 죽기 전, 임진혁은 몇 번이고 물었다.
질환을 치료하고 현대에서 살아있고 싶지 않은지.
그는 하나뿐인 부하이자 과거로부터 돌아온 인연을 잃고 싶지 않았다.
실험적이지만 분명히 그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를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자신은 이 생에 이루고 싶은 것을 다 이루었다며, 미련이 없단다.
하늘의 섭리가 허용한다면 다시 한 번 태어나서 진혁을 찾아와 보필하겠다는 헛소리를 했다.
진혁이 상념을 끊고 말했다.
「다음에 어르신 묘소를 같이 찾아뵙죠.」
「네.」
미미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화장이 조금 번진 것을 본 진혁이 손을 뻗었다.
「누르지 말고 눈 감아요.」
「네.」
가장 바깥쪽에 있던 다섯 겹의 분가루들이 물기에 젖어서 뭉쳐가고 있었다. 진혁은 세심한 손길로 미미한 분가루 입자들을 물로부터 분리해냈다.
화장용 분가루들이 저마다 제 자리를 찾아가 진혁이 아까 보았던 대로 얼굴 위에 내려앉았다.
‘박력분 가루 조합하는 거랑 비슷하네.’
반죽할 필요가 없고 크기가 조금 더 작다는 것을 제외하면 언제나 해오던 일이다.
진혁은 미미와 함께 방문을 나섰다.
「아가씨, 이제 손님들에게 인사하셔야지요!」
「홍빠오도 다시 걷구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미소지었다. 미미가 속삭이며 물었다.
「나 화장 번지지 않았어? 괜찮아?」
「번지기는요, 완전히 멀쩡한데요?」
진혁이 웃으며 미미와 팔짱을 끼었다. 아직도 입술에 남아 있는 로열젤리 향이 달았다.
「이제 인사하러 갑시다.」
「네!」
◈ ◈ ◈
한국의 손님들은 한껏 멋을 부리고 새 옷을 입고 앉아있었는데, 중국의 손님들은 셔츠에 청바지 등 편안한 의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누가 어느 나라에서 온 손님인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이분은 당에서 오신 분입니다.」
비서의 조언에 따라 그들은 중국의 권력자들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동네 아저씨처럼 푸근하게 미소짓고 있는 그들이 각각 어떤 지위를 누리고 있는지 비서가 뒤에서 속삭여 주었다.
「왕 씨 삼촌, 안녕하세요!」
「우리 미미가 벌써 결혼하다니. 신랑은 어서 술 한 잔 받게나.」
「예.」
갓 결혼한 새신랑은 인사를 하면서 탁자마다 한 잔씩 술을 받는 게 예법이라 했다. 진혁이 술을 받아 마실 때마다 남자들은 호쾌하게 웃으며 붉은색 봉투를 건네주었다.
「우리 미미를 잘 부탁한다고!」
「예.」
두툼한 홍빠오는 미미가 받아서 비서에게 넘겨 주었다. 비서는 그 홍빠오들을 받아서 커다란 가방에 담았다. 초대한 손님만 300여 테이블이 넘는다.
진혁이 중국의 귀한 손님들 탁자를 돌면서 술을 마시는 동안, 셀카봉을 써서 그 광경을 줌인하여 촬영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형은 어떻게 안 어울리는 옷이 없어요? 무슨 진짜 무협 드라마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잘 어울리네.”
김도을은 지금 이 현황을 실황 중계하고 있었다. <진바라기>의 팬들에게만 공개된 비공개 방송이다. 쉴 새 없이 댓글 창에 댓글이 올라갔다.
촬영 보조 진행자 격으로 따라온 이재희가 깔깔대며 웃었다.
“신문지를 입혀 놔도 어울릴걸. 원래 얼굴이 끝이야.”
“그렇게 칭찬하셔도 이미 늦었습니다. 진혁이 형은 품절남이야.”
“제가 너무 늦게 태어난 탓이지요.”
“아하하하!”
채팅 댓글에 올라오던 단어를 캐치한 도을이 말했다.
“아, 웨딩 케이크요? 이번 웨딩 케이크는 진혁이 형이 만든 게 아니에요. 디저트 서바이벌 쇼하고 국제대회에 같이 나갔던 루이스 강 쉐프님이 만드셨대요. 그 옆에 있는 작은 케이크는 진혁 쉐프님의 아버지하고 쌍둥이 남매분께서 만들어 주셨다고 하네요.”
카메라 렌즈가 웨딩 케이크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