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8화
“본인 맞는데.”
“와, 임진혁 능력 미쳤네. 결혼 준비하기 싫어서 미국에 출장하는 척 그냥 놀러 간 줄 알았는데 이런 사람을 섭외해 온 거야?”
진희가 턱을 괴고서 말했다.
“웨딩 케이크는 어디에 주문했어?”
“그건 미미 씨가 알아서 하고 있는데.”
“임진혁, 진짜 아는 게 하나도 없냐.”
“난 내 일만 하기에도 바빠.”
“그래도 어느 정도는 준비해야지! 다 만든 밥에 숟가락만 얻을 놈일세.”
“내가 선박법을 알아, 아니면 중국 비자 발급 방법을 알아? 그런 건 맡겨야지.”
“진혁이 말도 맞네.”
어머니가 편을 들어주자 진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그런 건 전문가들이 해결할 수 있지. 그런데 웨딩 케이크를 누가 하는지도 모른다는 건 직무 유기라고. 네가 알아봐서 소개해 주는 게 제일 좋잖아.”
진혁은 임진희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사심이 담겨 있는 얼굴이다.
“너. 직접 웨딩 케이크 만들고 싶냐?”
“아직 안 정해졌으면.”
“웨딩 케이크 한 번도 안 만들어봤잖아. 왜 남의 결혼식을 웨딩 케이크 데뷔 무대로 만들려고 해?”
“선량한 마음으로 무료 봉사하려는 핏줄의 마음을 폄하하지 마시지. 이래 봬도 잠을 줄여가며 치열하게 연습했다네.”
그는 진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가 지금 시점에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진혁이 눈동자를 굴리는 동안 어머니가 물었다.
“진희 너는 웰빙하고 트렌디한 빵을 만든다며?”
“건강한 빵이라는 유행이 언제까지나 계속될지 모르잖아. 웰빙 빵 자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야 언제나 있겠지만. 이것도 금방 지나가 버릴지도 몰라. 그러니까 예쁘고 우아한 행사용 케이크 만드는 것도 해 보고 싶거든.”
어머니가 웃었다.
“그냥 솔직하게 진혁이한테 뭔가 선물을 해 주고 싶다고 이야기하면 되잖아. 뭘 그렇게 빙 돌려서 이야기하니?”
“아니, 엄마. 내가 쟤한테 뭘 해 주고 싶어 한다는 거야. 그냥 이 기회에 내 멋진 웨딩케이크를 선보이려고 하는 거지. 유키코 쉐프님도 도와준다고 했고, 연습도 엄청 많이 했어.”
진희가 언제 준비해왔는지 스마트폰 앨범을 열어 보여주었다. 멀쩡해 보이는 웨딩 케이크 사진이 눈에 띄었다. 그녀가 신나서 말했다.
“유키코 쉐프님도 맛있다고 했어!”
진혁이 잘라 말했다.
“샘플을 보여주고 싶으면 실물을 가져와야지. 그리고 아직 조금 부족해. 웨딩 케이크를 만들기로 한 사람도 이미 있고.”
말없이 팔짱 끼고 앉아 있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웨딩 케이크를 만들어본 적이 있단다.”
“예?”
“진희가 만든 것처럼 세련된 케이크는 아니야. 그래도 나도 뭔가 하고 싶구나.”
아버지는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서 진혁은 바로 말을 바꾸었다.
“미미 씨의 손님만 해도 삼백 명이 되니까 케이크를 두어 개 더 올려놓는다고 해도 문제는 없을 거예요. 상의해 보겠습니다.”
“이히히.”
진희가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었다. 아버지가 씩 웃으며 임진희의 어깨를 툭 쳤다.
진희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그녀가 문자를 보고서 놀라서 말했다.
“그 한 비서님이라는 분 굉장히 유능하네. 난 말 한마디밖에 안 했는데 벌써 다 처리됐다고 하셔.”
“뭘?”
“할머니들 메이크업이랑 내 웨딩 케이크 추가되는 거.”
진혁이 입을 벌렸다.
“아니, 도대체 내 허락은 왜 받은 거야? 그냥 한 비서한테 바로 말해도 되잖아.”
“아니지.”
진희가 검지를 까닥거렸다.
“네가 내 케이크는 수준 미달이라며. 그러니까 글로벌한 손님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네가 웨딩 케이크를 봐 줘야지.”
◈ ◈ ◈
“이 배를 타고 결혼식장까지 간다고?”
이번에 새로 구입한 살굿빛 정장을 멋지게 차려입은 금천복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소망시에서 인천항까지 오는 버스 여행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한국에서 오는 손님들을 안내하기 위해서 따로 고용된 가이드가 웃으며 말했다.
“예, 햇살 경로당에서 오신 분들은 이쪽으로 오세요.”
“거참, 우리가 진혁이 덕분에 아주 호강하는구먼.”
“외국 여행이라니!”
금천복은 뒤에 따라오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에게 호통을 쳤다.
“거, 수학여행 가는 중학생들도 아니고. 여기 가이드 말 좀 들어! 여권은 나한테 내고. 줄 좀 잘 서 봐.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데 질서 있게 가야지.”
손님들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각자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온 <해와 달> 팀 역시 신이 나 있었다. 그들은 배에 오르며 저마다 신나게 떠들었다.
“진짜 여기 인턴으로 일한 게 제일 잘한 선택인 거 같아.”
오랜만에 서로를 만난 멸치와 너구리는 감격에 겨워 서로를 얼싸안았다.
“진짜. 내 인생에 크루즈 선을 타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강운종이 잘난 척을 했다.
“다 내 덕분이잖아. 내가 하자는 대로 하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니까.”
“운곰이 넌 혼자서 미국 갔다 오고 리무진 사진만 줄곧 올리는 놈이. 정작 선물은 하나도 안 사 오고.”
“아니, 그런 관광 코스를 하나도 안 갔어. 그냥 병원이랑 병원 안 빵집만 갔다니까.”
“공항에는 면세점이라는 게 있잖아. 양주 사 오면 되지.”
멸치가 해죽해죽 웃으며 말했다. 운종 역시 키득거리면서 말했다.
“돈을 줘야 사 오지. 다 같이 빤한 처지에 뭘 선물을 바라.”
“리무진에서 음료수 마시는 강운곰 님. 혼자만 맛있는 걸 다 먹고 돌아다니는 강운곰 님.”
“결혼식에서 많이 마셔. 그나저나 너 이제 나를 찬양하는 건 안 하네? 진짜 있는 대로 온갖 칭찬은 다 갖다 붙여서 너무 웃겼는데.”
“뭐야, 이제는 다 똑같은 처지잖아.”
진짜 친구가 되었다는 느낌이다.
“웃기는 소리, 날 따라오려면 한참 멀었어.”
예전에는 서로 서열을 따지며 주눅 들어 있었지만, 지금은 대등한 관계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빵에서 제과제빵 하는 건데.”
멸치도 강운종의 눈치를 보지 않았고, 너구리 역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웃기지 마. 미리 예습 좀 했다고 내 솜씨를 따라올 수 있을 줄 알아? 내가 인정받아서 미국까지 간 거 아니냐.”
“나도 언젠간 미국에 꼭 가야지.”
각자 인턴이라는 말단 자리에서 고된 일을 계속하다 보니 서로 동질감이 생겼다. 나름대로 제빵사라는 일에 프라이드도 갖게 되었다.
유일봉은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인턴들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좋을 때다.”
“일봉 씨 덕분에 이런 데도 오네요. 진혁 쉐프도 엄청나게 성공했어요. 처음에 마라톤 대회에 카스텔라 스틱 바를 제공해 주셨을 때 생각하면 지금 같은 건 상상도 할 수 없는데 말이에요. 무슨 마약도 아니고, 달리다가 입에 넣자마자 한 사람씩 계속 멈추는 게 얼마나 웃겼는데요. 결국, 약물검사까지 해서 그냥 평범하게 맛있는 빵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잖아요.”
일봉의 파트너로 참석한 서미란이 행복해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장님이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몰라요. 소망시가 배출한 인재라고.”
“그래요?”
“저번에 프랑스에서 제과제빵 대회 우승을 했을 때는 시청에 플랜카드도 걸었잖아요. 그것도 시장님이 한 거예요.”
“푸핫, 그건 몰랐네. 진혁이 부모님이 건 줄 알았는데요.”
일봉이 키득키득 웃었다. 미란이 낯익은 얼굴들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쟤들이 일봉 씨가 지금 직접 가르치고 있다는 애들인가? 생각보다 덩치가 좀 있네요.”
인턴들이 전부 소년원 출신이란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일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장 동료들은 다 왔나 봐요.”
“저기 백진영 사장님이 바리스타 하시는 분이에요. 처음부터 진혁이 형 빵을 엄청 좋아했죠. 얼마 전에는 아시아 커피 대회에서 최우수 바리스타로 상을 받기도 했고요. 이쪽의 유키코 쉐프님은 아시죠?”
미란이 눈을 크게 떴다. 유키코는 귀여운 아기를 안고 있었다. 아기는 솜으로 된 딸기가 달린 분홍색 모자를 쓰고 분홍빛 배내옷을 입고 있었는데, 졸린 지 하품을 했다. 옆에는 목발을 짚은 남자가 서 있었다.
“아기가 너무 예뻐요!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서 뵈었던 분을 실제로 보니까 영광이네요. 이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다들 대단한데요?”
유키코가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저마다 인사를 나누고 웃고 떠든다. 근심걱정없이 다과를 즐기며 노니는 손님들과 달리 진행 측은 바빴다.
조명이 환히 켜진 배 안쪽, 특실에서는 진혁이 미미와 함께 행사 진행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배의 진로를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비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태풍의 북상이라.”
“지금 태풍 ‘티타니아’는 오키나와 남남서쪽 해역에서 북서진하고 있습니다. 중심 기압도 높고, 최대 풍속이 시속 180km에 달하는 강한 태풍입니다. 지금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오늘 밤이나 내일 오전 중에 상하이 즈음에 도착할지도 모릅니다.”
미미가 양 뺨을 감싸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급하게 해안에 정박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안전이 최우선이니까요.”
그녀는 피곤에 지친 안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늘의 뜻을 우리가 어찌할 수 있겠어요.”
왕 비서가 말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정박한 상태에서도 행사를 진행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너무 위험해요. 차라리 배에서 내려서 행사를 할 수 있을 만한 곳을 따로 교섭해 두세요. 안전한 내륙 지방으로요.”
그녀는 몇 가지 사항을 더 지시했다. 진혁이 말했다.
“태풍은 이쪽으로 오지 않을 겁니다.”
“예?”
“그러니 안심하시고 진행하세요.”
◈ ◈ ◈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
“내일은 꼭 일찍 일어나셔야 해요!”
“물론입니다.”
미미는 손을 흔들며 진혁을 배웅했다. 각자 자신의 선실로 돌아갔다.
새벽 한 시 경.
드디어 다음 날의 결혼식을 대비하여 분주하게 준비하던 모두가 잠들었다. 당직 선원들을 제외한 손님들이 전부 잠든 것을 확인한 진혁은 배 위로 몸을 날렸다.
누군가 보았더라면 자살하는 것으로 착각해 크게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가 물 위로 뛰어내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사람이 물에 빠지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등평도수.
물 위를 걷는 이 기술은 아무리 절정에 이른 무공의 고수라고 하더라도 고요한 호수 위에서나 시행할 수 있다. 하지만 진혁은 거친 파도가 모래사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볍게 그 위를 달려갔다.
달린다기보다 쏘아져 나가는 것에 가까운 속도였다.
그가 지나쳐가는 바닷길 위로 파도가 무너지고 바람이 갈라졌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가야 할지 먼 곳을 바라보며 가늠했다.
“남쪽으로 조금 더 가면 되겠군.‘
더 이상 배가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서 자칫해서 길이라도 잃으면 큰일이다.
그는 대자연의 섭리에 거역할 셈이었다.
‘태풍을 없앨 수는 없어. 갑자기 소멸해 버리면 의심을 살지도 모르니. 이쪽으로 오지 않게 아주 조금만, 방향만 돌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