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407화 (406/656)

제 407화

당일 행사를 담당한 막내 비서가 허둥지둥 뛰어 들어왔다.

「왕 비서님! 당일 초청한 페이스트리 쉐프가 거절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왕 비서는 서류를 덮고서 고개를 들었다.

「중국 최고의 페이스트리 쉐프를 초청했다고 하지 않았나.」

개업 때부터 일했던 직원들은 전부 결혼식을 기념해 크루즈에 초청받았다.

모든 것을 최고로 하라는 돌아가신 어르신의 뜻을 기려 직원들 중 한 명을 선정해서 디저트를 부탁하지 않았다.

대신 중국 내에서 이름이 높은 페이스트리 쉐프에게 부탁했다. 과거 세계 대회에서도 참가한 이력이 있는 자다.

「신랑이 임진혁 쉐프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거절했다고 합니다.」

「이 상황은 회장님께 직접 보고하도록 하게나.」

막내 비서의 보고를 받은 황미미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자가 누구죠?」

「장수이라고 북경 매화제과학교 출신의 페이스트리 쉐프입니다. 예전에 진혁 쉐프님과 좋지 않은 관계였던 자의 선배인 모양입니다.」

「다른 자는요?」

「너무 일정이 촉박해서 전부 예약이 있는 듯싶습니다.」

「비서님, 중국 국내에 있는 사람으로 한정해서 알아보고 있나요?」

미미가 간단하게 물었다.

「네? 물론입니다.」

그녀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미미는 막내가 아닌 왕 비서를 직시했다.

「왕 비서, 사람 보는 눈이 조금 더 있는 줄 알았는데요.」

왕 비서는 막내를 데리고 방에서 나왔다.

「누가 자네 사수였지?」

「하, 한 비서님입니다.」

막내는 긴장해서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자네는 비서 업무에서 빠지게. 며칠간 좀 쉬도록 해. 그리고 한 비서 불러와.」

「네, 넵!」

사실상 해고에 가까운 조처다. 막내 비서가 창백한 얼굴로 사라지자 왕 비서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미미가 냉막하게 말했다.

「장수이 씨를 처리해 주세요.」

정말로 말하려던 용건은 이쪽이다.

왕 비서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          ◈          ◈

윌리엄 쉐프에게서 마침 연락이 왔을 때 진혁은 밥 앤더슨의 모델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빵 주문을 받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한국에 오신다면 기꺼이 빵을 판매하겠다고 약속드리죠.」

전화기 너머에서 윌리엄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이사장님이 미친 것 같습니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라고요. 원래는 이런 식으로 먹을 거에 집착하시는 분이 아닌데, 그러면 안에 들어간 신비스러운 채소 이름이라도 알려 달라고 고집을 부리시네요.」

‘그 병원 마당에 있는 쑥인데.’

진혁이 웃었다.

「비밀 레시피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설령 재료를 알려준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다른 사람이 같은 레시피로 베이글을 굽는다고 해도 같은 맛이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진혁이 덧붙였다.

「지난번에 선물로 드렸던 베이글은 다음 달부터 한국 지부에서 판매할 예정이라고 전해 주세요. 윌리엄 쉐프.」

「예에에.」

「괜히 저 때문에 곤란해졌군요.」

「아, 그건 아닙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윌리엄이 껄껄껄 웃었다.

「그 콧대 높던 이사장님이 쩔쩔매는 걸 보니까 저도 아주 속이 시원합니다, 그려.」

「하하.」

「이사장님이 매일 들락날락하니까 덩달아 직원들도 많이 와서 매출도 부쩍 늘었어요.」

「그건 잘 됐네요. 한국까지 오지야 않겠지만 만일 온다면 잘 챙겨주겠다고 이야기해 주세요.」

전화를 끊은 후 진혁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통화를 하는 중에도 집중해서 물감을 칠하고 있던 밥 앤더슨이 혼잣말처럼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하! 역시 자네는 좋은 모델이야. 이 자유로운 움직임,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 있는 저 감성, 황금 비율적인 외모, 그 모든 게 다 완벽하다고.」

밥 앤더슨은 신이 나서 붓을 움직였다.

스케치도 없이 바로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는 모습은 과연 대가다웠다.

그는 신들린 것처럼 집중해 그림을 그렸다.

진혁은 잠시 서 있었다.

누군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마음대로 움직이라고 이야기하는 화가는 처음이다.

진혁이 물었다.

「초상화는 언제 완성됩니까?」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정이 있기 때문에 오늘로 모델은 끝이다.

당분간 이 정신 나간 것 같은 예술가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전에 미리 일정을 알고 싶었다.

밥 앤더슨이 의아해하며 반문했다.

「초상화? 누가 이걸 초상화라고 그래?」

「아닙니까?」

「당연히 아니지. 이건 개념의 혁명이고, 추상의 현실화야. 초상화 같은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지.」

「…아아, 예예.」

진혁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대가가 뭐라고 지껄이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나저나 자네 빵 말이야, 정말로 대단해. 오늘 갖고 온 빵도 최고였어. 자네가 있는 빵집에 가면 그런 빵을 매일 먹을 수 있나?」

「물론입니다.」

「하하하! 동양인들은 겸손하다고 들었는데 자네는 그렇지 않아서 좋아.」

밥 앤더슨은 붓질을 계속해나가며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에 먹었던 빵이 맛이 없다며 불평하기도 하고, 침대 시트가 쉽게 더러워진다면서 짜증을 내기도 했다.

라임 색깔이 라임답지 않고 지나치게 탁하다고 하더니 메탈 화이트에 회색 기가 아니고 파란 기운이 돈다면서 이것저것 물감도 섞었다.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것처럼 쉴 새 없이 중얼중얼거리는데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는 것 같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진혁이 다짜고짜 묻자 그가 투덜거렸다.

「그림 말이야, 그림! 자네 갖고 있으라고 준 건데 중국 부자에게 팔아 버렸잖아. 너무한 거 아닌가?」

입을 비죽 내미는 꼴을 보고서 진혁이 정정해 주었다.

「판 게 아닙니다.」

「엉?」

「제 아내 될 사람입니다. 선물로 준 거예요.」

앤더슨은 순간적으로 붓을 놓칠 뻔했다.

다행히 바로 잡아서 그림을 망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결혼은 언젠데?」

「다음 주인데요.」

밥 앤더슨의 붓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쩌렁쩌렁 외치기 시작했다.

「아니, 그런데 지금 결혼식 준비를 도우러 가지 않고 여기에 모델을 하러 왔단 말이야? 훌륭한 예비 신랑이라면 마땅히 준비를 하고 있어야지! 신부가 미국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른손에는 팔레트를 들고, 유화용 앞치마를 걸친 앤더슨이 궁시렁궁시렁거렸다.

임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나는 지금 미스터 밥이 초대해서 여기에 있는 겁니다. 처음부터 시간이 없어서 모델은 어렵다고 이야기했는데.」

「내일이면 죽을 늙은이하고 같이 있으면 뭘 해, 가서 아내 침대라도 따끈따끈하게 데워 놔!」

「그림은요?」

밥 앤더슨이 히죽 웃었다.

「나를 결혼식에 초대하면 되잖아.」

「예?」

「나는 오 년 동안 아무 데도 간 적이 없다고. 나도 가서 결혼식 음식 좀 먹어 보자.」

「싫은데요.」

진혁이 웃음을 잃지 않고 대답하자 밥 앤더슨이 벌컥 화를 냈다.

「아니, 왜?! 하다못해 자네 와이프 될 사람 의견이라도 들어 봐! 혼자서 결정하지 말고!」

「왜 오고 싶으신 겁니까?」

「빵이 맛있을 것 같아서.」

「병원에서 편히 쉬시죠.」

「아니, 아니, 자네는 날 초대하게 될 거야.」

밥 앤더슨이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악당처럼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그를 보며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 미스 황은 내 그림을 좋아하잖나? 그러니까 자네가 내 그림을 선물했겠지.」

「….」

「그럼 내가 가면 더 좋아하겠지!」

「….」

「자, 당장 초대장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나?」

임진혁은 물끄러미 화가를 바라보았다.

그가 조금씩 진기를 주입해 당장은 기운이 넘치지만 미국에서 중국까지 장거리 비행기 여행은 무리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우겨서 붓과 캔버스 등 화구를 들여놓았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서 숨을 헉헉 몰아쉬는 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임진혁은 이 화가가 1년 내에 죽을 것이라 예상했다.

중국까지 갔다 온다면 분명히 남은 생명이 몇 주는 줄어들 것이다.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노인네가 빨리 죽고 싶어서 미쳤군요.」

그 심하다 싶은 말을 듣고도 앤더슨은 히죽이 웃어 보였다.

「침대에 드러누워 재미없게 살다가 죽는 것보다는 그게 낫지.」

그가 단호하게 선언했다.

「나는 하고 싶은 걸 하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먹고 싶은 걸 먹으면서 살아왔어. 그러니까 죽는 것도 내가 선택한 곳에서 죽을 거라고」

진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남의 결혼식장에서 죽을 생각 하지 말아 주십시오, 민폐입니다.」

「그럼 내가 의사 허락을 받아 오면 초대해 줄 건가?」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의사 허락을 받든 말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          ◈          ◈

그날 밤, 초대객 명단을 받은 장은효는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고서 아들에게 연락을 했다.

진혁이 옛 고등학교 동창이나 대학교 동창 등, 다른 친구들은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 옛날에 어울려 다니던 애들은 요즘 연락 안 하는 것 같던데.”

“네.”

“인륜지대사인데 안 불러도 괜찮니?”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들끼리 잘도 몰려다녔지만 군대 갔다 오고 나서는 전혀 연락하지 않았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친구라고 할 필요도 없는 쓰레기들.’

진혁이 사고가 나서 누워 있는 동안 단 한 명도 문병조차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친구라고 간주하지 않았다.

너무나 오래 전의 일이라 얼굴도, 이름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차라리 <해와 달>의 단골손님을 초청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너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고 싶다고 찾아왔더라고. 청첩장 받을 수 있냐고.”

진혁은 간단하게 답변했다.

“안 와도 된다고 해주세요. 이미 초대객 수에 맞춰서 식사와 숙박을 준비했기 때문에 갑자기 인원을 늘릴 수는 없어요. 미미 씨가 곤란해질지도 몰라요.”

“그래, 이게 그냥 찾아오는 평범한 한국 결혼식도 아니고… 급하게 준비하다보니 그런 점도 있겠구나. 내가 생각이 짧았네.”

어머니가 납득했다. 함께 명단을 들여다보고 있던 임진희가 영상 통화에 끼어들어 말했다.

“소망시 단골손님들은 완전히 다 불렀잖아. 할머니들 완전 난리 났어. 옷값으로만 십만 원 넘게 쓰셨대.”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십만 원?”

“수당 받아 하루하루 사는 할머니들한테 십만 원이 얼마나 큰돈인데. 처음으로 배 타고 외국 나가 본다고 햇살 경로당 전체가 우르르 몰려나가서 시내 옷가게에서 옷을 사 입으셨어. 그것도 금천복 할머니가 돈 좀 보탰을 걸?”

숙박과 교통비, 식사를 책임져 준다고 하더라도 몸뻬 바지와 오래된 셔츠를 입고서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

미처 진혁이 챙기지 못한 부분이었다.

진희가 물었다.

“내가 이번에 돈 좀 보탤 테니까 사람 좀 더 태워줄 수 있어?”

“왜?”

“너 졸업한 대학에 메이크업 학과 있잖아. 거기 대학생 두 명만 섭외해서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 할머니들 아마 이번에 네 결혼식 가서 찍는 사진이 영정사진이 될 거야. 우리야 혼주 메이크업 받지만 그분들은 변변한 화장품 하나 없으니….”

“한 비서하고 상의해 봐.”

“오케이!”

명단을 마저 쭈욱 읽던 진희가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잠깐, 잠깐. 밥 앤더슨 씨? 이 사람 설마 그 화가야? 동명이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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