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405화 (404/656)

제 405화

「아, 유감스럽지만 저도 이만 가봐야 합니다. 빵을 찾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군요.」

임진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링턴 클리닉의 이사장인 에드워드 해링턴은 누군가 자신의 앞에서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뭐?」

스마트폰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임진혁의 것이었다.

해링턴의 이사장을 만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임상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동시에 이사장의 업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에드워드는 아무나 만나지 않았다.

「잠시만요, 전화가 왔군요.」

「눈앞에 내가 있는데 전화를 받는다고?」

지금 눈앞의 어린 동양인 남자에게 무시당했다.

하지만 방금 전에 느꼈던 빵의 맛이 너무나 상쾌했기 때문에 화도 나지 않았다.

「아, 밥 앤더슨 씨. 그렇지 않아도 약혼자와 그 문제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밥 앤더슨? 설마 그 화가인 밥 앤더슨 말인가?」

현대 미술 애호가인 에드워드 해링턴은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최근 작품을 거의 그리지 않고 있다던데, 자네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나?」

진혁이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어제 새로 그렸던데요.」

「엣.」

「다른 병원에 있는 저희 베이커리 카페 지점에 기증하셨습니다. 아직 언론에 공식 발표를 하지는 않았으니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맙소사!’

에드워드 해링턴은 크게 흥분했다. 그 콧대 높은 미식가 화가는 이 페이스트리 쉐프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게 틀림없다. 이혼한 아내의 사업에도 일체 관여한 바가 없으며 그림으로 홍보를 해주거나 한 적도 없는 자다. 그렇다면 이 자와는 대체 무슨 관계일까.

‘제과제빵 사업에 관심이 있는 건가? 그냥 예술가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병원 내에 훌륭한 시스템을 갖춘 베이커리 사업에도 투자하고 싶다던가?’

그렇다면 대하는 태도 자체를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에드워드 해링턴은 헛기침했다. 단순히 동양에서 온 촌뜨기라고 생각했으나 빵을 맛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림 이야기를 듣고서는 이 남자에게 완전히 매혹되어 버렸다.

‘친해지고 싶다.’

어렸을 적부터 에드워드는 누군가와 특별히 가까워져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와 친한 척을 하며 가까워지려고 했다.

「자네, 대단하군.」

그는 그저 호응해 주기만 하면 됐다. 그래서 별다른 사교술도 필요하지 않았다. 가끔 이런 식으로 칭찬을 한마디 하면 다른 사람들이 놀라워하면서 부러워했다.

모처럼 그가 칭찬을 했는데도 임진혁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별거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이 남자는 놀랍게도 이사장이라는 신분을 비롯한 에드워드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지위에 관심 없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던 에드워드는 그 모습을 겸손한 것으로 착각했다.

「밥 앤더슨이 원래 아시아 쪽에 관심이 많다고 듣기는 했는데. 자네가 현대 미술에 관심이 있는지 몰랐네, 어떻게 하다가 미스터 앤더슨과 신뢰 관계를 쌓게 되었나?」

「현대 미술에는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신뢰 관계도 없고요.」

임진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빵을 드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니, 자네!」

「말씀드렸다시피 저도 바쁘니까요.」

무례하고 어리석다. 젊은 한국인 청년이 자리를 뜨고 나서 에드워드가 아들에게 투덜거렸다.

「네 생명의 은인이라고는 해도 경우가 없는 청년이구나. 아시아에서 와서 그런지 매너가 없어.」

「아버지! 인종 차별같이 시대착오적인 소리 좀 하지 마세요.」

「밥 앤더슨 같은 유명한 화가와 알고 지낸다는 점을 피력하고 나서 현대 미술에 관심이 없다니,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게 우습지 않더냐.」

「아버지, 그 희한한 추상적인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저만 해도 인상파 그림이 더 좋은데요. 미술에 관심이 없지만 다른 일로 밥 앤더슨 씨를 알게 되었을 수도 있잖아요.」

「그거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말이지.」

「하여튼 저 가게를 내쫓는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신의는 지켜 달라구요.」

「알겠다.」

「언제나 저희한테 계약은 소중한 거라고 말씀하시고서 정작 아버지가 지키지 않으시려고 하면… 예?」

「계약기간을 지키자꾸나.」

예상외의 반응에 아들이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뻐끔거렸다.

「당장 내보내려고 했던 게 아니었어요?」

「요즘 오래 있었던 환자들이 많이들 나갔어. 새로운 환자들은 시내의 급성 병원으로 가려고 하고. 그러니 매점이나마 자체영업으로 바꾸어 흑자를 늘려 보려고 했지. 그런데 그 카페가 잘 나가는 이유가 위치나 시스템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맛이 좋아서라면-우리가 그 가게를 내보내고 직접 여는 거로는 해결이 안 돼.」

「당연하죠! 제가 처음부터 이야기했잖아요, 거기 빵이 아주 맛있다고요.」

어떤 음식을 먹어도 맛있다고 표현했던 적이 없는 에드워드다. 그는 차분하게 인정했다.

「그래. 맛있더구나.」

◈          ◈          ◈

임진혁은 윌리엄 쉐프에게 몇 가지 방안을 전수해 주었다.

「베이글을 만들 때 튀기는 시간을 1초 정도 줄이면 될 겁니다.」

「1초요?」

「앞면을 뒷면보다 조금 더 튀기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한쪽이 더 질겨져 버린 겁니다. 그것만 교정해도 맛이 훨씬 좋아질 거예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조언을 듣고 적용하자 실제로 빵의 맛이 월등히 좋아졌다. 처음에는 뜨악한 표정이던 윌리엄은 곧 적응해서 적극적으로 이것저것 요청하였다. 그동안 고심하던 모든 문제가 이렇게 쉽게 해결된다는 점이 놀랍고도 신기했다.

「요정 대모님이 요술봉을 휘둘러 해결하는 것처럼 놀라운 조언들입니다. 임 쉐프님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단시간에 맛이 좋아지지는 못했을 겁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윌리엄이 싹싹하게 웃었다.

「사실 분위기가 좋지 않아 걱정했는데 이것도 참, 인연인지. 임진혁 쉐프님이 본즈 해링턴 선생님의 생명을 구해주신 것도 다행이고, 그분이 이사장님 아들이자 부이사장인 것도 다행이고, 전부 다 잘됐습니다. 덕분에 문제가 잘 해결될 것 같군요.」

「또다시 문제가 생긴다면 이쪽으로 연락을 주십시오.」

「문제요?」

「누군가 빵 맛이 다르다고 불평한다거나? 특별히 기운 나는 빵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거나 하는 일이 생긴다면 말입니다.」

진혁이 명함을 주었다. 그는 오늘 특제 빵을 맛본 그 노인이 연락할지 하지 않을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남자에게 괜히 그 불똥이 튀기지 않도록 하였다.

「하하하! 그 정도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명함은 잘 보관하겠습니다. 아 참, 이 명함 말인데요.」

「예.」

「본즈 해링턴 선생님께 연락처를 알려 드려도 될까요? 은혜를 꼭 갚고 싶다고 저한테 자꾸 찾아오는데 말입니다.」

「그냥 여기서 빵 많이 사 먹고, 커피를 마시라고 하세요. 그게 저한테 은혜를 갚는 길이라고.」

「하하하하! 본즈 선생님은 저래 봬도 런던에서 제일 잘 나가는 정신과 의사입니다. 아버지 등쌀에 임페리얼 칼리지의 교수직을 포기하고 이쪽으로 왔는데, 학회에 논문도 많이 내고 아주 능력 있는 분이세요. 알아둬서 손해 볼 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제게 정신과 진료가 필요할 만한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군요.」

「이런, 제가 실례를 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대화를 마친 후에는 밥 앤더슨이 다시 연락해왔다.

「이봐, 자네만 바쁜 줄 알아? 나도 바쁜 사람이라고! 내일 3시까지 이리로 오란 말이야. 모델을 오래 설 필요도 없어, 내가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있다고.」

진혁은 모델 건에 대해 미미와 상의했다.

당장 일월신교의 교주로 있을 때도 몇 장의 초상화를 그려 걸어두긴 했으나, 단지 한 장뿐이었다. 역대 일월신교 교주들의 초상화를 걸어 두는 방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카메라가 없었으니까 그렇지.’

그 자신은 모델을 해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사진으로 찰칵 찍어서 남기면 되는데 불편하게 몇 시간 동안 여러 날 시간을 투자해 늙은 백인 남자와 함께 있어야 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미미가 설득했다.

「밥 앤더슨 씨가 진혁 씨를 그리고 싶어 한다니 정말로 역사에 남을 일이에요.」

「예?」

「어떤 그림이 될지 정말로 보고 싶네요.」

「….」

「이번에 진혁 씨가 선물해 주신 그림은 특별히 할아버지께서 아끼는 그림들만 두었던 미술관 내에 전시하고 있어요. 일반인 공개는 하지 않을 예정이지만, 미술지 기자들은 취재 요청을 계속해서 하고 있답니다. 나중에 결혼식 때 공개하려고 거부하는 중이에요. 밥 앤더슨 씨가 펜로즈 삼각형 모양의 미니 컵케이크와 쿠키 판매도 괜찮대요?」

「예. 그냥 먹어서 없어져 버리는 거면 된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포장지나 포스터, 잡지 광고에 그림 이미지나 케이크와 쿠키 이미지는 쓰면 안 된다고 제한을 걸었습니다.」

「좋네요, 그러면 아예 투명한 포장지에 넣어서 팔면 돼요. 광고는 라디오와 백지 전단지만으로 하고요.」

「백지요?」

「펜로즈 삼각형 모양의 쿠키 사진은 담을 수 없으니까, 글자와 백지만 찍어서 붙이면 돼요. ‘밥 앤더슨’이라는 글자가 붙는 순간 안 팔릴 리가 없어요. 신비스러워서 더 잘 팔릴지도 몰라요.」

「알겠습니다.」

진혁은 미미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해링턴 클리닉에서 떠나며 강운종이 말했다.

“윌리엄 쉐프님이 뭔가 잘 하는 건 되게 잘하는데, 못하는 건 정말 못하시는 거 같아요.”

“어떤 면이?”

“베이글이 맛있는 것도 있고 맛없는 것도 있더라고요. 좀 편차가 있다고 해야 하나.”

민병철이 웃었다.

“그게 정상이야.”

“예?”

“어느 빵집을 가도 그 빵집의 모든 빵이 다 엄청나게 맛있을 수는 없어. 모든 자동차가 전부 슈퍼카일 수는 없는 것 같이 말이지. 수수한 빵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쫄깃한 빵을 즐기는 사람, 퍼석퍼석한 걸 원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아.”

“그리고 똑같이 빵을 굽더라도 오븐의 가장자리에서 구워진 빵하고 안쪽에서 구워진 빵은 맛이 달라. 구워진 정도가 달라서 그래.”

“임진혁 쉐프님이 굽는 빵은 그런 게 없던데요.”

“그건 걔가 마법같이 빵 반죽의 크기와 위치를 조절해서 그런 거고. 보통 사람은 그렇게 못하는 게 정상이야.”

진혁이 턱을 괴고서 피식 웃었다.

“병철이 형이 베이커리 회사의 이사를 하더니 빵 도사가 다 됐네.”

“공부를 많이 했지. 그렇지 않으면 해외 영업을 어떻게 하냐?”

“하하.”

“그럼 한국에 있는 우리 <해와 달> 빵집들이 특별한 거네요. 진혁 쉐프님은 그냥 잘 하셔서 그러신 거고.”

강운종은 헤실헤실 웃으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렇지.”

“그런데 오늘 잘 하셨어요? 저는 오늘 한 게 아무것도 없어서 죄송하네요. 그냥 빵만 먹고.”

“괜찮아. 많이 먹고 어떤 맛인지 생각해 보고 어떻게 하면 달라질지 고민해 봐. 그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될 테니까.”

민병철과 강운종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진혁이 수첩을 넘겼다. 다음 달 일정을 보면서 그가 무심하게 말했다.

“아 참, 나 다음 달에 결혼해. 이날하고 이날은 안 돼.”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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