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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의 베이커리-404화 (403/656)

제 404화

통화를 하다 보니 어느샌가 이사장실에 도착했다. 안쪽에 인기척이 있었기에 진혁은 그 앞에 서서 기다렸다.

안쪽에서 부자가 나누는 이야기가 아주 잘 들렸다.

「아버지! 쓸데없는 짓 하려고 하지 마세요.」

「쓸데없긴 뭐가 쓸데없어! 적당히 교섭해서 어떤 식으로 하고 있는지 알아내라고. 카페는 별로지만 거기 시스템은 괜찮아. 그러니까 시스템만 빼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봐.」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당연히 거기에는 보답을 할 거야. 적당히 돈 좀 쥐여주면 되지, 뭐가 문제야?」

아까 보였던 호탕한 태도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문에는 방음처리가 되어 있지만, 진혁에게는 아주 잘 들렸다.

그는 노크를 했다.

‘이 빵을 과연 저놈한테 먹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

미운 놈 떡 하나 준다고 하지만,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에게 굳이 이 빵을 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곧 문이 열렸다.

「들어오시게나, 내 아들도 불렀네.」

「반갑습니다, 아까 뵈었죠.」

이사장은 조금 전까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 쪽이 씩씩거리며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벌써 빵을 구워왔을 리는 없고 말이야. 뭔가 다른 건 생각나지 않나?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히 빵을 먹어달라는 건 너무 부족해. 내 아들 목숨을 구해줬는데 말이야!」

이사장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진혁이 싱긋 웃었다.

「실은 미리 구워두었던 빵이 있었습니다.」

그는 종이봉투에서 빵을 꺼내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사장은 그 빵을 힐긋 보고서 말했다.

「식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말이야, 지금 당장 먹을 필요는 없지? 내가 뒀다가 나중에 먹겠네.」

진혁은 눈앞의 이사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자는 당장은 빵을 먹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가 원한다면 눈앞의 노인을 벽에 꽂아놓고 입에 빵을 처넣어 줄 수도 있었다.

아니면 단순히 섭혼술을 걸어 직접 씹어 먹도록 해줄 수도 있었다.

너무나 손쉬운 일이다.

그렇기에 진혁은 화가 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해링턴 클리닉의 이사장은 자신의 약속 따위는 전혀 지키지 않는군요.」

「무슨 소린가.」

「그냥 빵을 먹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을 뿐인데 그것조차 지키지 못한다니요.」

「아니, 내가 이걸 안 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먹고 싶을 때 먹겠다는 거 아닌가.」

「직접 드시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인데요.」

진혁이 싱글싱글 웃었다. 이사장의 아들이 거들었다.

「아버지, 이 분은 세계 수준의 페이스트리 쉐프입니다. 평소 아버지가 드시는 음식들과 결코 수준이 다르지 않은 음식을 만드시는 분입니다.」

「호오, 그래?」

이사장은 비로소 손을 뻗어 진혁이 내놓은 빵을 쥐었다.

갓 구워서 따끈따끈한 온기가 손에 닿아왔다.

「그래도 기껏해야 베이글 아닌가. 쯧, 나이가 들었더니 함부로 이것저것 먹으면 식사를 하기가 어렵더라고. 한 입만 맛봐도 되겠지?」

진혁이 피식 웃었다.

‘먹는 걸 멈출 수 있다면 말이지.’

「물론입니다.」

노인은 주름진 손가락으로 베이글을 한 점 떼어냈다. 쫄깃하고 푹신한 속살이 비단결처럼 보드랍게 찢어졌다.

「과연 솜씨가 조금 있긴 하구먼.」

안쪽에 점점이 박혀 있는 녹색 점을 보고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초록색 덩어리들은 뭔가?」

방금 전에 여기 정원에서 뜯어온 쑥이다. 진혁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간에 좋은 채소입니다. 맛보시면 아실 겁니다.」

「어디 보자고.」

이사장은 빵을 한입 물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 눈꺼풀과 이마에 패였던 주름살이 조금 더 깊어졌고, 쪼글쪼글한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아직 입안에는 빵 조각이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이사장의 아들이 진혁에게 말했다.

「진작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저희 병원에 마침 찾아오셔서 만나게 되다니 이것도 인연이 아닐까요. 제가 구급대원들에게 아무리 물어봐도 구해주신 분을 찾을 수 없다고만 하더라고요. 영원히 찾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특별히 찾으시지 않아도 괜찮은데요.」

「하하하! 농담도.」

‘농담이 아닌데.’

진혁은 이사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사장은 빵조각을 입안에 넣은 채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흔들리는 동공이나 입가에 흐르는 침을 보면 멀쩡한 것 같기도 했다.

‘너무 맛있게 만들었나?’

건강에 아주 좋은 재료만 모아서, 간의 회복을 도모하였다. 이사장은 굳어버린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진혁은 이사장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한참 말을 걸던 아들 역시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

노인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빵을 잡은 그대로 털썩, 손이 떨구어졌다. 하지만 그 손은 끝까지 베이글을 놓지 않았다.

‘심박 수가 너무 빠르군.’

진혁은 이사장의 몸 상태를 면밀하게 살폈다.

어린아이일수록 심장의 맥박 수가 빠르고,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어갈수록 맥박 수가 줄어든다.

지금 이사장의 심장은 위험할 정도로 빨랐다. 하지만 당장 쓰러지거나 심장 마비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아버지!」

이사장의 아들이 달려가 아버지를 부축했다.

◈          ◈          ◈

에드워드 해링턴은 평생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서 살아왔다. 부유한 의사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사립 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병원을 물려받았고, 두 아들을 두었다.

두 아들 모두 아버지와 자신이 걸어왔던 인생대로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자신의 전공인 뇌신경외과를 하지 않고 내과와 정신과를 전공했다는 점만 빼면 모든 점이 완벽했다.

그는 식탐이 없고 담백한 사람이었다.

귀족 집안에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가 신사라고는 할 수 없다.

예절을 알고서 품위 있게 행동하며 신사의 말씨를 사용하기 때문에 비로소 신사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는 지극히 영국적이고 단순한 식사를 꾸준히 해 왔다.

아침은 소시지와 에그 베네딕트, 그리고 오후에는 티 타임을 갖고 홍차를 마시며, 저녁에는 피시 앤 칩스와 맥주 한 잔으로 하루를 마친다.

의대생 시절에도, 병원의 이사장이 된 지금도 평생 그 생활 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베이글 따위는 좋아하지 않는다. 예전에 한 번 대학생 시절에 맛본 적이 있는 것 같기는 하다.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었으면 저런 허접하고 둥근, 미국적인 빵 따위에는 손도 대지 않았을 것이다.

‘방금 그게 뭐지.’

빵을 먹는 순간 온몸의 신경이 찌릿하게 달아올랐다. 혀끝부터 느껴지는 전율은 번개에 감전된 것처럼 온몸을 달구었다.

그리고 그는 꽃밭 위에 서 있었다.

꽃핀 당근밭이었다.

토끼들이 폴짝폴짝 뛰어 노닐고, 하늘은 푸르다.

어렸을 적 아버지를 따라갔던 여우 사냥터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들들이 기숙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데려갔던 교외의 정원 같기도 하다.

해링턴 클리닉은 대대로 이어오는 유서 깊은 병원이지만, 최근에는 현대식 대형 병원에 환자를 빼앗기기 시작한 참이었다.

그래서 에드워드는 고민이 많았다.

자신까지는 그다지 문제가 없을 테지만, 아들놈이 이사장 자리를 물려받을 때가 되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늦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병원을 개혁해야 한다.

요즘은 식욕이 별로 없었고 밤에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 빵을 씹는 순간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이 가볍게 느껴졌다.

어쩌면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은 것 같기도 했다.

「자네, 여기에 약을 섞었나?」

에드워드 해링턴이 불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임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브로콜리와 당근, 그리고 신비한 동양의 약초가 들어간 베이글입니다. 브로콜리에도 당근에도 피로를 풀고 간의 회복을 돕는 효과가 있지요」

「…음식으로 회복을 돕는 다라.」

「동양에서는 ‘약식동원’이라 하여, 음식을 통해 신체의 기를 보한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가정의학과에서도 비슷한 걸 하지. 예방의학의 일종인가?」

이사장은 방금 떼어냈던 빵 조각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는 그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글래스고의 정원을 본 것 같아.」

「예?」

「대마초라도 섞었나 했네. 하지만 대마초가 섞였다면 이렇게 개운하고 상쾌한 기분이 들 수는 없지, 조금 더 불쾌한 뒷맛이 있어야 하는데.」

아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버지, 마리화나를 피워보신 적이 있으세요?」

「네가 알 필요는 없다.」

「….」

에드워드 해링턴은 빵을 마저 베어 물었다. 처음 입안에 들어왔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보들보들하면서 쫄깃했다. 이와 혀 사이에 달라붙지 않으면서도 폭신하고 쫀득거린다. 당근의 색깔은 보이지 않지만, 당근 특유의 단맛도 어렴풋이나마 느껴진다.

「…이 빵은 대체 뭐지?」

저녁에는 피시 앤 칩스를 먹어야 한다.

오십여 년간 단골집으로 삼고 있는 동네 펍에 가서 지정석에 앉으면 주문하지 않아도 여주인이 튀긴 생선과 감자튀김을 내온다. 건강에 좋은 맥주 한 잔 역시 함께 따라 나온다.

수십 년 동안 먹어왔지만, 그곳의 피시 앤 칩스를 생각하면 저절로 입가에 침이 고였다.

하지만 더 이상 그 피시 앤 칩스가 맛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전혀 좋아하지 않는 이 음식, 베이글이 더 달콤하고 쫄깃하다.

‘이런 게 베이글이었단 말인가.’

베이글의 존재를 모르고 살았던 65년 평생은 헛되이 살아온 게 아닐까.

좀 더 어리고 미각이 민감했던 어린 시절에 많은 종류의 음식을 먹어보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후회는 화살처럼 짧고 강렬하게 전신을 관통했다.

눈가가 촉촉해져 오지만 그는 애써 양 눈을 찡그리며 미간을 좁혔다.

「이건 그냥 베이글입니다.」

에드워드 해링턴은 조금 전과 달라진 눈빛으로 눈앞의 동양인 사내를 바라보았다.

우연히 아들을 구해주었을 뿐인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예술가다.

이 자가 만든 빵을 좀 더 먹어보고 싶다.

「세계적인 수준의 페이스트리 쉐프라고?」

「프랑스의 제과제빵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고 하던데요.」

어디서 들었는지 잽싸게 나불거리는 아들을 보고 에드워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카페를 내보내지는 못하겠군.’

입찰을 통해 외부 카페를 모집한 것은 둘째 아들의 아이디어였다.

진취적이지 못하고 소심한 데다가 정신과 병동에 매일 틀어박혀 환자들만 상대하는 둘째 아들놈이 모처럼 무언가를 건의했길래 한 번쯤 밀어주었다.

그렇지만 그 카페가 오픈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매출이 너무나 잘 나왔다. 에드워드 해링턴은 그렇게 매출이 잘 나오는 이유는 ‘위치’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위치 때문에 그 정도 매상이 발생한다면, 그 가게의 좋은 점을 벤치마킹하여 병원에서 직접 경영하면 된다.

굳이 한 핏줄이 아닌 이에게 좋은 일을 해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냥 맛집이야. 승부해서 손님을 끌어들이는 거군. 그럼 우리가 쫓아낼 수는 없어.’

오히려 돈을 주면서 있어 달라고 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자네, 내 할 말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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